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일시불을 보석 체인으로 쭉 끌고 온 주하는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세웠다. 바로 기절이 들어올 거라 생각한 일시불은 단숨에 거리를 벌리는 스킬을 사용해 뒤로 쭉 물러났다.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고 안도하며 도망가려 하는데, 이상하게 캐릭터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머리 위에 별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어느새 기절에 걸려 제자리에서 해롱거리고 있던 것이다.
그제야 일시불은 제가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드] 멜로디: 너무 예상대로 움직여준 거 아니야?ㅋ
[길드] 월차연차휴가: 시불아... 카젤이 보석 체인으로 왜 끝까지 안 끌고 갔겠냐
[길드] 월차연차휴가: 도망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준 거잖아... 이제 생존 스킬 빠졌으니까 더는 못 도망가겠네 ㅉㅉㅉ
[길드] 개인주의: ....;;;
일시불이 기절에 걸려 있는 동안 주하는 가까이 다가갔다. 가속 버프가 남아 있는 시간을 계산하고는 시전 스킬을 사용했다. 시전이 끝날 때까지 기절 상태였던 일시불은 결국 한 방을 제대로 맞아 버렸다.
[길드] 바나나: 엥?
[길드] Snow: ???
[길드] 리미티드: ?
[길드] 월차연차휴가: ......뭐야?
도트 대미지로 피가 70퍼센트 남아 있었던 일시불은, 주하의 큰 스킬 한 방에 60퍼센트가 닳았다.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은 일시불은 경악했다.
[길드] 일시불: ?????????
[길드] 카젤: 미안ㅋㅋ 크리 터졌어
[길드] 일시불: 아니;; 그래도 당혹스러운데여;;;;;
[길드] 개인주의: 크리 터지면 2방에 죽일 수 있다는 뜻 아님;;? 크리 안 터지면 대충 3방??? .....와
[길드] 월차연차휴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게 PVP템은 전 시즌 템이잖아; 카젤 무기는 현존하는 무기 중 최고고;;
[길드] 리미티드: 잘하면 대장님도 이기겠는데...?
[길드] 카젤: 이미 이겼음 ^^
[길드] 멜로디: ......
[길드] 바나나: ㄹㅇ???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지구침략: ㅋㅋ 이러면 충분히 할 만하지 ^^ 카젤이 랭커 2인분은 거뜬히 하겠네
[길드] Snow: 승산 있다ㅋㅋㅋ
즐겁게 대화하는 동안 주하는 일시불을 바닥에 눕혔다. 너무하다며 찡찡대는 일시불에게 가볍게 웃어 주고 아군 팀과 합류했다.
[길드] 멜로디: 이번엔 5:5 ㄱㄱ
[길드] Snow: 시불이 부활 좀 하고ㅋㅋㅋ
[길드] 일시불: ㅠㅠㅠ 쳇
Snow에게 부활을 받은 일시불은 각종 도핑을 비롯한 음식까지 풀로 세팅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멜로디 파티와 지구침략 파티도 전원이 풀 도핑했다.
[길드] 개인주의: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보챗으로 가시죠!
[길드] 월차연차휴가: ㅇㅇ
[길드] 바나나: 우리도 보챗으로 가자
리프 길드원들은 파티별로 파 둔 보이스 채팅방으로 들어갔다. 준비를 끝낸 두 팀은 드디어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먼저 진입할까?
—저기서 올 거야, 기다려.
멜로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구침략이 달려들었다. 그 뒤에 바나나가 바짝 달라붙었다.
—광역 공포 오겠다.
“내가 밀쳐 낼게.”
—나는 서포트.
탱커와 함께 적진으로 달려드는 흑마법사는 조심해야 했다. 광역 공포에 잘못 맞으면 캐릭터가 제멋대로 뛰어다니다가 전장을 이탈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바나나가 다가오는 만큼 여름n모기와 카젤도 앞으로 달려 나갔다. 광역 공포를 쓸 수 없다고 판단한 바나나는 뒤로 후퇴했다. 상황 판단력이 좋았다.
