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길드] 천상검: 뭐 어쨌든 같이 가 보려고 저희도 노력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더라고요. 카젤님이랑은 레이드 못 하겠어요
[길드] 천상검: 그러니까 여기까지 합시다. 다른 팀 알아보세요
그들이 지금까지 했던 일들이 노력한 거란다. 블랙체리를 챙기고자 양보라는 이름으로 저를 밀어내고, 오해를 풀기 위한 대화조차 하지 않고, 무시하기만 했던 그 모든 행동을 통틀어서.
뭔가 허탈해졌다. 노력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아무 데나 붙여도 되는 단어인가 싶어서.
분명 조금 전까지 묻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다 귀찮아져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길드] 천상검: 조용한 거 보니까 할 말 없어 보이는데 시간 끌 필요 없겠죠. 바로 길탈 시킬게요
[길드] 살금: 여기까지인 듯
[길드] 온별: 파찾 잘 찾아봐요. 보석술사 구하는 공대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ㅋㅋㅋㅋ
[길드] 베르메르: 어디선가 만나도 인사는 하지 맙시다
[길드] 블랙체리: 앞으로 그렇게 행동하지 마세요 ㅉㅉ
<자진신고 길드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길드 추방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스스로 나갈 기회조차 주고 싶지 않았나 보다. 반응하기도 전에 내쫓은 걸 보면.
카젤 캐릭터에 붙어 있던 자진신고 길드 명이 사라지고, 녹색 채팅으로 올라오던 길드 대화도 더는 올라오지 않았다. 추방당했다는 시스템 알람만이 화면 가득 떠올랐다가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주하는 그 화면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
1분이 흐르고, 10분이 흐르고, 30분이 흐르는 동안 카젤 캐릭터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도시에 있던 터라 길드가 사라진 카젤에게 누군가가 질문을 건넸지만, 그 누구도 대답을 듣지 못했다.
자리 비움 상태의 캐릭터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던 그때였다.
[귓속말] 개인주의: 카젤 형?? 길드가...!
[귓속말] 일시불: 형님! 길드 나오셨어요?
[귓속말] 바나나: 카젤님 자리 계세요?
[귓속말] 지구침략: 카젤님... 혹시 대화할 수 있을까요?
어느새 소문이 퍼졌는지 접속해 있는 리프 길드원들에게서 귓속말이 들어왔다.
생각하기를 멈췄던 머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길드원들에게 비난받고 추방당한 일들이 현실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리프 길드원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알지만, 딱히 해 줄 말은 없었다.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로 천장에 있는 노란 조명등을 응시했다. 빛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주변이 뿌옇게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마치 레이드를 위해 준비했던 순간들이 의미를 잃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 새로운 공대를 찾는 것도 무리지만, 그럴 열정도 사라진 상태였다. 허무하기도 했고,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도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길드 창고에 넣어 뒀던 채집물은 하나도 돌려받지 못했구나. 경매장에 팔면 적어도 50만 골드는 될 텐데.
확장팩 초창기 재료들은 전문 기술 숙련을 올리기 위해 구하는 사람이 많아서 비싸게 팔렸다. 자급자족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에 일정 부분 경매장에서 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재료를 자진신고에 두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지만, 왜인지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돌려받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지금은 그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접을까.’
어딘가에 이리저리 치여서 잔뜩 지친 기분이었다. 혼자 조용히 쉴 곳이 필요했다. 게임을 접으면 이런 기분을 느낄 일도 없을 테니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
주하는 카젤 캐릭터를 응시하다가 그대로 게임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PC방에 들어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밖으로 향했다. 딱히 갈 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아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서 잠이나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주하는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저 빨리 몸을 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
집으로 돌아온 그를 반기는 것은 전화벨 소리였다. 다행히도 핸드폰은 액정만 깨졌을 뿐 무사했다. 그러나 주하는 울리는 핸드폰에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침대로 향했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리프 길드 사람들에게 소식을 접한 멜로디, 그일 테지. 그래서 더더욱 받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울리던 핸드폰은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는지 조용해졌다. 하지만 곧바로 다른 알람이 울렸다.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는 알람이었다. 그러다 5초 정도 지나자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대로 두면 금방 멈추겠지 하는 생각에 계속 무시했다. 하지만 제 예상과 다르게 울림은 멈추지 않았다.
멜로디는 제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메시지를 보내고, 메시지도 보지 않으면 다시 전화 걸기를 반복했다.
참 끈질기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멜로디가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다.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이나 메시지 알람음도 전혀 소음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가 보내는 신호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액정이 깨져 화면이 전혀 보이지 않는 핸드폰을 가져와 물끄러미 응시했다. 혹시 지금이 연락할 타이밍이려나? 멜로디가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본인에게 말하라고 했었는데.
‘근데 말하면 뭐. 상황이 바뀌나? 아니면 멜로디한테 다른 공대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려고?’
