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딜러 줍는 힐러-60화 (60/130)

60화

잔뜩 화가 나 있던 리프 길드원들은 이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길마이자 공대장인 멜로디가 나선다면 자진신고는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지금껏 멜로디를 도발하고 이 판에 남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요즘은 얌전히 지내고 있었는데, 자진신고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으니 곧 피바람이 불어닥칠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며 리프 길드원들은 연락이 오길 기다렸다.

카젤이 길드에 가입하고 레이드 팀에 합류하는 그 날을.

***

해가 진 어스레한 밤. 남아 있던 태양 빛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희미해졌다.

잠에서 깨어난 주하는 어둑한 방 안에서 고요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얕게 들썩이는 흉곽이 아니라면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그러다 드디어 느릿하게 눈꺼풀이 감겼다가 떠졌다.

“…….”

꿈조차 꾸지 않고 푹 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몸은 천근만근이다. 더위에 땀을 흘렸기 때문일까. 눅눅한 여름 날씨를 탓하며 주하는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잔뜩 고여 있던 숨을 한 번에 뱉어 내며 고개를 돌리자 시계가 보였다. 시간은 8시를 넘어서 9시로 향하고 있었다.

보통 이 시간엔 리프 길드원들과 함께 던전을 돌았다. 왁자지껄하게 대화하며 부족한 아이템과 강화 재료를 모으곤 했는데 지금은 조용하기만 했다. 사실 오늘도 던전행이 약속되어 있었다. 제가 말없이 불참한 것일 뿐.

미안하지만, 더 미안하게도 게임에 접속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블랙체리가 길드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암시는 계속 있었다. 불쾌한 흐름을 느꼈었는데, 제대로 살피려 하지 않은 제가 바보였을 뿐이다.

쏟아지던 비난을 들었을 당시에는 어안이 벙벙했는데, 이렇게 한숨 자고 일어나니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솔직히 천상검과 자진신고 사람들 탓을 할 수 있겠지만, 저도 그다지 잘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제 행동이 그들에게 불쾌감을 주었던 거니까.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에서 잘 지내고 있었고, 저는 그곳의 물을 흐린 미꾸라지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퍼클이니 뭐니 이젠 의미가 없구나. 요즘 같은 시기에 괜찮은 팀을 구하기 어렵기도 하고, 있다고 해도 자진신고 같은 곳에 또 걸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이렇게 되니 레이드에 대한 욕심이 사라졌다. 굳이 힘들여서 평판작을 할 필요도 없고, 아이템을 강화할 필요도 없고, 죄악의 탑을 돌 필요도 없고, 내실을 채우기 위한 업적도 할 필요 없었다.

예전처럼 막공을 다닐 수도 있겠지만, 그럴 열정도 이제는 사라졌다.

“……진짜 접을까.”

라나탈을 하는 동안 사람에게 두 번이나 치였더니 이게 뭐 하는 건가 싶고. 차라리 현생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턱을 괸 채 어둑한 허공을 의미 없이 쳐다보고 있던 그때였다.

어둠을 깨트리며 핸드폰에 있는 작은 조명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전화가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주하는 베개 옆에 있던 핸드폰을 가져와 물끄러미 응시했다. 화면은 보이지 않지만, 제게 전화를 거는 이는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보니 전화가 끊어졌다. 차라리 이렇게 흘러간다면 좋았을 텐데, 상대방은 포기하지 않았다. 또다시 울리는 핸드폰에 주하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멜로디를 피하는 건 안 될 것 같았다.

통화 버튼이 있을 만한 자리에 손가락을 얹고 살짝 밀어 올렸다. 그러자 열심히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끊기고 통화가 연결되었다.

—…….

“…….”

곧바로 말을 걸 줄 알았던 멜로디는 제가 전화를 받았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 또한 닫혀 있는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다.

상대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제가 먼저 운을 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보다 침묵이 더 길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미안, 자고 있었어.”

—……집이야?

“응. 아, 그런데 나 지금 핸드폰 액정이 다 나가서 화면이 아무것도 안 보여. 통화만 겨우 할 수 있는 정도야.”

—핸드폰 떨어트렸어?

“아침에 좀 요란하게 떨어트렸지. 내일 수리 맡기러 가…….”

—주하야.

평이하게 대화를 이어 가던 주하는 처음으로 제 이름이 불리자 입을 꾹 다물었다.

서로 실명을 알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발끝과 손끝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뭐야, 갑자기 이름 불러서 놀랐네.”

—내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어떻게 한 번을 안 할까? 약속까지 했으면서.

“……어?”

멜로디의 목소리는 평소와 확연하게 달랐다. 언제나 나긋나긋하고 다정한 음성이었는데, 오늘은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땀이 날 정도로 더운 날씨였는데, 멜로디의 날 선 목소리를 듣자마자 겨울이 찾아왔다.

—주하야, 설마, 혹시나 해서 묻는데. 라나탈 접으려던 건 아니겠지?

“…….”

