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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61화 (61/130)

61화

핸드폰을 든 주하의 오른손이 툭 떨어졌다. 작은 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숨을 고르듯 쏟아 낸 한숨과 함께, 멜로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이 무슨 일 생기면 말해 달라고 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정작 본인은 꼭꼭 숨기기만 하고.

“그건…….”

—결국 이렇게 돼서 좋으면서도 화가 나. 화가 나는데 좋아. 어쩌지?

한기가 느껴졌던 목소리는 어느새 봄볕처럼 따스해졌다. 여리디여린 새싹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태양처럼.

그 안에는 초조함과 기쁨, 분노와 희열이 함께했다. 그 모순을 보면 볼수록 불쾌하게 남아 있던 찌꺼기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걱정했어, 라는 한마디 말보다 더 강렬하게 와닿았다.

—내가 그 새끼들 다 접게 해 줄 테니까. 나한테 와라, 주하야. 나랑 우리 애들이 기다리고 있어.

“…….”

—설마, 너 없으면 안 되게 만들어 놓고 버리는 건 아니지?

“내가 언제, 그렇게 만들었어?”

—그럴 거였으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지. 널 알게 했으면 안 됐고, 처음부터 날 밀어냈어야 했어. 그러지 못했으니까 무조건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억지 부린다는 자각은 있지?”

—모르겠는데.

주하는 허탈하게 웃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게임 이야기인 걸 알고 있는데 자꾸만 다른 쪽으로 상상하게 된다. 애인이니, 연애니. 장난처럼 했던 말들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몰려왔다.

심각한 와중에도 이런 생각이나 한다니. 주하는 고개를 저으며 털어 버리려 애썼다.

—나랑 놀자, 주하야. 같이 레이드 하자.

“…….”

—퍼클 하면 어떤 기분일지 알고 싶지 않아? 응?

하지만 계속해서 치대는 멜로디 덕분에 털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웃어 버렸다. 반강제적으로 죽어 있던 게임에 대한 열정이 슬그머니 부피를 키워 가고 있었다.

—고민 그만하고 내 손 잡아.

“생각 좀 해 보고.”

—안 돼. 빨리 나랑 하겠다고 말해.

“……왜 그렇게 어린애처럼 굴어.”

—그러니까 빨리 수락해. 나랑 계속 함께할 거라고, 같이 퍼클 하겠다고 말해.

“방금 중간에 뭔가 하나 추가됐다?”

—대답 안 하면 하나씩 더 늘어날 거야.

조금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닦달하는 멜로디가 왜인지 귀여워 보였다. 그동안 보여 왔던 모습은 제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적인 모습이다.

순간 멜로디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끝이 간질거려서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펴게 된다. 진정하려고 한숨을 쉬는데 그 잠깐도 참지 못하겠는지 멜로디가 끊임없이 몰아붙였다.

—너 안 오면 우리 공대 레이드 못 해. 1위 공대가 한순간에 추락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와. 응? 내가 이렇게 기다리는데 안 올 거야?

주하는 아득한 기분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수락한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그래.”

생각해 보면 제가 정말 접어 버리는 순간 멜로디는 버림받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저와 진행도를 맞추겠다고 기다렸던 시간도 있고, 게임에 접속해서 끌 때까지 서로를 찾아 댔으니 누군가의 부재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만약 멜로디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저도 그를 찾을 것 같았다.

주하는 쑥스럽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얼떨결이지만, 멜로디가 있는 리프 공대에 들어가게 된다니.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생겨 버렸다. 제가 팀에 합류했는데 1위를 빼앗긴다면 고개를 들지 못할 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확실히 해야 할 게 있었다. 주하는 자진신고 사람들을 떠올리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자진신고 사람들은 건드리지 마.”

—왜?

멜로디가 의아해하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제게도 잘못이 있다는 걸 인정한 만큼, 자진신고 사람들의 잘못도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지워 버리고 싶은 일들을 또다시 마주할 필요는 없었다.

“이젠 모르는 사람들이야. 나한테서 떨어져 나갔으니까 신경 쓰고 싶지 않아.”

—그대로 놔두면 계속 보일 텐데? 그럼 더 신경 쓰이지 않겠어?

“한동안은 그러겠지. 하지만 금방 잊을 거야. 의미 없는 사람들을 기억할 이유는 없으니까.”

—…….

“게다가 무슨 수로 그 사람들을 접게 만들어? 게임 하겠다는 의지는 남이 아닌 스스로가 갖는 건데. 물론 방법이 아예 없진 않겠지. 하지만 있다고 해도 거기에 신경 쓰느니 차라리 ‘오늘부터 아이돌!’을 하는 게 낫겠어. 그 사람들한테 투자할 시간이 아까우니까 너도 그냥 치워 버려.”

—진심이야?

“진심이야.”

—내가 그 녀석들 아예 안 보이게 해 줄 수 있다고 해도? 어려운 게 아니라고 해도?

“그럴 시간에 차라리 나랑 게임 해. 아니면 내가 딴마음 먹을지도 몰라.”

—……협박이 능숙하시네요.

