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일반 던전에 갈 때 저는 분명 자리 비움 상태였다. 그걸 알면서도 천상검은 굳이 제 존재를 찾는 척했다. 그다음부터는 벌꿀오소리가 없을 때만 노려서 저를 고립시켰다. 영웅 던전과 죄악의 탑 팀원을 정할 때도, 길드에서 내쫓을 때도.
“일부러 그랬구나.”
벌꿀오소리가 반대할 게 뻔하니 그가 없을 때 정리한 것이다.
정말로, 진짜로, 블랙체리가 자진신고에 들어갔던 게 계획된 일이었구나. 멜로디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시금 깨닫게 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진짜 왜 나 없을 때만 그랬지? 하... 짜증 나. 저번부터 좀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팀원을 이렇게 막 바꿀 줄이야. 거기다 다 들통날 거짓말은 왜 하지?
[귓속말] 카젤: 개인보단 다수의 말이 더 신빙성 있을 테니까요
[귓속말] 벌꿀오소리: 내가 누구 말을 더 믿을 줄 알고?
[귓속말] 카젤: 벌꿀님이 그쪽 사람들이랑 잘 지내서 저보다 더 친하다고 생각했나 보죠
[귓속말] 벌꿀오소리: ㅋㅋㅋㅋㅋㅋ 장난하나
[귓속말] 카젤: 어쨌든... 이미 이렇게 된 거 더는 신경 쓰지 않을 거임ㅋ 다행히 레이드 팀도 구했고 길드도 들어왔거든요
벌꿀오소리는 뒤늦게 제 아이디를 검색했던지 바뀐 길드를 확인하곤 소리쳤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미친! 리프 길드라고???
[귓속말] 카젤: ㅇㅇ;
[귓속말] 벌꿀오소리: 이게 바로 똥차 가고 벤츠 온다는 그건가???
[귓속말] 카젤: ;;;;; 저한테는 그렇긴 한데;; 벌꿀님이 속한 팀을 똥차라고 하면;;
[귓속말] 벌꿀오소리: 누가 속한 팀? ㅋㅋㅋㅋ 나???? 지금 나보고 이 똥차 같은 팀에 계속 있으라는 거임?
[귓속말] 카젤: 어? 벌꿀님 설마 공대 나오려고요?
[귓속말] 벌꿀오소리: 뭐 이쁘다고 남아 있어요? 사람 하나 ㅈ되게 만드는 팀인데. 거기다 천상검이 시도 때도 없이 작업 걸어서 슬슬 짜증 났음 -_-
[귓속말] 카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더니;
[귓속말] 벌꿀오소리: 내가 왜 여태 남아 있었는데! 카젤님 아니면 여기 답도 없음. 레이드 공략도 님만큼 꼼꼼하게 보는 사람이 없어! 솔직히 다른 팀에서 오라고 연락 많이 받았는데 님 때문에 다 거절함!
[귓속말] 카젤: ;;; 왜 말 안 했어요?
[귓속말] 벌꿀오소리: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ꐦ
[귓속말] 카젤: ......
[귓속말] 벌꿀오소리: 빨리 여길 탈출해야겠음. 이런 팀에 남아 있기 싫어 -“-
[귓속말] 카젤: 레이드는... 어쩌려고요? 벌꿀님도 레이드 때문에 자진신고 들어갔던 거잖아요
[귓속말] 벌꿀오소리: ㅋ 요즘도 계속 연락해 오는 곳 있으니까 걱정 마요ㅋ 마법사가 1티어 중에도 원탑인 거 알죠? 보석술사랑 비교하면 가슴 아프니까 그러지 마셈
[귓속말] 카젤: --
[귓속말] 벌꿀오소리: 어찌 됐든 요즘 계속 멜로디랑 같이 다닌다 싶더니 다행이네. 사람이 순해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거 보기 안타까웠는데
[귓속말] 카젤: 뭐가 순함;
[귓속말] 벌꿀오소리: 천상검이 억지 부리는 거 다 오케이했잖아요. 던전 일도 그렇고 악탑도 그렇고 길드 나간 것까지. 안 봐도 훤해 어떤 상황이었을지는
그동안 벌꿀오소리가 저 때문에 고민했다고 하니 주하는 민망해졌다. 그저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이 없었을 뿐인데 순하게 보였을 줄이야.
