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딜러 줍는 힐러-87화 (87/130)

87화

—하긴, 신고 입장에서 멜로디 같은 사람이 여러 명 있으면 암담하겠다.

—그것도 카젤 형이 대장님 같은 인성이 되면? 와…… 이건 좀 끌리는데요? 싸울 때만 잠깐 빙의하면 안 돼요?

“괜찮네. 선율 형, 영혼 반 떼서 잠깐 놀러 올래?”

—미친! 놀러 오래. 으하하핫!

주하도 팀원들과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선율 형을 놀리는 건 언제나 짜릿한 쾌감을 동반했다. 웬만해선 잘 당하지 않는 사람이라 이런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다고 해야 할까? 팀원들도 한마음일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웃고 있는데, 갑자기 나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메시지로 주소 찍어서 보내. 지금 당장 갈게.

—…….

—…….

순간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인데 왜 등골이 오싹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저 자식 저거…… 진심이다.

—진심 맞아. 주하야, 빨리 보내 봐.

“……죄송합니다.”

—사과 말고, 주소. 그래야 놀러 가지.

“혀엉.”

—참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지금 엄청 보고 싶어졌어.

“외계인 형! 살려 줘요!”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어. 미안, 수고해라.

—우리 지금…… 실시간 현피를 보고 있는 거야? 아니면 로맨스를 보고 있는 거야? 뭐가 됐든 팝콘 가져와, 빨리!

—콜라도! 콜라도 필요함!

“이 배신자들이…….”

같이 웃고 떠들던 팀원들은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등을 돌렸다. 빠져나갈 구멍만 있으면 서로를 배신하길 주저하지 않는 이곳은 여전히 야생이었다.

—쟁 끝나고 보자, 주하야.

“저 끝나고 할 일이 있어서…….”

—그럼, 할 일 있지. 나랑 만나는 일.

—드디어 둘이 만난다고?

—카젤 형, 살아 돌아오길 기도하고 있을게요.

“여러분도 다 같이 보고 싶네요. 저희는 생사를 함께하는 동지가 아니던가요.”

—오! 그거 좋다. 나중에 날짜 정해서 만나자. 오늘은 둘이서만 데이트하고.

“나나 누나……?”

—응, 오늘은 아니야. 수고.

깊게 한숨을 내쉬자 채팅방은 또다시 웃음으로 가득 찼다. 그 와중에 선율 형은 데이트를 중얼거리더니 좋은 생각이라며 그녀를 칭찬했다. 나나 누나의 비명과 저를 안쓰럽게 여기는 팀원들의 말들이 뒤섞여 채팅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하는 조금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애써 무시했다. 저런 말 하나하나가 잔잔한 가슴에 파동을 일으킨다. 속으로 짧게 혀를 찬 주하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 쟤들 우리 발견한 거 같은데요?

—모여서 이쪽 보고 있네.

—뒤치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너무 대놓고 걸리긴 했네.

—수다 좀 그만 떨었어야지, 으이그.

—시간 지체할 필요 뭐 있어. 바로 가자.

주하를 실컷 놀린 리프 길드원들은 도핑과 버프를 마치고 자진신고에게 달려갔다. 첫 격돌 이후 두 번째 떼쟁이었다.

자진신고는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월차연차휴가를 견제했다. 마법사의 주특기인 광역 CC기를 겪어 본 터라 본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거리를 벌리고 밀치기도 하면서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오? 이 녀석들 그래도 바보는 아니네?

—인정하긴 싫지만, 솔직히 컨트롤은 나쁘지 않아.

—그건 그래.

주하와 벌꿀오소리의 합류로 자진신고가 2위를 하긴 했지만, 그건 날개를 달아 준 것뿐이었다. 공략에 있어서 약하긴 했어도 개개인의 컨트롤은 솔직히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팀보다는 못해요.”

하지만 두 팀을 모두 겪은 주하에게는 차이가 확연하게 보였다. 단순히 히든 특성의 유무로 리프 길드가 승리하는 건 아니었다. 일단 자진신고는 PVP 경험치가 너무나 부족했다. 전장 칭호를 단 이들이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렇다 보니 반응 속도부터 차이가 났고, 스킬을 쓰는 타이밍, 시야 확보 등에서 리프 길드가 전체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그 작은 차이와 피지컬이 모여서 결국 승패가 갈리는 것이었다. 인원수로 따지면 자진신고가 두 배 이상 많은데도 리프가 밀리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저놈들이랑은 급이 달라.

—포스도 다르죠! 우리는 대장님도 있고, 25강 무기 든 깡패도 있고, 사령관도 두 명 있잖아요!

—거기다 공주(공포의 주둥이)인 개주랑 시불이가 있지.

—어우, 쟤들 입장에서는 끔찍한 혼종이네.

—엣헴!

뭘 뿌듯해하고 있냐며 막둥이들을 갈군 팀원들은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의외로 소극적으로 나오는 자진신고 탓에 지지부진하게 공수교대만 하고 있던 그때였다.

—차라리 우리가 한 번에 쭉 들어갈까?

—그럴…… 어?

—엥?

—뭐야, 이거?

순간, 후방에 있던 Snow와 멜로디, 그리고 월차연차휴가에게 기절이 걸렸다. 정면에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주하는 빠르게 시야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러자 후방에서 달려드는 여덟 명의 유저들이 보였다. 그들은 각기 다른 길드로 리프와 자진신고와는 관련 없는 이들이었다.

—쟤네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어? 쟤들 전장 유저들인데?

