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딜러 줍는 힐러-56화 (56/130)

56화

“멜로디 님은 꾸준히 운동할 테니 쉽게 당할 것같이 보이지 않네요.”

—운동해도 위험할 수 있지. 요즘엔 남자도 조심해야 해.

“아, 예.”

그렇게 불안하면 밤이나 새벽에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아침에 이동하지 그랬어. 한마디 얹으려다가 그냥 길게 한숨만 쉬고 말았다.

—아, 맞다. 나 오전엔 못 들어와.

“그래? 그럼 언제 와?”

—점심 먹고 들어올 거 같아. 1시쯤?

“1시? 그러면 더 잘까. 아니면 낚시나 할까.”

—좀 더 자둬. 가끔 길게 충전해 줄 필요는 있지.

“일찍 일어나면 채집하고 아니면 더 자지 뭐. 혹시 접속했는데 나 없으면 깨워 줘.”

—인제 날 알람으로 사용하는데 거리낌 없네?

“언제는 깨워 준다더니.”

—그러니까. 좋은 변화라고 말하는 거야.

그렇게 말한 멜로디는 정말 기분 좋다는 듯 맑게 웃었다. 본인이 알람을 대신하는 게 뭐 저리 기쁜지 모르겠다. 원래도 이상한 녀석이었는데, 오늘은 더 저 속을 알 수 없었다.

주하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려 자세를 바꿨다.

“그래, 그래. 자주 알람으로 써 줄게.”

—그러면 나야 좋지.

“……진심인지 장난인지.”

한탄 섞인 한숨을 쉬자 멜로디는 진심이라며 의뭉스러운 대답만 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언제 이렇게 지났지? 멜로디가 시간을 알려 주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게다가 길드 일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와, 사람 홀리는 게 수준급이네.

길드 일은 인제 와서 고민한다 해서 해결 방안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고. 일단은 시간이 늦었으니 잠을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누구 덕분에 늦게 자게 됐네.”

—그럼 그 누구 씨가 자장가 불러 줄까?

“어린애 취급은 사양입니다. 멜로디 님.”

—나 노래 잘 부르는데.

“네에, 그러시겠죠. 다음에 기회 되면 듣고 지금은 이만 꿈나라로 가 볼까요?”

—어린애 취급은 누가 하는 건지 모르겠네.

흐물흐물해진 목소리로 멜로디는 잘게 웃었다. 이젠 그가 한 번이라도 웃지 않으면 이상할 것 같았다. 멜로디는 귓가에 각인하듯 그렇게 웃음을 흘려 댔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익숙해질 것 같아 주하는 괜스레 귓불을 쓰다듬었다.

—어쨌든, 잘 자고. 조금 이따 보자.

“그래. 볼일 보고 와.”

—응, 잘 자.

“너도.”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오늘도 여전히 통화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제가 먼저 전화를 끊기 전까지 멜로디는 항상 기다리기만 했다. 의외로 매너가 좋다고 느끼는 부분 중 하나였다.

주하는 한참 화면을 응시하다가 핸드폰 아랫부분에 얼굴을 바짝 댔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잘 자.”

언제나 멜로디가 제게 해 주는 말이었다. 잘 자. 항상 ‘너도’라는 말로 적당히 넘겼는데 오늘만큼은 제대로 인사하고 싶었다.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때 핸드폰 너머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있던 주하는 흠칫 놀라 종료 버튼을 눌렀다.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라 뒤늦게 아차 했다. 들었을까? 아닌가? 혹시 몰라 한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보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못 들었으면 어쩔 수 없지.”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아 놓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점점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아 질끈 눈을 감았다.

‘자자. 일단 자.’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주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에서 깨어난 건 아침 11시 30분쯤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길게 기지개를 켜자 굳어 있던 몸이 슬슬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가볍게 스트레칭하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멜로디에게서 11시쯤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주선율: 잘 잤어?]

[주선율: 난 얼마 못 잤는데. 누구 씨 덕분에]

[주선율: 설마…… 아직도 자고 있나? 해가 이렇게 쨍한데? 잘 자다 못해 푹 자고 있는가 본데, 이상하게 배가 아프네? ㅋㅋ]

[주선율: 일어나면 연락해? 응? ^^]

이쪽이야말로 누구 씨 덕분에 늦게 자서 이제 일어났는데 누구 탓을 하는 거야. 불만스레 눈썹을 꿈틀거린 주하는 연락하라는 멜로디의 말을 무시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때, 핸드폰이 손에서 미끄러지더니 요란하게 여기저기 부딪치곤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

다급히 주워 화면을 보니 액정이 제대로 박살 나 있었다. 그냥 바닥으로 떨어졌으면 깨지지 않았을 텐데, 하필 책상 쇠 부분에 먼저 떨어진 게 문제였던 것 같다.

