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길드] 바나나: 야!!!
[길드] Snow: !$^%#$Q#$%
[길드] 멜로디: 인테리어 담당할 사람?
[길드] 리미티드: 대장님 차라리 저 주세요... 저 실내건축과 다녀요
[길드] 개인주의: 휴... 구세주가 있었어...
[길드] 일시불: 리밋 형님 ㄱㅅㄱㅅ
[길드] 월차연차휴가: 아무도 좋다고 한 사람 없었는데... 누나들... 정신 좀 차려...
[길드] 지구침략: ^^;; 리밋이가 하는 게 낫겠다
[길드] 여름n모기: 리밋아 잘 부탁해...
[길드] 바나나: ......
[길드] Snow: ......
[길드] 카젤: 누나들 고생했어요;
주하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제가 봐도 너무 처참해서 차마 입에 발린 말을 할 수 없었다. 본인들에겐 만족스러운 디자인이었을지 모르지만, 길드 하우스는 모두가 함께 쓰는 공간이니 정상적인 디자인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다행히도 리미티드가 실내건축과를 다닌다고 하니 조금은 안심이다.
[길드] 바나나: ...악탑이나 갈래
[길드] Snow: 나도...
작품을 공개하자마자 강등당한 두 사람은 침울한 모습으로 각자의 파트너를 데리고 죄악의 탑으로 사라졌다. 지구침략과 개인주의가 잘 다독여 주길 바랄 뿐이었다.
***
용병 사건 이후로 자진신고는 길드원들이 한 명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필드는 나가지도 못하고, 던전에서는 놀림당하기 일쑤였으니 일반 길드원들은 버티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내부 분열인지 아니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잠시 빠져나온 건지는 모르지만, 자진신고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이번 주간에는 라흐니스가 침울해하는 바나나와 Snow를 알았는지, 흑마법사와 성기사 전용 무기를 내어주었다. 아이템을 먹자마자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레이드도, 평판도, 필드도, 거기다 자진신고까지 제대로 혼내 주고 있는 요즘이 리프 길드원들로서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주하에게만큼은 곤란한 하루하루다.
—주하야, 주소 언제 줄 거야?
“뭐가?”
—놀러 오라며.
“기억이 안 납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만나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언제 오냐는 선율 형의 메시지에 지금 집에 가고 있다고 대답하자 곧장 전화가 왔다. 그러곤 오늘도 어김없이 닦달이 이어졌다.
—주소 알려 주기 싫으면 중간에서 만나자니까?
“생각해 본다니까.”
—지금 생각만 한 지 벌써 나흘째야.
“그거밖에 안 됐나?”
—……강주하.
“와아, 선율 형은 목소리 깔아도 잘 어울리네.”
주하는 손부채질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만나는 순간 뒷덜미 붙잡혀서 운동하러 갈 게 뻔한데 만날 리가 있나. 보통은 거짓말로라도 “얼굴만 보자”라고 할 법한데 선율 형은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만나는 게 덜 힘들 텐데?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잘 선택해.
이렇게 협박만 늘었다. 만나고 싶더라도 저 협박 때문에 마음을 다잡게 된다.
솔직히 선율 형을 실제로 보면 어떨지 궁금하긴 하다. 요즘 들어 가끔, 아니, 자주 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정도로 흔들리고 있으니까.
어느 형, 동생 사이가 아침저녁으로 통화하고, 네 것인지 내 것인지 아웅다웅하고, 툭하면 애인이라는 핑계를 대고, 보고 싶다고 소곤거리며 데이트를 입에 담을까.
만나 보면 장난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것 같은데…… 그냥 미친 척하고 한번 만나 봐?
“…….”
그런데…… 만나면? 만나서 진짜 두근거리면 어떻게 해? 형은 장난이었는데, 나만 진지해지면? 아니면 나는 별론데 형이 진지하면?
차라리 일찍 만났으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진 않았을 텐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감정이란 게 점점 감당할 수 없는 크기로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이래서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걸까. 운동은 이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결론이 왜 그래?
“글쎄.”
—주하야.
저를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휙휙 저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이러다 또 휩쓸리면 어떡하려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언젠가 괜찮아질 것이다. 계속 이렇게 피하다 보면 형도 나중엔 포기하겠지.
“…….”
그런 생각을 하는데 뭔가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흘러가는 게 맞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슬그머니 올라오고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제 상태를 깨닫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또 이런다, 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주하는 피할 구실을 만들 수 있겠다 싶어 곧바로 생각한 것을 실행했다.
“너무 더워서 안 되겠다. 나 PC방 가서 접할게.”
—……PC방? 저번에 갔던 거기?
“응? 어디?”
—에어컨 고장 났을 때 갔던 곳.
“어? 어, 거기 가야지. 바로 앞이야. 집까지 가는 것도 귀찮다.”
—바로 앞?
“예에, 도착 10초 전입니다.”
제 대답에 선율 형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웃음기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밖에 더우니까 빨리 들어가.
“응, 전화 끊을게.”
—그래.
