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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76화 (76/130)

76화

다른 캐릭의 공격력을 가져와서 히든 특성이 붙은 PVP29) 전용 스킬을 사용한다라. 거기다 힐까지 가능하고? 멜로디 캐릭터는 힐러의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 캐릭터였다.

‘그래서 필드나 던전에서는 딜러가 필요한 거구나…… 아?’

고개를 끄덕이던 주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딜 스킬 중 세 개가 PVP 전용으로 바뀌었다고 했는데, 그럼 남은 한 개는?

그러고 보니 확장팩 초반, 힐러인 정령술사로 보석술사인 자신을 쫓아왔던 사람이 선율 형 아니던가? 다른 딜러들도 그렇게까지 오지는 못했는데?

“선율 형.”

—응?

“그럼 남은 스킬은?”

—…….

“…….”

—왜? 뭘 숨기는 거냐, 주선율?

눈치 빠른 바나나가 미묘한 분위기를 잡아채고 쏙 끼어들었다. 그러곤 멜로디 대신 술술 불기 시작했다.

—저 자식 남은 스킬도 사기야. 솔플용 옷으로 갈아입으면 딜러만큼 들어갈걸? 던전에서는 못 쓰지만, 필드에서는 거의 깡패야, 깡패.

그러시구나……. 그러면서 여태껏 내 뒤에 숨어서 응원 봉만 흔드셨겠다?

주하는 그동안 필드에서 멜로디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몹을 잡는 게 늦어서 결국 제가 다 잡아 준다든지, 일부러 몰이해 오곤 잡아 달라고 떼쓰기도 했다. 힐러니까 지켜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저번처럼 쳐다보기만 하면 던전에서 힐 안 준다고 협박까지 하지 않았던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딜하기 귀찮아서 너 다 시킨 거 같던데, 이건 몰랐어?

“……본인이 연약한 힐러라고 하던데요.”

—그게 무슨 신박한 개소리래?

“그러게요. 저도 이제야 알았네요.”

허탈하게 중얼거리자 다들 깔깔대며 웃었다. 그 사이에 선율 형도 같이 웃는 게 들렸다. 약이 바짝 올랐다.

“선율 형, 변명이라도 해 보지?”

—음, 변명이라기보다는. 어차피 네가 내 딜 노옌데 내가 딜할 필요는 없잖아. 저번에도 말했는데.

“……언제?”

—기억 안 나? 처음 악탑 돌 때 업적 하면서 채집하던 날. 딜러가 있는데 굳이 내가 혼자 할 이유가 없다고.

“그때…… 연약한 힐러 버리고 혼자 하느냐고 뭐라 그랬잖아.”

—힐러는 원래 연약한 법이야. 보호해 줘야 한다고.

—야, 주선율. 너 우리 없으면 그렇게 여우짓 하고 다니냐?

—그럴 리가? 애인한테만 연약하게 보이고 싶을 뿐이지.

—……또라이인가?

—딜 노예라고 하더니 금세 애인으로 바뀌네.

외계인 형이 웃으며 지적하자 선율 형이 수긍했다.

—음, 그러네. 딜 노예 말고 애인으로 통일할까?

“……그냥 딜 노예 하자.”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서자 선율 형이 재밌다는 듯이 웃어댔다.

당혹스러움에 입가를 문지르던 주하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뭔가 많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카젤아, 저 자식한테 코 꿰이면 안 돼.

“저도…… 그러고 싶네요.”

—넌 남의 연애사에 관심 끄지?

—아오! 네 목소리로 그러면 진짜 같잖아! 우리 카젤이 불쌍하다. 그만해!

—네가 엮어 준 커플이야, 버텨.

—하!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을 본 주하는 왠지 부끄러워져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나 누나, 그냥 거기서 멈춰 주세요. 지금 누나가 더 절 불쌍하게 만들고 있다고요.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을 꿀꺽 삼켜야 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 안 일어나네?

정신없는 와중에 지구침략이 죽어 있는 자진신고 길드원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쯤이면 이미 영혼으로 다 도착해 있을 시간인데 아무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하도 그제야 제 발아래 있는 블랙체리의 시체를 보았다.

—어떻게 일어나요. 방금 우리한테 찌발렸는데. 눈앞이 캄캄할걸요? 후후후.

—괜히 우리 대장이 악귀가 아니라니까. 온몸이 검붉게 변하면 아무도 못 말리지, 암.

—다들 이쪽으로 나와. 쟤들 부활하게.

—넵! 우리는 매너 유저니까 시체 지키는 짓은 안 하죠!

—그보다 재정비한 상태에서 다시 발라 버리는 게 더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역시 시불이! 내 마음을 잘 알아!

멜로디의 지시로 팀원들은 뒤로 쭉 빠졌다. 그러자 얼마 후 자진신고 녀석들이 단체로 부활하고는 반대쪽으로 멀어졌다. 다시 전투를 준비하려는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처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주하가 상황을 묻자 개인주의와 일시불은 그때를 떠올리며 울분을 토했다.

—아니, 저랑 시불이가 평판 작업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천상검이랑 살금이 나타나더라고요. 저희가 먼저 자리 잡았으니까 쟤들이 다른 곳으로 갈 줄 알고 무시하고 몹 잡고 있는데, 갑자기 우르르 몰려오더니 뒤치기를 하는 거예요!