멜로디도 ‘구른다’라는 표현을 했던 것처럼, 벌꿀오소리도 비슷하게 느꼈던 걸까? 이래저래 가까운 사람들한테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더 미안해졌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그러니까 리프 공대 가서 제대로 눌러 주셈. 여기서 있던 일들은 다 잊고
[귓속말] 카젤: 미안해요 벌꿀님...
[귓속말] 벌꿀오소리: 님이 미안할 일 없다니까? 둘 다 공대 나가면 자진신고는 다시 2위까지 못 올라옴ㅋㅋㅋ 내가 팀 옮기고 님 쫓아갈 테니까 바짝 긴장이나 해요ㅋ
[귓속말] 카젤: 그래요ㅋㅋ
[귓속말] 벌꿀오소리: 이ㅅㄲ들이 누구 덕분에 2위 했는지 뼈저리게 느껴봐야 정신 차리지. 전 이만 천상검이랑 한판 하러 갈 테니까 카젤님도 볼일 봐요. 나중에 연락하겠음
[귓속말] 카젤: ㅇㅇ
벌꿀오소리와 쌓여 있던 것을 풀었더니 이젠 완전히 자진신고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다. 거기다 그녀도 팀을 나온다고 하니 살짝 통쾌하기도 했고.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벌꿀오소리가 많이 참고 있었던 것 같다.
조금은 긴장했던지 굳어 있던 몸을 풀며 의자에 푹 기댔다. 왠지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다. 정말 게임 하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네.
한숨을 크게 쉬며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PC방에서 자리를 이동한다던 멜로디가 나타났다.
[귓속말] 멜로디: 뭐 해?
[귓속말] 카젤: 그냥 있어
[귓속말] 멜로디: 자진신고에서 귓말은 안 왔지?
[귓속말] 카젤: 벌꿀님한테 귓말 왔었는데... 그분도 길드 나가신다고 하더라
[귓속말] 멜로디: 현명한 사람이네
[귓속말] 카젤: ㅇㅇ 나랑 친한 분임
[귓속말] 멜로디: 친하다고?
[귓속말] 카젤: 왜?
[귓속말] 멜로디: 얼마나 친한데? 나보다 더 친해?
[귓속말] 카젤: ...뭔 소리 하는 거야 --;;
[귓속말] 멜로디: 당연히 나랑 더 친하지?
요즘 애들도 안 할 것 같은 유치한 질문에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은 좋았다. 그가 직접적으로 자신과 친한 사이라고 인정했으니까.
있는지도 몰랐던 작은 벽이 한순간에 허물어진 기분이었다.
주하는 슬그머니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사리물었다. 더듬더듬 입가를 문지르자 움찔거리는 입꼬리가 느껴졌다.
[귓속말] 카젤: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일퀘나 하러 가자
[귓속말] 멜로디: 또 도망가네?
[귓속말] 카젤: 도망가는 게 아니라 엉뚱한 소리를 하니까 그러지
[귓속말] 멜로디: 그래? ㅋㅋㅋㅋ
이러다 또 말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빠르게 파티 초대를 날렸다. 일일 퀘스트라도 하러 가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
[파티] 멜로디: 초대받는 건 처음이네.
그러고 보니 먼저 초대하는 건 처음이구나. 매번 그에게 오는 초대를 받기만 했는데, 오랜만에 파티장이 되니 느낌이 새로웠다.
[파티] 멜로디: 그런데 오늘 보챗은 안 해?
