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전이의 사파이어>
주하는 멜로디에게 붙어 있던 기절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자 멜로디 대신 카젤 캐릭터가 해롱거리고 있었다. 이것은 아군의 디버프를 가져오는 스킬로, PVP에서 보석술사가 힐러에게 자주 사용하곤 했다.
멜로디는 자유로워지자마자 주하에게 붙은 기절 디버프를 해제했다. 그와 동시에 물의 보호막을 둘러 살금과 천상검의 공격을 막았다.
—살금이 나한테 보내고, 천상검 유인해서 멀어지면 돼.
“어, 살금이랑 잘 놀고 있어.”
—너랑 노는 게 더 재미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자유 좀 만끽하고 와야지.”
은근슬쩍 자유를 피력하자 선율 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만 놔준다. 바람피우면 혼나.
“바람은 무슨…….”
주하는 퉁명스레 대답하고 살금을 멜로디에게 쭉 밀어 버렸다. 그러자 살금의 발아래 얼음 장판이 깔렸다. 멜로디의 이동 속도 감속 CC기였다. 살금은 카젤에게 달려가기엔 늦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곧바로 멜로디에게 덤벼들었다. 그와 동시에 멜로디의 몸에서 검붉은 오라가 피어올랐다.
주하는 살금과 멜로디가 전투에 돌입한 것을 확인하고 그곳에서 멀어졌다. 그러자 천상검이 예상했던 대로 쫓아왔다.
[일반] 천상검: 도망 못 가는 거 알면서 잘도 튀네
[일반] 카젤: 인제 존댓말 할 생각은 없나 봐?
[일반] 천상검: 존댓말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는데?
[일반] 카젤: 그렇긴 하지
주하도 동의하는 바였다. 이미 그의 민낯을 알게 됐는데 존댓말은 무슨.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 싶었을 때, 드디어 카젤의 무기가 빛나기 시작했다. 제게 돌진한 천상검에게 기절을 걸고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기절이 풀리기 전까지 각종 도트기를 걸어 두었다.
탱커라 공격 대미지가 그리 크진 않지만, 몸은 튼튼한 덕에 피가 닳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렸다.
주하는 대충 천상검의 방어력을 계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버텨 주면 오히려 고마웠다. 너무 빨리 끝나면 아쉬우니까.
기절이 풀린 천상검이 도끼를 휘두르며 카젤에게 달려왔다. 돌진 스킬은 이미 쿨타임이 걸려 있어서 두 발로 뛰어야만 했다. 그런 그의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맞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스킬을 하나씩 사용했다. 이속이 높은 보석술사에게 전사가 붙는 건 쉽지 않았다.
[일반] 천상검: 하! 인성 진짜.
[일반] 카젤: 누가 누구 인성을 지적하는 거지ㅋㅋ
[일반] 천상검: 뭐? 복수라도 하겠다고?
[일반] 카젤: 먼저 건드려 놓고 복수 운운하는 것도 웃기지 않아? 내가 얌전히 있어 줬을 때 눈치껏 엎드리고 있었어야지
[일반] 천상검: ㅈㄹ한다 처음부터 리프 길드로 옮겨 갈 생각이었으면서 피해자 코스프레 하기는
[일반] 카젤: ㅋㅋㅋㅋㅋ 내가 넌 줄 알아?
처음부터 리프 길드로 옮겨 갈 생각이었다면 자진신고에서 제 발로 빠져나왔을 것이다. 적어도 천상검은 제게 저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일반] 카젤: 나 밀어내려고 블랙체리 데려온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일반] 천상검: ㅋㅋㅋ 증거 있어?
[일반] 천상검: 진짜 끝까지 고심하다가 너랑은 레이드 못 할 것 같아서 그만두자고 한 건데?
[일반] 천상검: 오히려 매일같이 멜로디랑 다닌 네가 문제 아닐까? 어떻게 적 길드 길마랑 그럴 수가 있지? 모종의 약속이 있지 않고서는 힘들지 않나?
[일반] 카젤: 모든 콘텐츠에서 나 빼고 블랙체리 넣고 다녔으면서 덮어씌우지 마
[일반] 천상검: 네가 리프 길드랑 같이 다녀서 그런 거였는데?
[일반] 카젤: 순서 조작하지 마라
[일반] 천상검: ㅋㅋㅋ 증거 있냐?
천상검의 저 증거 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눈 뒤가 크게 부푸는 느낌이었다. 주하는 속으로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일반] 천상검: 그렇게 혼자 나갔으면 몰라. 벌꿀오소리 살살 꼬셔서 나가게 만들어 놓고 ㅈㄴ 즐거웠겠다?
[일반] 카젤: 네가 뿌린 씨앗이야. 남 탓하지 마
[일반] 천상검: ㅋㅋㅋㅋㅋㅋ 뭐래ㅋ
대화가 이어질수록 불쾌하고 찝찝함만 커져 간다. 놈의 말대로 증거가 없어서 불리한 건 사실이니까. 그날의 일들을 하나하나 영상이나 스샷으로 찍어 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분했다.
짜증이 나서 더는 천상검의 ‘ㅊ’도 보고 싶지 않았다. 빨리 자진신고 녀석들을 눈앞에서 치워 버려야만 속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주하의 손속이 거칠어졌다.
