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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85화 (85/130)

85화

주하는 침대에 누워 허공을 응시했다. 보통 같았으면 잘 시간이라 슬슬 눈이 감기고 있을 텐데 오늘만큼은 말똥말똥했다.

—뭐 하는데 이렇게 조용해?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그제야 제가 통화 중에 멍 때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형.”

—응?

“오늘 정말 이상하지 않았어?”

—아직도 실감 안 나?

“실감 안 나지…… 24강도 아니고 25강인데.”

강화 마지막에 남았던 두 번의 기회.

설마 24강이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어이없게도 한 번에 성공했다. 그뿐인가. 선율 형의 재촉에 멍한 상태로 시도한 마지막 강화마저 성공해 버렸다. 25강 무기를 앉은자리에서 얼떨결에 만든 것이다.

한 번에 6단계를 훌쩍 뛰어넘었더니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첫 번째로 길드원들. 그들은 운빨망겜을 외치며 펑펑 울었다. 그러다 이내 한마음 한뜻이 돼서는 자신들도 강화해 달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동안은 선율 형의 압박에 넘보지 못했지만, 이번엔 눈이 반쯤 돌아가 멜로디고, 대장님이고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결국 선율 형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길드는 제가 대리 강화를 약속하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두 번째로 난리 난 건 서버 유저들. 25강 무기에 맞아 보고 싶다며 쫓아오는 유저들도 있었고, 이펙트가 궁금해서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어 버렸다.

제가 25강을 띄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원래 일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진신고는 오늘 하루 죄악의 탑과 던전에서만 살았다.

—나까지 부럽더라. 자진신고 애들 놀리려고만 했는데 25강까지 갈 줄이야. 내가 네 운을 과소평가했나?

“악탑 황금 게이트랑 비교할 수 없는 운이지.”

—그건…… 그렇지? 오늘 진짜 새로운 세상을 본 것 같아.

“나도.”

주하는 푸슬푸슬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생각해도 마법 같은 일이었으니까. 라나탈은 역시 갓겜이었다.

—근데 주하야.

“응?”

—정말 수영 안 할 거야?

꿈속을 거닐다가 한순간에 현실로 돌아와 버렸다. 주하는 옆으로 돌아누운 후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아직 포기 못 했어?”

—포기한 적 없는데. 네가 은근슬쩍 화제 돌리니까 넘어가 준 거지.

“게임 할 시간도 모자랍니다.”

운동하면 체력도 늘고 건강도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적응하기 전까지 힘들고, 운동 시간도 한두 시간으로 끝나지 않을 터. 요즘 겜생에 올인 중인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현실로 끌려오고 싶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방학 끝나면 게임 할 시간이 확 줄어들 거라 그전에 평판이나 업적 같은 노가다 콘텐츠는 다 뚫어 놔야 했다. 그래야 학교에 다니면서도 게임을 즐길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자진신고 녀석들 때문에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어떻게 꼬셔야 하지.

하지만 선율 형도 끈질기기는 매한가지였다.

—데리러 가고 데려다줄게.

“괜찮습니다.”

—밥도 사 줄게.

“그것도 괜찮습니다.”

—……고민이라도 좀 해 줄래?

차라리 개강 후에 운동 다니자고 하면 생각해 보겠지만, 지금은 무조건 게임이었다. 저도 이제는 진정한 썩은물이었으므로.

“나중에 가능할 때 말할게. 지금은 아니야.”

—그게 언젠데?

“음…… 언젠가는?”

—……그럼 운동 말고 게임 하자고 하면 나올 거야?

당연하지 않나? 게임 하자고 부르면 바로 가능하지. 당장 내일이라도 만날 수 있다고 말하려는데, 문득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과연 저런 상태의 선율 형이 진짜 게임만 할까? 운동 못 시켜서 안달 나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게임 하자고 꼬셔 놓고 수영장으로 직행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 멜로디라는 걸 잠시 잊고 경계가 풀릴 뻔했다.

“글쎄, 그것도 생각 좀 해 보고.”

—이런 데서는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네.

“내가 한 눈치 하지.”

—한 눈치? 곰돌이가 어디서 여우 탈을 쓰려고 하지? 너 눈치 없는 거 길드 애들도 다 알고 있는데.

“…….”

—주하야, 너도 양심 좀 챙겨야겠다.

“내가 요즘 누구한테 많이 배워서…….”

투덜대면서 중얼거리자 선율 형이 가볍게 웃었다.

—어쨌든, 내가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만나면 넌 무조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해.

어차피 선율 형을 만나는 건 내가 결정을 내려야만 가능했다. 그러니 저 협박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운동하겠다는 다짐을 했을 때, 그때 만나면 될 것이다.

“예에, 예에. 그러도록 하죠.”

—나중에 딴말하기 없다?

“마음대로 하세요.”

나중에 제 발목을 잡게 될, 노예 계약서를 이은 두 번째 ‘을’의 계약이 성사되었다. 주하는 그것도 모르고 심드렁히 눈만 깜박였다.

***

카젤의 무기 25강 성공을 기점으로 자진신고의 행동이 바뀌었다. 여기서 길드 포인트를 더 빼앗기게 된다면 3단계로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길드] 바나나: 저것들 이제 몰려다니네?

[길드] 개인주의: 아쒸... 3단계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

[길드] 지구침략: 잘못하다간 우리가 포인트 주게 생겼어. 쟤들 지금 20명 넘어

[길드] 월차연차휴가: 우리도 뭉쳐 다녀야 하나?

[길드] Snow: 뭉쳐야지

[길드] 장회장: 저희도 같이 갈까여?