주하는 헛웃음을 토해 냈다. 그에게 부탁하는 제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네. 친분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부담스럽게 하는 거, 제가 가장 싫어하는 짓이지 않던가.
묻어 두었던 기억이 슬그머니 올라오려고 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이 약해지니 자꾸만 안 좋은 생각만 하게 된다.
주하는 열심히 울리는 핸드폰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소리를 꺼 버렸다.
고민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은 눈을 감았다. 정신적인 피로가 생각보다 심했는지 눈을 감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몸이 바닥으로 축 가라앉는 느낌과 함께 어둠이 몰려왔다.
주하는 기절하듯 잠에 빠져버렸다.
***
[길드] 개인주의: 아!! 카젤 형 다시 안 들어오는데??ㅠㅠㅠ 어디 갔나요ㅠㅠㅠ
[길드] 바나나: 분명 길드 없었던 거 맞지?
[길드] 일시불: ㅇㅇ;;
[길드] 개인주의: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레이드 준비한다고 요리 열심히 만들지 않았어요? 채집도 해서 길드 창고에 넣어 둔다고 그랬는데?? 길드가 왜...... 없지???? 길드가 없으면 레이드 팀도.... 없는 거... 아닌가?
[길드] 월차연차휴가: 자진신고는 길드원들로만 레이드를 꾸리니까 레이드 팀이... 없어진 게 맞는 거겠지.
[길드] 일시불: 어제까지는 괜찮았다며;; 설마 그 블랙체린가 뭔가 그 사람이 결국 레이드 자리까지 가져간 건가? 일던도 그렇도 영던도 카젤 형님이 자리 양보했다고 하지 않았어?
[길드] 개인주의: 와... 사실이면 나 진심 짜증 나는데...?
[길드] 일시불: 나... 이런 생각까지 하고 싶지 않은데.... 처음부터 블랙체리가 노리고 들어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길드] 개인주의: -_-아니... 그럴 거면 처음부터 카젤 형을 놔줘야 하는 거 아냐? 왜 지금까지 붙잡고 있어? 말이 안 되잖아!
[길드] 일시불: 음... 그런가? 내가 웹소설을 너무 봤나;
[길드] 여름n모기: 근데 너무 갑작스럽게 길드 나오게 된 건 맞는 거 같은데... 30분 내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고 하더라; 충격받은 사람처럼
[길드] 개인주의: 우리 스콧 형 게임 접고 비어 있던 한 자리에 빨리 카젤 형 데려오자 ㅠㅠ 형 누나들도 영입하면 좋겠다고 노래 불렀었자나 ㅠㅠㅠㅠㅠ
[길드] Snow: 팀 있는 사람이라 차마 제안은 못 했지;; 딴 놈들이 채가기 전에 빨리 데려오자
[길드] 일시불: 지금까지 자리가 비어 있었던 이유는 카젤 형님을 모셔 오기 위함이었다!!
[길드] 개인주의: ㅠㅠㅠ 솔직히 한 자리 계속 비어 있는 거 대장님이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끄라고 해서 똥줄 탔는데... 차라리 잘된 거 같아 ㅠㅠㅠㅠ
리프 공격대의 마지막 팀원, 블래스터 랭킹 2위인 스콧은 지난 시즌 레이드를 끝으로 게임을 접었다. 그는 리프 길드의 가장 큰형님으로, 운영하던 가게가 갑작스럽게 호황을 누리게 되면서 더는 게임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확장팩으로 넘어오면서 신규 유저를 영입했어야 했는데, 어느 날 멜로디가 알아서 데려올 테니 신경 쓰지 말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도 멜로디는 남은 자리를 채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데려온 사람은 자진신고 길드의 카젤뿐이었다. 혹시 영입하려고 하는 건가 생각했지만, 카젤은 자진신고에서 레이드를 한다고 확실하게 말한 상태였다.
그래서 아쉽지만 반쯤은 포기하고 어서 누군가를 데려오기를 바랐다. 곧 3.1 패치가 다가오고 있었기에 다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카젤이 혼자가 되다니. 절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길드] 개인주의: 솔직히 남의 팀 사람을 빼 온다는 욕을 먹어서라도 카젤 형은 데려오고 싶었어 ㅇ_ㅇ;
[길드] 일시불: 맞아 준비성도 그렇고 컨트롤도 그렇고! 거기다 우리랑 성향도 잘 맞았잖아. 특히 대장님한테 한 방 먹였을 땐... ㄹㅇ 사랑 고백할 뻔...
[길드] Snow: 사랑 고백했으면 네가 팀에서 쫓겨났을걸? 어디서 멜로디의 연인을 노려? ^^
[길드] 일시불: 그땐 그랬다고요 ^^;; 지금은 절대 못 하지;
[길드] 개인주의: 아무튼! 빨리빨리 카젤 형 연락 좀 ㅠㅠ 빨리 데려와아아 나 불안해서 손 떨린다구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