—처음에 CC기 하나 빼면 좋았을 텐데! 까비!
—나나 누나는 너처럼 바보가 아니다, 개주야.
—쳇.
—수다 그만 떨고, 개주 넌 스노우한테 붙어.
—예압!
개인주의는 은신한 채로 상대편 뒤로 이동했다. Snow는 안전 구역인 맨 뒤쪽에 있었기에 빠르게 붙기 위함이었다.
그 상태로 드디어 두 탱커가 격돌했다.
—바나나부터 잡자.
—잉? 눈 누나가 아니고요?
—넌 힐 차단만 하고 있어. 딜러부터 차례대로 죽이고 탱커랑 힐러는 마지막에.
—니예.
주하는 가장 처음 바나나에게 도트 스킬을 걸었다. 그런데 도트가 걸리는 족족 Snow로 인해서 모두 정화되는 게 아닌가. 딜 사이클을 돌릴 수 없게 되자 주하는 빠르게 계획을 바꾸었다.
버프는 포기하고 바나나에게 곧바로 시전 스킬을 날렸다. 후방에 위치한 터라 아직 근접 딜러가 이곳까지 파고들지 못한 지금이 기회였다. 주하에게 한 대 맞은 바나나의 피는 한순간에 쑥 빠졌다. 30퍼센트가 넘게 닳자 곧바로 Snow가 힐을 시전했다.
그때, 숨어 있던 일시불이 나타나 Snow의 스킬을 차단하려 했다. 그러자 Snow는 잽싸게 시전을 끊었다. 그대로 일시불의 차단 스킬이 허무하게 빠지게 되자 다시 Snow는 유유히 힐을 시전했다.
—아놔! 눈 누나!
—뻔한 힐 페이크에 걸리냐? 쟤 장군은 어떻게 단 거야?
“시간 갈아 넣어서 단 거 같은데.”
—아니라고요!
개인주의는 억울해했지만, Snow의 힐을 끊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월차연차휴가가 개인주의가 싼 똥을 깨끗하게 치워 주었다. 적 본진으로 순간 이동해서 들어간 월차연차휴가는 화염 파동을 사용해 Snow를 넉백시켜 힐을 깔끔하게 끊었다. 그사이 주하의 공격은 다시 시작되었다.
—개주는 차단 보지 말고 그냥 바나나한테 붙어.
—힝…….
“나랑 같이 치면 금방 죽일 수 있어. 극딜해.”
—네엡!
주하가 살짝 기를 살려 주자 개인주의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Snow에게서 벗어난 개인주의가 바나나에게 달라붙었고, 주하도 바나나만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얼마 가지 않아 바나나의 피가 거의 닳았을 때였다. 순식간에 본진으로 파고든 리미티드가 바닥을 쿵 내리찍었다. 그러자 지진이 인 것처럼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전 스킬을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드는 스킬이었다.
“리밋이 타이밍 좋네.”
—괜히 사령관이겠어?
—신고 애들이랑 싸우는 것보다 더 짜릿하죠!
“어, 맞아. 훨씬 재미있네.”
같은 인원수로 비등비등하게 싸우는 건 또 다른 재미였다. 확실히 리프 길드가 자진신고 녀석들보다 피지컬이 좋아서 대결하는 맛이 있었다.
그러나 보석술사는 그 유명한 ‘광대’가 아니던가. 리미티드를 본진 외곽으로 쭉 밀어낸 주하는 공중으로 살짝 떠올랐다. 지진이 닿지 않으니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때마침 Snow가 또다시 힐을 시전하려 하자 주하는 그를 보석 체인으로 끌어왔다. Snow의 힐이 이번에도 끊기자 결국 바나나가 뒤로 후퇴했다.
