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딜러 줍는 힐러-96화 (96/130)

96화

<스크린샷: 자진신고를 조롱하는 개인주의>

<스크린샷: 월드 창에서 자진신고를 찾는 외침>

<스크린샷: 필드에서 바나나와 지구침략에게 쫓기는 자진신고>

<스크린샷: 천상검 시체를 밟고 있는 카젤>

아무리 대단한 길드, 대단한 팀이라고 해도 이건 선 넘지 않았습니까? 기어코 저희 길드 레벨을 떨구기까지 하고 그들은 희희낙락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저희가 전 시즌에서 싸우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그 싸움은 퍼클을 경쟁하는 걸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레이드도 하지 못하게 박살 내는 게 그들의 싸움법입니까?

더 어이없는 건 카젤님입니다.

같은 팀이었던 사람들을 그렇게 괴롭히고 싶습니까? 뒤통수치기 전에 먼저 당해서 억울한가요?

자세한 사정도 모르고 저희만 계속 저격하는 다른 유저분들도 인제 그만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피해자가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왜 가해자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계속해서 리프 길드와 싸울 거고, 사과를 받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속으로 음흉하게 사람 가지고 노는 카젤과 1위 레이드 팀의 인성을 제대로 보여 준 리프 길드.

이대로 괜찮은 걸까요?

(댓글/펼치기)

—헐? 이거 ㄹㅇ임?

└진짜 같은데?

└스콧 게임 접은 것도 맞고 그 자리를 카젤이 들어간 것도 맞음 ㅇㅇ 이렇게 보니까 좀... 그러네?

└그러고 보니까 확장팩 초반부터 멜로디랑 카젤이 같이 다녔구나

—와... 소름 돋는다.

—반대쪽 이야기도 들어 봐야지 않음?

—이게 사실이면... 리프랑 카젤은 걍 ㅆㄹㄱ인데?

—자진신고가 리프한테 얼굴 철판이라고 한 게 이 때문이군? 계속 그렇게 외치길래 몬가 했더니

—아니 왜 남의 팀 사람을 꼬셔 가? ㅈㄴ 무개념이네

—꼬신다고 꼬셔진 놈도 문제야

└리프에서 오라고 하면 나도 좀... 끌릴 거 같은데 –ㅅ-

└나도22

└나도333

└솔직히 나도4444

—팀 바꾸는 건 그럴 수 있음. 근데 너무 매너가 없는 게 문제야

—스파이 짓까지 했다면 뭐...

—카젤 ㅁㅊㅅㄲ

—본인만 나가면 됐지 이간질은 왜 해? 퍼클 뺏길까 봐 그랬냐? 비겁한 ㅅㄲ

—그래서 용병 모아서 복수하려다가 망함??ㅋㅋㅋ

—이 악물고 달려들었다가 처절하게 밟혔네...

—보니까 스샷 날조하진 않은 거 같음

└전문가야?

└뒤에 배경 보면 알아. 지우고 쓴 건지 아닌지

└ㅇㅎㄹ!

—멜로디 인성질 할 때부터 알아봤음

—멜로디 빠는 ㅅㄲ들 오늘 이후로 안 보이겠군ㅋㅋㅋ

여기까지 봤을 때 주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이 빠질 것처럼 땅기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누군가가 머릿속에 억지로 무언가를 집어넣는 느낌이었다.

교묘하게 짜깁기해서 만든 이야기가 너무 그럴듯했다. 저와 선율 형이 확장팩 초반부터 같이 다닌 건 유저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천상검이 그렇게 증거 타령을 해 댔구나.

“하…….”

반박하고 싶지만, 제게는 증거가 없다.

천상검이 블랙체리를 미리 영입한 것도, 저를 버리고 던전과 죄악의 탑을 돈 것도, 길드에서 내쫓을 때 했던 말들까지.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무엇 하나 남긴 게 없다니.

문제는 저만 욕하는 게 아니라 리프 길드와 선율 형에게까지 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고민하고 있는데, 손등에 온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선율 형이 저를 토닥이고 있었다.

“……형.”

“괜찮아. 걱정할 거 없어.”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천상검 글에 반박하지 않으면 계속 욕먹을 텐데? 나는 상관없는데 형이랑 길드 사람들은…….”

“너는 왜 상관이 없어? 애먼 생각 좀 그만해.”

위로하던 손이 어느새 위로 올라와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고개가 푹 숙여질 정도로 문지르는 손길이 거침없다.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자 웃고 있는 선율 형이 보였다.

“이렇게 마음 약해서 어떻게 해?”

“…….”

“만약 천상검이 올린 글이 사실이라고 해도 난 떳떳할 거 같은데. 잘하는 사람 영입하는 거야 뭐, 다른 팀도 다 하는 거잖아. 그만큼 네가 잘한다는 뜻이고.”

“아니, 형. 그 문제가 아니잖아.”

“그 문제 맞아. 그리고 천상검이 올린 글에는 큰 오류가 하나 있어.”

“오류?”

“자진신고가 위협적이었던 건, 네가 있을 때뿐이었어. 카젤이 빠진 자진신고? 당연히 견제할 이유가 없지. 우리가 왜 이간질하겠어. 그냥 놔둬도 알아서 바닥에서 기고 있을 텐데.”

