97화
주하는 집에 들어와 짐을 내려놓자마자 화끈거리는 목덜미를 두 손으로 가려 버렸다. 몇 번을 쓰다듬고 꾹 눌러 봐도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느껴지는 박동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닿았던 왼손은 손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쿵쾅거렸다. 심장이 조각나 여기저기에서 박동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 식으로 쓰다듬는 게 어딨어.”
지그시, 그리고 부드럽게. 힘을 들이지 않고 느릿하게 쓰다듬는 손길이 왜 그렇게 야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까 봐 꿀꺽 삼킨 게 몇 번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묻고 싶었던 것도 묻지 못하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가 있음에도 혹여나 쫓아올까 봐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과 머릿속을 휘젓는 생각들로 몸에 힘이 풀렸다. 벽에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아 얼굴을 길게 쓸어내렸다.
머뭇거림 없이 내미는 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불쾌감을 느꼈다면 거절이라도 하겠는데, 불쾌감은 무슨.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 대며 온몸에 열감이 차올랐다. 기쁜 듯하면서도 부끄럽고, 그러면서 어색하고 간지럽다. 뭐가 이렇게 정신이 없던지 당시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동안 했던 고민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반응이 가리키는 건 하나밖에 없을 테니까.
슬금슬금 기어 나왔던 감정들이 선율 형을 만난 때를 기점으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주하는 왼손을 꾹 잡아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이래서 만나고 싶지 않았던 건데. 일방적인 감정의 발현은 관계를 엇나가게 할 수 있으므로.
선율 형은 그냥 귀여워하는 동생으로 대할 뿐인데 저 혼자 이러지 않을까, 저러지 않을까, 김칫국 마시다가 실망하길 반복할 테지. 당연히 눈치 빠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을 것이다.
호기롭게 만나 봐? 하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미련했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주하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심장 박동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두근거림이 여느 때보다 크게 느껴졌다.
“……미치겠네.”
이마를 짚으며 헛웃음을 토해내는데, 바닥에 쓰러진 많은 양의 쇼핑백이 보였다. 주하는 암담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함께 운동하기 위해 산 물품들이 뒤늦게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매일같이 형을 봐야 한다.
그럼에도 싫지 않은 건 가라앉지 않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작은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감.
주저앉은 채로 고민하던 주하는 느리게 눈을 떴다.
아직은 단정 짓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두근거리던 게 일시적인 걸 수도 있고, 반대로 선율 형이 제게 관심을 줄 수도 있는 거니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당장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뿐이었다. 주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갑자기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설마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들어 보자 역시나 예상했던 사람이었다. 저를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던 인물이 이제야 조금 진정한 제 마음을 또다시 흔들기 시작했다.
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대립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네.”
전화를 받자마자 어색하게 대답했다. 제가 생각해도 참 줏대 없고, 갈대 같은 마음이었다.
—이제 여보세요는 안 하는 거야?
나긋한 웃음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말에는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런데도 목소리를 자세히 듣고 싶은 마음에 핸드폰을 귓가에 바짝 붙였다.
“응, 드디어 버릇을 고칠 수 있을 거 같아.”
—안 되는데.
“됩니다. ……그런데 어디야? 집에 가고 있어?”
—PC방이야. 방금 자리에 앉았어.
“PC방?”
—잠깐 할 게 있어서.
“라나탈 접속하려고?”
—뭐, 겸사겸사. 넌 오늘 들어오지 말고 푹 쉬고 있어.
주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멈칫했다.
“나 버리고 혼자 뭐 하려고?”
무심코 흘러나온 말에 주하는 흠칫 놀랐다. 아니,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이게 다 형 탓이다. 이상한 걸 닮아 가고 있잖아.
이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율 형은 낮게 웃고는 짐짓 억울한 듯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버리긴. 종일 데리고 있고 싶은 거 꾹 참고 집에 고이 모셔 놨는데. 그렇게 오해하면 내가 좀 억울한데.
주하의 입이 달싹였지만, 말이 되어 나가는 건 없었다. ‘종일 데리고 있고 싶었다’라는 것만 속으로 되뇔 뿐이었다. 평소에는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서 오늘은 왜 참았냐며, 하던 대로 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꾹 내리눌렀다.
주하는 왼손을 꼼지락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데?”
—비밀입니다.
“뭐?”
—영업 비밀이요.
영업 비밀? 설마 나한테 숨기는 게 있는 건가? 이렇게 대놓고 비밀이라고 하니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왜? 뭔데 그래?”
—말 안 해 줄 건데?
“아, 혀엉.”
—그렇게 불러도 안 돼. 주하 너도 무슨 일 생기면 말하라고 했을 때 안 했잖아.