—듀오인 나를 버리고, 같은 팀인 리프 애들 다 버리고 그러려던 건 아니지? 응?

“…….”

—차라리 욕하고 화를 내. 언제까지 삭이고 있을 건데. 누구 좋으라고 네가 접으려고 해?

“무슨, 소리야.”

—내가 그 새끼들 다 접게 해 줄까?

“잠, 깐. 잠깐만.”

주하는 다급히 타임을 외쳤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너무나 태연하게 누군가의 겜생을 끝내려 했다. 이것쯤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마치 던전 갈래? 하고 묻는 것과 같은 온도로.

“누굴, 접게 한다고?”

—너 가지고 논 자진신고 놈들.

“나 지금 좀 이해가 안 되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하는 소리야? 내가 길드 나온 것 때문에 그런 거면 오해하지 말고.”

—아니, 오해 아니야.

“뭐?”

—일반 던전이랑 영웅 던전, 죄악의 탑에서 널 제외한 것부터 문제였어. 어느 누가 레이드 팀원을 그렇게 방치할 수 있지? 그것도 같은 길드 사람을?

“…….”

—거기다 업적이나 평판작, 채집 같은 일반 콘텐츠도 아예 신경을 안 썼어. 네가 날 도와주다가 핵 사용자로 의심받을 때도, 나랑 같이 아이템 강화할 때도. 네가 만약 팀원들에게 나랑 다니는 걸로 한 소리 들었다면 날 부담스러워했을 거야. 그런데 그런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

멜로디는 그동안 자신이 의심했던 것을 차근차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네게 어떤 말로 강요했을지는 뻔해. 블랙체리와의 친분을 앞세웠겠지. 레이드 팀이 없으니까 네가 안쓰러워하는 것도 알았을 거고. 솔직히 일반 던전까지는 양보해도 괜찮아. 그럴 수 있다고 봐. 그런데, 영웅 던전부터는 아니지.

“…….”

—내가 그래서 레이드 팀 나왔냐고 물어본 건데, 넌 천상검에게 레이드는 무조건 같이 한다고 확답을 받았다고 했었잖아. 그 말뜻은 너도 의심은 했었다는 거야. 이 상황이 제대로 된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거지.

멜로디의 말대로 의심했었다. 이러다 보면 레이드 팀에서 나가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공략에 필요한 최소 요구치도 못 맞출 수도 있다는 불안함까지 더해졌었지.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멜로디가 해결해 주었다.

아니, 의심하고 좌절하고 후회할 기회를 내게서 빼앗아 가 버렸다. 그의 곁에서 안심하고 즐겁게 게임 하는 것만 알려 주면서. 그래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믿어선 안 될 사람을 믿었던 건 내 마음이 풍족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너 속여서 방심하게 만들어 놓고, 토벌전 레이드가 나오기 바로 직전에 엿 먹인 거 아냐. 그 새끼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블랙체리가 길드에 들어가기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라고.

자신의 안일함을 곱씹고 있던 주하는 멜로디가 모두 알고 있었다는 것에 숨을 집어삼켰다. 그것도 제가 몰랐던 것까지 다.

—……우연히 알게 됐는데 처음엔 못 믿겠더라. 너는 자진신고가 퍼클을 노릴 수 있게 만든 주역인데 어떻게 버려. 말도 안 되잖아.

“…….”

—그래도 의심하고 의심했어. 네가 천상검에게 확답을 받았을 때도. 차라리 그 전에 데려올까 했는데, 그렇게 되면 널 빼 오는 게 돼 버려서……. 나나 우리 애들이 아무리 커버해 준다고 해도 분명 네가 욕을 제일 많이 들을 것 같았어. 그리고 사실 오라고 했어도 네 성격상 오지 않았을 테고. 오히려 부담스러워했겠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희 팀은…….”

—열 명 아니냐고? 사실 우리 팀 딜러 한 명 게임 접었어. 사람 구하려고 했는데 너 말고는 도저히 다른 사람은 눈에 차지 않아서 계속 비어 있는 상태야.

“…….”

—그러니까, 주하야.

“…….”

—나한테 와. 나랑 같이 게임 하자. 응?

주하는 숨겨져 있던 이야기도, 리프 공대로의 영입 이야기도.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자고 일어나서는 머리가 그나마 제대로 굴러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전히 멍하기만 하다.

—처음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거든? 자진신고가 널 놔주면 내가 데려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들은 이야기가 거짓말이길 바라고 있더라. 그게 사실이면 네가 상처받을 테니까. 데리고는 오고 싶은데, 주하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기 싫고. 사실이길 바라면서도 사실이 아니길 바랐어. 그동안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알겠어?

“그게, 무슨 ……뜻이야?”

—글쎄, 무슨 뜻일까.

주하는 멜로디가 한 말을 곱씹었다. 사실이길 바라면서도 아니길 바란다니. 모순적이었다. 그런데 그 모순이 이상하게도 쓸쓸했다.

이기심과 배려가 공존하는 그 어딘가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누군가의 이득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을 우선으로 하는 게 느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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