[길드] 선생: 부족하지만 힘은 보탤 수 있음!

리프 길드는 유명세와 달리 상당히 소규모 길드였다. 개인주의와 일시불의 친구들이 다섯 명 있고, 월차연차휴가의 친구가 두 명, 그리고 바나나의 친구가 세 명 있었다. 자진신고는 서른다섯 명의 길드원이 있지만, 리프 길드는 길드원이 다 모여 봤자 스무 명이니 인원수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일반 길드원들은 PVP에 전혀 관심 없는 초식 유저들이었다.

[길드] 멜로디: PVP템 없으면 녹으니까 의미 없어

[길드] 장회장: ㅠㅠㅠ

[길드] 선생: ㅠㅠ 좀 모아 둘 걸 그랬나...

[길드] 개인주의: 내가 미리 좀 해 두라고 해찌! 도움도 안 되는 것들! ㅇㅂㅇꐦ

[길드] 장회장: ^^ㅗㅗㅗ 우리는 너처럼 썩은물 아니거든?

[길드] 선생: 김개주 주제에 감히 어디서 ㅗㅗㅗ

[길드] 개인주의: ㅋㅋㅋㅋ

[길드] 멜로디: 너넨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해

[길드] 선생: 넵 길마님

[길드] 장회장: ㅇㅅㅇ넹;

결국 소수정예로 자진신고 녀석들과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길드] 바나나: 그럼 어떻게 해?

[길드] 멜로디: 걱정 마 그 정도면 충분히 잡아

[길드] 여름n모기: 저번에 20명일 때도 비등비등했잖아

[길드] 멜로디: 어제부로 바뀌었어. 주하 때문에ㅋ

[길드] 개인주의: ㅇ.ㅇ?

[길드] 멜로디: 25강 딜러님의 무서움을 보여 줄 때가 됐지

[길드] 카젤: ㅋㅋㅋㅋㅋㅋㅋ

[길드] 개인주의: 얼마나 아프길래 그래여? -0-

[길드] 일시불: 그럼! 대결 한번 해 봐요! +_+

[길드] 월차연차휴가: 시불이랑 ㄱㄱ

[길드] 일시불: ㄱㄱㄱ

[길드] 카젤: ㅋㅋㅋㅋ 대련장 ㄱ

주하는 어제 무기 25강을 만들자마자 멜로디와 대련을 해 보았다. 결과는 15전 13승 2패. 힐만 제대로 끊을 수 있으면 대부분 초반에 승패가 갈렸다. 기존에 들어가던 대미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 방, 한 방이 강력했다.

리프 팀원들은 전원 대련장으로 이동했다. 기왕 하는 김에 5:5 팀전까지 해 보기 위해 대련장에 진입했다.

팀은 이렇게 나뉘었다.

한 팀은 여름n모기, 멜로디, 카젤, 월차연차휴가, 개인주의. 다른 한 팀은 지구침략, Snow, 일시불, 바나나, 리미티드였다.

대련장에 들어오자마자 상대편 팀들의 이름이 붉게 변해 있었다. 곧바로 공격은 가능했지만, 일시불과 카젤을 제외한 다른 팀원들은 모두 외곽으로 벗어났다. 첫 번째 대련은 카젤vs일시불이었으므로.

[길드] 멜로디: 카운트 0에 시작한다

[길드] 일시불: 넵!

[길드] 카젤: ㅇㅇ

[길드] 바나나: 내가 할래!

[길드] 개인주의: 나나 누나 ㄱㄱㄱㄱㄱ

[길드] 바나나: 간닷 귀염둥이들!

[외치기] 바나나: 3

[외치기] 바나나: 2

[외치기] 바나나: 1

[외치기] 바나나: 0!!

바나나의 외침과 함께 일시불과 카젤이 동시에 스킬을 사용했다.

주하는 멀리서 활을 쏘는 일시불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도트를 순서대로 걸었다. 궁수는 공격 속도가 빠른 터라 맞는 만큼 시전이 밀려 특히 조심해야 하는 클래스였다.

그래서 궁수를 상대할 때는 공격력이나 크리티컬을 올리는 것보단, 공격 속도를 올리는 게 좋았다.

도트가 끝나기 바로 직전, 가속 버프로 전환한 주하는 드디어 시전 스킬을 사용했다. 그때, 일시불이 카젤에게 침묵을 걸었다. 버프를 온전히 다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고, 거리를 최대한 벌려 치고 빠지며 공격했다.

[길드] 개인주의: 내가 이래서 궁수를 시러하지 ㅇㅂㅇ!

[길드] 바나나: 왜? ㅋㅋㅋ 잘하는구만

[길드] 월차연차휴가: 얄밉잖아ㅋㅋㅋㅋ 멀리서 쇽쇽! 도망가기는 또 어찌나 잘 도망가던지

[길드] Snow: ㅋㅋㅋㅋㅋ

월차연차휴가의 말대로 일시불은 얄밉게도 도망 다녔다. 최대 사거리를 이용해 대련장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카젤의 피를 찔끔찔끔 깎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일시불의 바로 앞에서 회오리가 생겨났다. 카젤의 스킬인 보텍스 문이었다. 분명히 아슬아슬하게 피했는데 아쉽게도 끝에 걸렸는지 일시불이 회오리 안으로 끌려갔다. 다급히 보석을 깨고 다시 도망가려 했는데, 보석으로 만들어진 체인이 일시불의 뒷덜미를 콱 붙들었다.

[길드] 지구침략: 보문 거리 계산한 거 봐ㅋㅋ

[길드] Snow: 역시 리프 딜러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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