—여태 마주쳐도 무시하던 놈들이 갑자기 그러니까 어이가 없어서 무슨 짓이냐고 물었는데 비웃기만 하더라고요. 짜증 나서 한 놈이라도 잡아 보려고 했는데 저쪽에 힐러가 있어서 잡지도 못하고 결국 맞아 죽었어요.

“갑자기 나타나서 죽였다고?”

—네. 계속 쫓아와서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결국 시체까지 지키던데요.

“조용히 평판 작업하고 있었는데, 먼저 찾아와서 뒤치기를 했다?”

연달아서 같은 질문을 하는 주하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정말 그들이 먼저 공격했냐며 마지막으로 확인하려는 듯 물었다.

그동안 차분한 목소리만 들었던 이들에게는 주하의 변화가 꽤 크게 다가왔다.

—어…… 그, 렇죠?

“물어도 대답도 안 하고 비웃기만 했다고 했지.”

—네에.

개인주의는 얌전히 대답하며 주하의 눈치를 보았다.

그 후로 한참 침묵하던 주하는 픽 웃고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놔두려고 했더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네.”

[공격대] 개인주의: ;;; 호달달...

[공격대] 일시불: ;;;;;;;;; 카젤 형님이 흑화해따;

주하는 저 멀리 자진신고가 있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저만 건드렸으면 모르겠는데, 제 주변 사람들까지 건드린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동안 바보처럼 녀석들에게 당했어도 그건 저 혼자만의 일이니까 혼자서 삭이는 게 가능했다. 그들이 이뤄 놓은 세계에서 튀었던 게 잘못이라며 자신을 깎아내리기까지 했다. 그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자진신고 녀석들은 끝까지 비겁하게 나왔다.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 화풀이를 리프 길드에게 한 것이다.

원래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겠다, 거기다 쫓아냈던 제가 이곳에 들어간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조용히 게임을 접길 바랐을 텐데 말이다.

“…….”

어째서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더 고통받아야 하는 거지? 그렇게 당했어도 피해자는 묻어 두려고 하는데.

선율 형이 접게 만들어 준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막내들이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을. 괜히 잊겠다고, 모르는 사이로 지내겠다고 그를 말린 것이 후회되었다. 제가 아무리 참는다고 해도 상대방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생각이 너무 짧았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정리하는 게 좋겠지. 그래야만 우리 팀원들이 더는 피해를 보지 않을 테니까.

악연을 끊어버리기로 다짐하던 그때였다.

—우리 카젤이가 드디어 마음 잡았나?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지.

—순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네.

바나나와 지구침략, 그리고 여름n모기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며 주하는 의문을 표했다.

“……네?”

주하는 그들이 하는 말이 단순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마치 제가 자진신고를 어떻게 나왔는지, 그 안에서 무슨 짓을 당했는지 다 아는 것처럼.

“……다 알고 계셨어요?”

—리밋이가 확장팩 나오기 전에 지인한테 들었대. 너 빼고 블랙체리가 팀원으로 들어간다고. 그래서 멜로디랑 외계인한테는 말한 거 같은데, 우리는 너 길드 나오고 나서 알게 됐어.

“리밋이가요?”

선율 형이 제 일을 알게 된 경위가 궁금하긴 했는데, 자진신고와 엮인 일에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은 묻어 두었다. 그런데 이렇게 알게 될 줄이야.

—응, 걔 지인이 블랙체리랑 아는 사이인가 봐. 전섭 2위 공대에 간다고 엄청나게 자랑했다고 하더라고. 근데 그 사람은 리밋이랑 알고 지내잖아? 고작 2위로 자랑하니까 어이가 없었는지 리밋이한테 말했대.

“……그렇구나.”

—미안해, 카젤아. 네가 불편해할까 봐 말 안 하고 있었어.

바나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카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살짝 눈치를 보고 있는데, 담담한 음성이 들렸다.

“괜찮아요. 오히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죠. 그리고 제가 똥 밟은 건 맞는데요, 뭐.”

—그렇지! 똥도 보통 똥도 아니고 설…….

—아! 나나야, 거기까지 하자.

Snow가 다급히 말리자 바나나가 멋쩍게 웃었다. 제가 생각해도 살짝 무리한 감이 있었다.

그보다 카젤의 대답을 듣고 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제 걱정은 기우였던 모양이다. 하긴, 자진신고 녀석들한테 그렇게 당하면서도 꿋꿋하지 않았던가. 기죽지 않는 모습이 무척 대견했다. 멜로디의 사람 보는 눈은 역시 믿을 만했다.

—아, 근데 있는 자리 빼서 널 데려온 건 아니었어. 우리도 사람 구하고 있었거든.

“선율 형한테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때 우리 딜러 한 명이 게임 접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 언제였지? 확장팩 나오기 이틀 전인가? 멜로디가 뜬금없이 개주한테 너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었어.

“저를요?”

—응, 개주가 마당발이라 서버에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거든. 그때 개주가 “평판 좋아요. 우리랑 말다툼할 때도 안 나타난 거 보면 개념 있는 분인 거 같은데요?”라고 했어.

—앗! 누나. 그렇게 말하면 제가 평가한 것 같잖아요! 으악! 카젤 형 그거 아니에요! 괜찮은 사람 같다고 했단 말이야!

—그게 그거지.

—전혀 다르잖아요!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주하는 멜로디를 응시했다. 개인주의의 말을 듣고 나니 왜 선율 형이 저를 주웠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딜줍 당해 버렸네.”

주하의 중얼거림을 들은 멜로디가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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