[일반] Snow: #$%^#$ㅠㅉ 나 좀 그만 괴롭혀!!!
[일반] 카젤: ㅋㅋㅋㅋ 죄송여
[일반] 개인주의: ㅋㅋㅋㅋㅋ 달달하다
주하는 도망가는 바나나를 쫓아 가볍게 도트 두 개를 붙여 놓고 다시 본진으로 돌아왔다. 멀리서 피가 닳는 걸 어찌하지 못한 바나나는 가장 먼저 바닥으로 쓰러졌다.
[길드] 바나나: %^&*[email protected]#$ㄸㄲ 더러운 보술!!!
[길드] 카젤: ㄱㅅㄱㅅ ^-^
인원수가 차이 나자 결국 지구침략 팀은 멜로디 팀에게 져 버렸다. 어떻게 해서든 카젤을 방해하려 해 봤지만, 매번 실패했더니 나중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포기했다.
보석술사 랭커가 왜 다른지, 눈으로 보고 느끼긴 했지만, 몸으로 체험해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기 25강이 얼마나 아픈지도. 탱커인 지구침략이 놀랄 정도였으니 확실히 대단하긴 대단했다.
[길드] 바나나: 이 정도면 됐다! 가자! +_+
[길드] Snow: 가자! 이 더러운 기분을 저 자식들도 느껴 봐야 해!!
[길드] 카젤: ㅋㅋㅋㅋ
막판에 Snow는 주하에게 크리티컬 두 방을 맞고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죽은 데다 힐을 하지 못하도록 괴롭힘을 당했던 것까지 합쳐 Snow는 바짝 약이 올라 있었다.
카젤과 팀원들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진신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투력은 이미 Max를 찍은 상태였다.
***
리프는 유저들의 제보를 받아 자진신고 무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자진신고 길드원들은 며칠간 필드에 나오지 못한 탓에 채집은커녕 평판 작업이 크게 밀려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절반은 채집하고 나머지는 몹을 잡고 있었다.
[길드] 개인주의: 고생하네 우리 신고 아이들 ㅇㅅㅇㅋ
[길드] 바나나: 잠깐의 행복을 누리려무나
[길드] Snow: 저것들이 두 대 맞고 죽어 봐야 필드에 고개를 안 내밀지 ^^
[길드] 카젤: ㅋㅋㅋㅋ 크리였다니까요
[길드] Snow: 뭐든!! 쟤들도 꼭 그렇게 죽여 줘 카젤아...
[길드] 카젤: 네ㅋㅋ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Snow를 도닥이며 모두 보이스 채팅방에 모였다.
—다행히도 스물다섯 명이네.
—이렇게 모여서 나오는 거 아니면 앞으로 힘들걸?
—그보단 모여서 나와도 못 한다는 걸 알려 줘야지.
—오…… 그게 맞다.
—역시 대장님!
항상 상상 그 이상인 선율 형에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게 된다. 저런 인성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조금쯤은 배워도 괜찮을 것 같은데……. 세상 살아가는 데 착하기만 한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선율 형 닮고 싶다.”
—으엑? 카젤 형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형? 정신 차려요!
—순간 뇌에 급브레이크 걸림.
—카젤이가 PK만 했더니 정신이 나갔나?
팀원들은 제정신 아니라며 한탄했고, 선율 형은 뿌듯해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우리 주하가 보는 눈이 있네.
“그럼, 나 눈 높다니까?”
—카젤아…… 너 갑자기 왜 그래.
“사람은 역시 빌런이 돼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죠. 그러니 빌런 중의 빌런인 선율 형을 닮는 게 최고 아닌가요?”
—…….
이번엔 멜로디를 제외하고 모두가 미친 듯이 웃어 댔다. 역시 카젤이 보는 눈이 있다며 칭찬하고, 대장님 저격 담당도 여전하다며 즐거워했다. 주하는 조용해진 멜로디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