자신을 칭찬하는 말이었지만, 주하는 답답할 뿐이었다.

“형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몰라. 당연히 이간질했다고 생각할 거야.”

“뭐, 우리한테 증거가 없으면 그렇겠지.”

“그러니까 문제라는 거야. 내부에서 뭐라고 하든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고. 다들 나 때문에 욕먹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천상검이 올린 사진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더욱더 초조해졌다. 자세한 상황을 모르면 정말 믿을 수도 있겠다 싶어질 정도였다. 댓글만 조금 훑어봐도 여론은 천상검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리프 길드는 라나탈을 하는 유저라면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게임이 오픈된 후로 단 한 번도 1위에서 내려온 적 없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네임드다.

그런데 이런 더러운 스캔들이 터졌으니 분명 너 나 할 것 없이 물어뜯으려 들 것이다.

이 와중에 선율 형은 어떻게 침착할 수가 있지?

주하는 걱정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선율을 보았다. 그런데 그는 이런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맑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주하의 구겨진 미간을 살살 풀기 시작했다.

“주하야,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선율의 손을 제지하려던 주하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한테 증거가 없으면, 이라는 가정이었잖아. 증거가 있으면 어떨까?”

“……뭐?”

증거가 있으면 당연히 판을 뒤집을 수 있겠지만, 아마 없을 텐데? 대부분 혼자 있을 때 당했고, 자진신고는 길드 전체가 한통속이었다. 거기다 우리한테 그렇게 당했으니 진실을 밝혀 주기 위해 나서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설마 거짓 증거를 만들어서 반박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보정 실력이 좋다고 해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거기다 요즘은 전문가들이 많아서 작정하고 파헤치면 들킬 수도 있었다.

“형, 설마 증거 조작하려고?”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아니, 나한테도 없는 증거가 형한테 있을 리가 없잖아.”

그 말을 듣자마자 선율이 웃음을 터트렸다. 핸들에 기대 웃던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 주하를 보며 말했다.

“아, 정말…… 이렇게 순진해서 어떡하냐.”

“어?”

“……릴 수도 없고, 진짜.”

조용히 중얼거리는 말을 놓친 주하가 의문스럽게 쳐다보자 선율은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 주하에게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머릿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 빗질하듯 크게 쓸어 넘겼다. 전과는 다른 느낌의 진득한 손길이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자 놀란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주하의 몸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생기지 않으니까 괜히 마음 졸이지 마.”

“…….”

“내가 얌전히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고 있잖아?”

어느새 목덜미까지 내려간 손이 어깨를 한 번 쓸고 느릿하게 이동했다. 주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다가 손이 떨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호흡할 수 있었다. 잠시 멈췄다 급하게 들어온 산소에 가슴이 크게 펄떡였다.

“그리고 네가 또 당하게 놔두지도 않을 거고.”

다짐과 같은 말이 나긋하게 흘러나왔다.

선율은 손끝에 남아 있는 감촉을 느끼며 가볍게 문질렀다.

그래, 그렇게 당했는데 또 당하면 억울하지. 친목질에 당하는 것만큼 기분 더러운 건 없을 것이다. 남에게 피해 주기 싫어하고, 본인이 힘든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착하고 순한 녀석이 겪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잘하는 사람이 팀에 들어왔으면 챙겨 줘도 모자랄 판에 질투하고 배척하다니.

섬세한 외모와 달리 주하는 의외로 무심한 구석이 있고, 지나간 일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담백한 성격을 가졌다. 그렇기에 제 설득이 통한 것이다. 자존감 없는 사람은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받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당시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을 테지. 자진신고에서 추방당하고 한참 보이지 않다가 겨우 연락이 닿았을 때, 주하는 어딘가 많이 지쳐 보였다. 금방이라도 다 포기할 것처럼. 그래서 제 진심을 가감 없이 내보였다. 그는 거짓 없이 부딪쳐 오는 사람을 외면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선율은 작은 접촉에도 흠칫 떨며 눈 밑을 붉은빛으로 물들이는 주하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러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고 있는 손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긴장한 기색의 굳은 몸을 느끼며 선율은 엄지로 손등을 슬슬 쓰다듬었다. 그러곤 보란 듯이 눈을 휘며 웃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눈빛과 마주했지만, 선율은 짙게 웃을 뿐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주하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삐거덕거리며 집에 들어가겠다고 할 때까지 커다란 손은 계속해서 쓰다듬기를 반복했다. 단순한 위로가 아닌 다른 의도가 들어가 있는 그런 손길로.

주하는 같이 짐을 옮겨 주겠다며 운전석 밖으로 나오려는 선율을 다급히 제지하곤 묵직한 쇼핑백을 들고 부리나케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율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말았다.

“귀까지 빨개졌네.”

만져 보면 아마 후끈후끈하게 열이 올라 있을 텐데. 아쉬움을 달래며 선율은 방금까지 부드러운 살결을 쓰다듬었던 손을 응시했다.

끝마디가 살짝 붉어져 있는 게, 아무래도 제 열이 그에게 옮겨 간 듯했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느끼며 선율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차가 출발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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