애매하게 거리를 두고 있던 천상검이 돌진으로 달라붙자마자 주하는 녀석을 뒤로 쭉 밀어 버렸다. 도트 대미지로 살살 녹이려던 계획을 변경해 다리를 묶고 캐스팅을 시전했다. 스킬 한 방 한 방에 피가 쭉쭉 닳은 천상검이 생존기를 사용했지만, 크게 의미는 없었다. 생존기가 사라질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처맞다 죽는 게 얼마나 더러운 기분인지 알려 주고 싶었다. 제가 자진신고에서 당했던 그 굴욕을 녀석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하는 어떻게 해서든 제게 달려오려는 천상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며 마지막으로 캐스팅이 가장 긴 스킬을 사용했다. 뻔히 보면서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일반] 천상검: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너
[일반] 카젤: 후회는 자진신고에 들어갔던 걸로 이미 다 했어
이런 더러운 인연은 빨리 잘라 내는 게 최고다. 리프 길드에 들어와 정상적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자신의 세상은 그제야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니까.
드디어 시전이 끝난 스킬은 천상검에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보석이 회전하며 천상검에게 닿자 큰 폭발을 일으키며 대상을 바닥에 눕혀 버렸다.
죽은 상태에선 일반 창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천상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주하는 천천히 걸어가 천상검의 시체 앞에서 멈춰 섰다. 지난 시즌에서 함께 레이드를 하고 맞췄던 무기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노려보던 그는 부러 발로 짓이기곤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주하는 먼저 살금을 잡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멜로디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걸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신기하게도 화가 가라앉았다.
주하는 짧게 웃으며 멜로디와 합류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보니까 애피타이저도 안 되는 것 같더라.
“몸도 안 풀렸어.”
—그래?
선율 형은 나긋하게 웃으며 나긋하지 못한 행동을 보여 주었다.
[월드] 멜로디: 자진신고 애들 제보받음
[월드] Cocomon: 또?
[월드] 렌지: 여기도 잡혀서 이제 안 보임 ㅋㅋ
[월드] 멜로디: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익숙하네? 악탑 앞이었던가? 다른 두 명이 더 있었던 거 같은데
[월드] Cocomon: 앗;;;
[월드] 렌지: ......
[월드] 멜로디: 하루에 한 번 제보하면 봐드림ㅋ 대신 오늘은 두 번
[월드] Cocomon: 그날... 일은... 끝난 거 아닙니까? 축의금... 드렸자나여.... 2만 골이나 줬는데???
[월드] 멜로디: 뒤끝 심한 사람이라 ^^
[월드] 렌지: ㅠㅠㅠㅠㅠㅠ
주하는 월드 창을 보며 그날을 떠올렸다. 죄악의 탑 앞에서 로미젤과 줄로디라고 놀리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저 사람들이었나 보다.
그런데 2만 골드? 제 기억이 잘못됐나 싶어 다시 떠올려 봤지만, 100골씩 뜯겨 놓고 눈물을 줄줄 흘리던 그 웃긴 모습을 잊을 리가 없었다. 정말 두당 2만 골드를 뜯었다고?
[월드] 멜로디: 강요는 아니니까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됨
[월드] Cocomon: ;;;; 자진신고 위치 제보받음... 제보해서 있으면 천 골 드림ㅠㅠ 귓말로 부탁...
[월드] 렌지: 저도 자진신고 위치 제보받음; 천 골 드리뮤ㅠㅠㅠㅠ
[월드] 스불재: 쟤들이었구낰ㅋㅋ 로미젤과 줄로디 만든 애들잌ㅋㅋㅋ
[월드] Cocomon: ㅠㅠㅠㅠㅠ슬푸니까 떠올리게 하지 마셈
[월드] 렌지: 우리만 죽을 순 없지.... 내일의집님 밀가루님^^ 지금 여기 있는 거 다 안다ㅋ 당장 튀어나오지 못할까!
[월드] 밀가루: ......자진신고 위치 제보받아요 ㅠㅠㅠㅠ
[월드] 내일의집: ;;; 자진신고 위치 제보받음ㅠㅠㅠ
결국 끌려 나온 두 사람도 자진신고를 찾는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주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축의금 2만 골?”
—아…….
단발성 신음이 스피커 너머로 들렸다.
“나한테 절반 준다고 해 놓고 200골 주지 않았나?”
—그게, 나중에 더 줬는데……. 기억 안 나?
“설마 내기 승리했을 때 더 얹어 줬던 19,800골드?”
—으응, 그거.
“두당 2만 골드라며? 그럼 축의금으로 받은 건 8만 골드 아닌가?”
—한 명한테만 2만 골드 받았어. 다른 애들은 만 골씩.
“그럼 총 5만 골드?”
—…….
“계산법이 좀 이상하다. 그렇지? 그거 절반씩 나누면 25,000골드일 텐데 5천 골드는 어디로 증발해 버렸을까…….”
남은 금액은 축의금 받아 낸 수수료쯤 되는 걸까? 양심도 수수료를 뜯어내고 돌아온 거라니.
말없이 멜로디 캐릭터를 응시하고 있는데, 거래가 들어왔다.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 일단 수락했다. 목록 창에는 골드가 올라왔는데, 죗값을 감안한 건지 5천 골드가 아닌 3만 골드였다.
주하는 거침없이 수락을 눌렀다. 가방에 돈이 들어오는 소리가 무척이나 경쾌하다.
“저 사람들한테 돌려줄 테니까, 또 삥뜯지 마.”
—……응.
“괴롭히지도 말고.”
—……음.
“그건 싫어?”
—그래도 정당방위였는데.
“누가 조금 놀렸다고 돈을 그렇게 뜯어?”
—내가?
당당한 모습의 선율 형을 말없이 응시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가능한 건 역시 ‘멜로디’이기 때문이겠지? 제 차게 식은 반응을 느꼈는지 선율 형은 조용히 항복을 선언했다.
—미안.
주하에게 한차례 혼난 멜로디는 월드 창에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