“누구한테 많이 배웠지.”

—너 때문에…… 내가, 미치겠다.

그제야 멜로디가 웃음을 터트렸다. 왠지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그럼 지금 게임 접속해. 길드 가입하고 일퀘부터 하자. 나 기다리느라 오늘치 안 했을 거 아냐.

“아, 근데 나 집에 에어컨 고장 났어. PC방 가서 접해야 할 것 같은데.”

—PC방 간다고?

“응. 씻고 나가면 한 30분은 걸릴 거야.”

—흐음, 그래? 그럼 기다릴게. 빨리 와.

“그래, 알았어.”

—진짜 빨리 와야 해.

계속해서 빨리 오라며 당부하는 멜로디를 겨우 진정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는데 무거웠던 몸은 어느새 가벼워져 있었다.

가끔은 너무 멜로디에게 받기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땐 받고, 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땐 주는 사이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날’ 이후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멜로디나 리프 길드원과 함께하다 보니 또다시 욕심이 났다. 어쩌면 친목을 쌓는다고 해도 배신당하지 않을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믿음이 생겨 버렸다.

주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가볍게 웃었다.

밤은 깊어져 갔지만,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해서 마치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마음가짐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으며 샤워기에 몸을 맡겼다.

다시 돌아온 PC방.

10시 정각에 도착했더니 학생들이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 주하는 힐끔대며 쳐다보는 학생들을 피해 안쪽으로 들어가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게임에 접속하자 캐릭터 선택 창이 나타났다. 카젤과 부캐, 창고용 캐릭터가 나란히 자리해 있는 것을 쳐다보던 그는 무언가 다짐하듯 단단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진신고 길드는 이제 저와는 상관없는 곳이다. 길드도, 공대도, 사람들도. 서로 불쾌감을 한 번씩 주고받았다 치면 더는 신경 쓸 필요 없겠지.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알은척하지 말라고 했던가? 저야말로 그들이 제게 관심 두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이다.

주춤대는 기색 없이 주하는 카젤 캐릭터로 게임에 접속했다. 로딩 게이지가 쭉쭉 차오르며 마지막에 다다르자 드디어 화면이 바뀌었다.

대도시의 광장 외곽. 게임을 종료했던 그 자리에서 다시 나타난 카젤은 유저들이 갑자기 우르르 몰려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반] 개인주의: 카젤 혀어어엉!!!!

[일반] 일시불: 카젤 형님!! ;ㅅ;

[일반] 바나나: 카젤님!!!!

[일반] Snow: 왔다왔다왔다!

[일반] 월차연차휴가: 누가 여기라고 했냐! 옆이잖아! 카젤님이 접속했을 때 우리가 딱 둘러싸고 있었어야 했는데!!

[일반] 여름n모기: 비슷한 자리긴 하니까 대충 넘겨;;;

[일반] 지구침략: 카젤님 어서 와요 ㅎㅎ

[일반] 리미티드: 어서 오세요

리프 길드원들이 단체로 여기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에 주하는 어리둥절했다.

[일반] 카젤: 왜 다 여기 계세요?

[일반] 개인주의: 왜긴요!!! 대장님한테 소식 듣고 레드카펫 깔러 왔죠! ㅇㅅㅇ//

[일반] 바나나: 드디어 완전체가 되었어!!! +_+

[일반] 카젤: ;;;;;

정말 이렇게 환영해 준다고? 멜로디의 말을 듣고 다시 마음을 잡았긴 했지만, 리프 길드에 제가 끼어들어도 될지 마음 한구석에서는 의구심이 자리했다. 제가 아니라도 리프 공대가 공개 구인했으면 랭커들이 몰려들었을 테니까.

아직도 믿기지 않아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알림창이 떠올랐다.

<멜로디 님이 리프 길드에 초대했습니다. 가입하시겠습니까? 예/아니요>

그 순간 주하의 시선이 화면 속에 있는 카젤에게 향했다. 수락을 누른다면 닉네임 아래에 <리프>가 붙을 것이다. 주변에 서 있는 개인주의나 다른 사람들처럼.

예전에 잠깐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리프 길드에 들어가 함께 어울리고 레이드도 같이 다니는 것을. 정말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상상이 현실이 되어 제 눈앞에 나타났다. 심장이 콩닥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수락도, 거절도 누르지 않은 채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멜로디가 귓속말을 걸었다.

[귓속말] 멜로디: 수락 안 하고 뭐 해? 감상 중이야?

[귓속말] 카젤: 그냥

[귓속말] 멜로디: 그냥?

[귓속말] 카젤: 기분이 이상해서

[귓속말] 멜로디: ㅋㅋ 이상한 게 아니라 좋다고 해야지

[귓속말] 카젤: 그런가?

[귓속말] 멜로디: ㅇㅇ 빨리 받아. 다들 나한테 왜 초대 안 하냐고 닦달하잖아. 네가 안 받는 건데

[귓속말] 카젤: ㅋㅋㅋ

그제야 주하는 수락을 눌렀다. 리프 길드에 가입했다는 알림과 함께 길드 채팅창이 무섭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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