—잉? 전장 유저들이 갑자기 왜?

주하는 재빨리 멜로디에게 걸렸던 기절 스킬을 가져왔다. 그제야 멜로디는 팀원들에게 걸린 디버프를 모두 해제했다. 갑자기 공격하는 다른 유저들을 피해 모두가 왼쪽으로 이동하는데, 그들은 자진신고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리프만 쫓기 시작했다.

—재미있어 보여서 합류한 건가?

—그럼 자진신고도 때려야지 왜 우리만 쫓아와?

—뭔가 이상한데.

여름n모기가 후방으로 달려와 힐러들의 앞을 지키며 이동했다. 앞에는 자진신고, 뒤에는 전장 유저들. 그들에게 둘러싸인 작금의 상황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방어적이었던 자진신고가 갑작스레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거, 설마.”

—미친, 설마 저 자식들 용병 구한 거야?

—와…….

리프 길드원들은 쏟아지는 공격에 다급히 몸을 피했다. 뒤치기로 들어온 용병들은 PVP에 강한 전장 유저들이라 자진신고와 동시에 들어오면 그대로 쓸릴 가능성이 컸다.

그때, 이동 속도가 빠른 적 딜러들이 치고 나오기 시작했다. 살금과 베르메르는 탱커부터 죽일 작정인지 지구침략에게 달라붙어 각종 CC기를 퍼붓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동안 탱커에게 힐을 주기 어려울 거라 판단한 것이다.

기절을 걸고 이동 속도 감속까지 써가며 끈질기게 지구침략을 붙잡아 두자 조금씩 본진과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외계인 형 완전히 붙잡혔는데? 혼자 떨어져서 죽으면 합류하기 어렵지 않나?

—우리 여기서 누우면 앞으로 계속 못 일어난다. 어떡해서든 살려야 해!

—나 일단 생존기 켰어. 최대한 도망가 볼게.

—아! 나도 걸렸어.

자진신고에게 붙잡힌 지구침략 말고도 뒤에서 달려온 전장 유저들에게 여름n모기도 발이 묶여 버렸다.

—이 자식들이 이래서 안쪽까지 유인한 거였네.

—대장님 어떡해요?

—둘 다 최대한 살릴 테니까 딜러들은 죽지 않는 선에서 견제해.

멜로디의 지시에 주춤대던 딜러들이 적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가 모기 형한테 갈게요. 월차 형은 외계인 형한테 가세요.”

—어, 개주랑 나나 누나도 따라와.

—리밋이랑 시불이는 카젤 따라가고.

—넵.

—옛썰!

두 팀으로 나뉜 딜러들이 전후방으로 흩어졌다. Snow와 멜로디만 중앙에서 두 탱커에게 힐을 퍼붓고 있었다.

주하는 여름n모기에게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붙은 암살자를 뒤로 쭉 밀어냈다. 그사이 일시불이 여름n모기 앞에 속박의 덫을 깔았다. 순간 덫에 적 유저가 걸려들자 바닥에 녹색의 이끼가 깔리며 적들의 발을 묶어 버렸다. 그러나 상대편 힐러가 곧바로 디버프를 해제했다. 반응 속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랐다.

—와 씨, 역시 전장 유저들인가?

—저기 봐, 대부분 다 장군이야.

—작정하고 불렀네, 불렀어.

“싸우는 것보단 매즈 위주로 발 묶어야 해.”

—어떡하지?

“리밋아, 들어가서 지진 써 봐.”

리미티드는 주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적 본진으로 들어가 땅을 내려쳤다. 그러자 시전 스킬을 방해하는 지진이 일어났다. 주하는 그 타이밍에 맞춰 여름n모기에게 붙어 있는 녀석들 뒤로 보텍스 문을 깔았다. 작은 회오리가 생기며 적들을 끌어당기자 여름n모기는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리밋아, 빨리 돌아와.”

—응.

가장 뒤처져 있던 리미티드에게 멜로디의 보호막이 둘렸다. 하지만 지진이 끝나자마자 들어온 매서운 공격에 적진에서 벗어나기조차 쉽지 않았다. 팀원들이 최대한 보조하고 리미티드 본인도 빠져나오려 했지만, 연속으로 이어지는 공격에 계속 발이 묶였다.

주하는 잠시 고민하더니 리미티드를 대상으로 보석을 하나 설치했다. 그러곤 멜로디의 옆으로 달려갔다.

“형, 나 물의 오라랑 정령의 수호 좀.”

멜로디로부터 시전 밀림을 방지하는 <물의 오라>와 10m 내에 들어온 적의 시전 속도 증가와 이동 속도를 감소시키는 <정령의 수호> 버프를 받은 주하는 리미티드에게 설치해 둔 보석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아슬아슬하게 피가 남은 리미티드와 본진에 있던 카젤의 캐릭터가 순간 교체되었다. 리미티드는 멜로디의 옆으로, 주하는 적진으로 들어간 것이다.

주하는 적들에게 광역 침묵을 걸고 정령의 수호를 이용해 녀석들의 이동 속도를 감소시켰다. 보석술사의 이동 속도가 빠르다는 장점을 이용해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유지하다가 여름n모기가 본진으로 합류할 때쯤 자신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반대쪽에 있던 지구침략도 너덜너덜해진 채로 본진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겨우 살아서 돌아오려나 싶을 때, 뒤쫓는 적들로 인해 탱커들을 살리러 갔던 딜러들도 공격당하기 시작했다.

—으악! 점사33) 당한다!

—생존기 쓰면서 달려!

—이미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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