주하는 통화를 끊으며 작게 안도했다. 한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조용히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핑계이긴 했지만, 확실히 덥긴 더워서 PC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드디어 건물에 들어서는데, 바로 앞에 익숙한 남자가 보였다. 방금 통화를 끊었는지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PC방에 올 때마다 보는 남자는 오늘도 여전히 현실감 없게 생겼다. 저런 얼굴로 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에 가까운 궁금증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선율 형도 잘생겼다고 했지? 사진이나 보내 달라고 해 볼까…….
순간 떠오르는 허무맹랑한 생각에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가볍게 묵례하고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남자가 활짝 웃었다.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자 남자가 고갯짓으로 PC방 입구를 가리킨다. 먼저 들어가라는 뜻인가?
그를 힐끔 쳐다보고 걸음을 옮기자 따라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본인도 들어갈 거면서 왜 먼저 들어가라고 한 거지? 주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PC방에 들어서자마자 주변을 훑어보았다. 오늘은 사람이 많이 없어서 빈자리를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켜는데,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는다.
"……."
슬쩍 쳐다보자 저를 따라 들어온 그 남자가 보였다. 자리가 이렇게 많은데 굳이 옆에서? 의아하긴 했지만, 같은 라나탈 유저라 묘한 유대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저번에 제 모니터를 보며 흥미로워하던 게 떠올랐다.
어차피 각자 게임 하느라 바쁠 테니 신경 쓸 일은 없겠지. 마이크 쓸 때나 조심해야겠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 라나탈을 실행했다. 아이디와 비번을 치고 접속하자 길드원들이 반겨 주었다.
<길드원 카젤 님이 접속했습니다.>
[길드] 지구침략: 어서 와
[길드] 개인주의: 어서 옵숑!
[길드] 일시불: 형님 ㅎㅇㅎㅇ
[길드] 리미티드: ㅎㅇ
[길드] 바나나: 카젤아!! 나 강화!! 무기 강화해야 해!
[길드] 카젤: 안녕하세요 ㅇㅇ 지금 할까요?
[길드] 바나나: ㅇㅇㅇㅇㅇ 앞에서 대기 중
주하는 바나나에게서 온 파티 초대를 받고 곧바로 자리를 이동했다. 강화 NPC 앞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는데, 그중 바나나 캐릭터는 맨 앞에 있었다.
<길드원 멜로디 님이 접속했습니다.>
[길드] 개인주의: 대장님 어서 오세요!
[길드] 일시불: 오셨습니까아
[길드] 카젤: 왔어?
[길드] 멜로디: ㅇㅇ 주하 지금 누구랑 파티 중?
[길드] 바나나: 나랑 파티 중. 무기 강화 부탁하려고
[길드] 바나나: 근데 넌 오자마자 카젤만 찾냐? 오죽하면 내가 카젤이랑 둘이서 파티해 보는 게 처음이야. 어? 어이가 없어서 진짜ㅡㅡ
[길드] 멜로디: 나도 ㅊㅊ
[길드] 바나나: 와... 이 정도 집착이면 병이다 병...
[길드] 카젤: 누나 저 형 반품 좀;; 제발
[길드] 바나나: 네가 자초한 일이야. 알지? 저 자식 초대를 수락한 순간부터 예정된 일이었어. 너도 악으로 깡으로 버텨
[길드] 카젤: ㅠㅠㅠㅠㅠㅠ
주하는 길드 창에서 우는 것과 달리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길드] 멜로디: 주하도 가만 보면 뒷일은 생각 안 하는 거 같아
[길드] 바나나: ㄹㅇㅋㅋㅋㅋ
[길드] 여름n모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개인주의: ㅋㅋㅋㅋ 다들 카젤 형이 순둥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아셔야 함
[길드] 카젤: ㅇㅇ? 내가 왜?
[길드] 개인주의: 순둥이라는 분이 어뜨케 매번 대장님 저격을 하냐고요! 말도 안대지 암!! ( °δ° )
[길드] 지구침략: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Snow: 아직 얼굴 안 봐서 그런 거 같아ㅋㅋㅋ
[길드] 바나나: 원래 모르면 용감한 법이야
[길드] 일시불: 잉? 저번에 두 분 만난다구 하지 않았어여?
하필 겨우겨우 가라앉혔던 주제가 다시 튀어나오다니. 주하는 아찔한 기분에 이마를 짚었다.
[길드] 멜로디: 요리조리 잘도 도망 다니던데
[길드] 개인주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른 게 많아서 두려우시구낰ㅋㅋㅋㅋ
[길드] 카젤: ......
[길드] 일시불: ㅋㅋㅋㅋ 그 맘 알졍
[길드] 개인주의: 근데 카젤 형... 저는 도망 다니는 거 추천하지 않아용 ㅇㅅㅇ
[길드] 카젤: ...?? 왜?
[길드] 개인주의: 왜긴여ㅋㅋㅋ 우리 대장님 뒤끝 심하다고 나나 누나가 말했잖아여∼ 더 감당하기 어려워지기 전에 항복하시는 게 어떨까여??ㅋㅋㅋ
[길드] 바나나: ㅋㅋㅋㅋ 잘한다 우리 개주
[길드] 멜로디: 그렇다는데? 주하야?
[길드] 카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