[파티] 카젤: 이대로 걍 하자
[파티] 멜로디: 12시쯤에 영던 갈 건데 미리 접하지 왜?
[파티] 카젤: 영던 간다고? 약속했던 시간 지나지 않았어?
[파티] 멜로디: 미뤘어. 어차피 할 거 많으니까 순서 바꾸는 거야 상관없지
주하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말없이 잠수 타고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 팀원들에게 사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그는 다급하게 길드 대화창에 글을 올렸다.
[길드] 카젤: 저... 오늘 영던 약속 시간에 못 와서 죄송합니다
[길드] 개인주의: 오옹! 괜찮아여!
[길드] 바나나: ㅇㅇ 뭘 그런 걸 가지고ㅋㅋ
[길드] 월차연차휴가: 길드 가입했으니까 봐드림ㅋ
[길드] Snow: 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카젤: ㅠㅠㅠ
[길드] 일시불: 난 봐줄 수 없다!!! 형님!! 제가 벼르고 있었어여! 이날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길드] 여름n모기: 뭘 벼르고 있었대;;
[길드] 일시불: 나이는 아직 말 못 한다고 해도! 적!어!도! 저랑 개주하고는 말 놔야지 않습니까? 대장님하고만 말 놓고 ㅠㅠㅠㅠㅠ
[길드] 바나나: 야ㅋㅋㅋㅋ 뭘 적어도야!
[길드] 개인주의: 마따마따!!! 실은 나도 봐줄 수 없어요!! 우리가 계속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요?! 설마 우리보다 어린 건 아니겠죠?! (ง ͠° ͟ʖ ͡°)ง
[길드] Snow: 아 그럼 꿀잼인데ㅋㅋㅋ
[길드] 월차연차휴가: ㅋㅋㅋ 사실이면 여태 동생한테 형님이라고 부르게 되는 거네? 좋은데?ㅋㅋㅋ
[길드] Snow: 카젤님 제발 쟤들보다 어리다고 해 주세요ㅋㅋㅋㅋㅋㅋ
주하는 나이 이야기에 움찔 몸을 굳혔다. 멜로디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스물여섯이라고 했던가? 개인주의나 일시불보다 우선으로 멜로디와의 호칭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길드] 카젤: 일단;; 계속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길드] 일시불: 휴......
[길드] 개인주의: 다행이다......
[길드] 바나나: ㄲㅂ
[길드] Snow: 아쉽네ㅋㅋㅋ
[길드] 개인주의: 그럼 말 놓는 건요? +_+
[길드] 일시불: +_+
[길드] 카젤: 잠시만요;
길드 채팅창을 파티 창으로 변경한 주하는 다짐과 다르게 머뭇거렸다. 멜로디에게 말해야 하는데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을 알고 나면 여태 맞먹고 있던 제가 얼마나 괘씸해 보일까 싶기도 하고. 어떤 반응이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어서 고민이 되기도 했다. 그간 제가 했던 말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니 민망해 죽겠다.
그래도 계속 외면할 수는 없었다. 주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파티] 카젤: 이렇게 될 줄 몰라서....
[파티] 멜로디: ㅇㅇ?
[파티] 카젤: 아니;;; 변명부터 하는 건 아닌데;
[파티] 멜로디: 갑자기 왜 그래?
[파티] 카젤: 그게...
[파티] 멜로디: ㅋㅋ 왜? 나이 때문에 그래?
[파티] 카젤: ㅇㅇ;;; 나이 들었어요; 26이시라고;;
[파티] 멜로디: 넌 몇인데?
[파티] 카젤: ......22
[파티] 멜로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불안하게 왜 저리 길게 웃는 걸까. 그도 지금까지 했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을까? 민망해서 얼굴에 열이 몰렸다. 뜨끈뜨끈한 볼을 손등으로 식히며 연달아 한숨만 쉬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