“언제?”
—자진신고에서 천상검한테 당할 때.
그때의 일을 지금까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 줄이야. 당시엔 괜히 민폐 끼치는 것 같기도 했고, 말해도 달라질 게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굳이 알리지 않았다. 나름대로 부담 주기 싫어서 그런 건데 그걸 이렇게 보복하다니.
“그래서 똑같이 당해 보라는 거야?”
—그럴 리가. 내가 주하 널 닮아 가는 거야.
“……그냥 사실대로 말해. 괴롭히고 싶다고.”
—너무한다. 내가 얼마나 널 예뻐하고 있는데.
“이게……?”
—그럼, 공격력 안 뺏어 가는 것만 봐도 알잖아. 게다가 말도 잘 들어, 칭찬도 해 줘, 내가 생각해도 너무 티가 나는데?
뻔뻔하게 나오는 선율을 보며 주하는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저런 상태라면 물어봐도 절대 답해 주지 않을 게 뻔했다. 하여튼 심술도 보통 심술이 아니다.
—근데 주하야.
“왜.”
—생일이 언제야?
“생일? 갑자기 생일은 왜?”
—오늘 가족들이랑 만난 게 혹시 생일 때문인가 해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며 묻는 선율에 주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방학했는데 너무 연락 안 해서 걱정하시길래 생존 신고하러 간 거야. 우리 여사님이 쿨하긴 하셔도 내가 막내라 신경 많이 쓰거든.”
—형제가 있어?
“위로 형 두 명 있어.”
—어쩐지. 형이라고 부를 때 가끔 늘려서 부르는 게 익숙해 보인다 했더니. 귀여움 듬뿍 받았나 봐?
툭하면 심부름시키고 놀리기만 했던 게 귀여움받은 거라면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 주하는 자기 형들을 떠올리다가 미간을 구겼다.
“tmi는 자체 검열할게.”
—그런 거 듣고 싶어서 묻는 건데.
“할 일 있으시다면서요. 나보고 게임 들어오지 말라더니 대체 뭘 하는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지. 아무튼, 그래서 생일이 언제라고?
“……겨울이야. 아직 한참 남았어.”
대충 넘어가려 하자 선율 형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역시 공략하는 게 쉽지 않아.
“내가 레이드 보스도 아니고, 무슨 공략이야.”
—레이드 보스 맞아. 그것도 최종 보스. 거의 다 잡은 줄 알았는데 아직 기믹이 끝나지 않았나 봐. 내 생에 이렇게 어려운 보스는 처음이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힘이 없어 보였다. 저보다 더 게임에 진심인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 뭔가 억울했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어차피 도긴개긴이었으니까.
—그래도 쉬운 몹보단 어려운 몹을 잡는 게 더 재밌지.
“잡아도 드롭하는 건 없다.”
—왜 없어,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는데.
“보상? 나한테 받을 게 있어?”
—있지, 그럼.
딜 노예에 이어서 이번엔 공략해야 할 보스가 된 주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한테 받을 게 뭐 있을까 하고. 게임 노동력은 이미 저당 잡혀 있고, 현생에서도 매일같이 만날 것 같은데 말이다. 뭔가 다른 물리적인 보상을 원하는 건가?
곰곰이 생각하던 주하는 순간 미간을 찡그렸다.
저를 게임처럼 공략하겠다는 사람한테 무슨 보상을 원하는지 고민하고 있다니. 거기다가 공략 완료 기준이 뭔데? 분명 장난으로 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혼자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저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예에, 그럼 열심히 해 보세요.”
그래서 이번에도 적당히 대충 대답했다. 그러자 선율 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뻔뻔하게 받아쳤다.
—그러려고. 계속 응원해 줘.
역시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 주하는 고개를 저으며 왼손을 들어 올려 조용히 응시했다. 아까와 같이 박동하는 느낌은 없지만, 온기가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웃기지 말라고, 장난 그만 치라며 한 소리 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로 응원해 주고 싶었다.
“그래, 파이팅해.”
—오늘은 웬일로 얌전하네. 혼낼 줄 알았더니.
“……그나마 자각은 하고 있어서 다행인가.”
—자각이 아니라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고 있는 것뿐이야.
“아무렴요.”
—그래서 생일이 언제라고?
말하기 무섭게 시작된 공략에 주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생일을 알게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서 결국엔 날짜를 알려주었다.
“11월 29일이야. 진짜 한참 남았다니까.”
—그래도 미리 알아 둬야지.
“미리 알면 선물하려고? 그럼 나 기대해도 돼?”
—내 취미가 남들 생일 날짜 수집하는 거라. 선물은……글쎄?
“말이 되는 소리 좀요,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