아예 화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게 금이 가 있으니 손댈 엄두도 나지 않았다.

“미치겠네.”

과연 액정만 교체하면 사용할 수 있을까? 새로 사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제대로 눌리는지 안 눌리는지 당장은 확인할 수 없으니 일단 수리부터 맡겨 보기로 했다. 그러나 오늘은 주말이라 센터가 열리지 않는 날이었다. 꼼짝없이 평일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핸드폰이 이 지경이 됐더니 식욕이 싹 가셨다. 터덜터덜 주방으로 향한 주하는 냉장고에 있는 프로틴 음료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적당히 흔들고 빨대를 꽂는데, 하필 잘못 눌러서 내용물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점성 있는 액체가 손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며 주하는 눈을 깜빡였다.

“…….”

한참 손과 바닥을 번갈아 보며 쳐다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침부터 가지가지 하는구나. 투덜거리며 끈적거리는 손을 씻고 바닥을 닦았다.

정리를 마치고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머리를 털며 걸음을 옮기는데 이상하게 집 안이 후덥지근하다. 분명 욕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시원하지 않았나?

“에어컨이 꺼졌나.”

컴퓨터 옆에 있는 에어컨을 보자 전원이 꺼져 있었다.

리모컨으로 다시 전원을 켜는데 이상하게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몇 번을 눌러도 켜지지 않아 콘센트도 확인하고 본체 전원을 눌러 보았지만,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주하는 고개를 숙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슬그머니 비어져 나온 땀이 관자놀이를 지나 턱을 타고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오늘 왜 이러지 진짜?’

핸드폰은 액정이 깨지고, 음료수는 쏟고, 에어컨까지 고장이라니. 뭔가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를 길게 쓸어 올린 주하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우연의 일치인데 괜히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지.

일단 집에서 게임 하는 건 불가능하니 PC방에라도 가야겠다. 에어컨 없이 이런 더위를 감당할 수는 없으니까.

대충 옷을 걸쳐 입고 지갑만 들고 밖으로 향했다. 핸드폰이 손에 없는 게 어색했지만, 뭐 어쩌랴. 화면이 아예 보이지도 않는 걸 가지고 다녀 봤자 짐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주하는 더위를 피해 PC방으로 향했다.

***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에 주하는 드디어 안도했다. 한여름에 햇볕이 쨍한 정오는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PC방으로 오는 길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없었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을 대강 손으로 훔치며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모니터 화면을 보는데, 잠시 잊고 있던 길드원들과의 문제가 떠올랐다. 데면데면한 게 아니라 무시에 가까운 배척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해답을 찾지 못했다.

아무리 고민하고 떠올려 보려고 해도 여전히 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마냥 이대로 시간을 버리는 건 아닌 것 같아 일단은 게임에 접속했다.

길드에 인사할까 말까 고민하는데, 채팅창이 쉴 새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길드] 베르메르: 미1친ㅋㅋㅋ 체리 오늘도 바지는 안 나오냐?ㅋㅋㅋㅋ

[길드] 온별: 체리 좀 어케 해봐... 쟤 저러다 정말로 3.1 패치 전까지 못 먹을 거 같아-_-

[길드] 블랙체리: ㅠㅠㅠㅠㅠ

[길드] 천상검: ㅋㅋㅋㅋㅋ 그쪽 팀에서 알아서 맞춰 놔라ㅋㅋ 우리 팀은 얼마 안 남았다

[길드] 살금: 토벌전 나오기 전까지 무조건 풀셋 맞춰야 함ㅋㅋㅋㅋ 안 그러면 체리가 미터기 바닥에 깔려 있을걸?

[길드] 블랙체리: 후... 살금 형 템 안 좋은 나한테 몇 번 발리신 거 같은데... 그 기억은 홀라당 잊으신 듯??

[길드] 살금: 그런 적 없는데 ^ㅅ^?

[길드] 온별: 저ㅅㄲ 기억력은 맨날 선택적이야

[길드] 블랙체리: 그럼 토벌전 레이드에서 다시 발라 드림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잊지 못하게 영상 찍어서 너튜브에 올려야겠닼ㅋㅋㅋ

[길드] 살금: ^^ㅗㅗㅗㅗ

[길드] 베르메르: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슬슬 강화도 해야 해 ㅋㅋ 체리 딜 얼마나 나오는지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보겠음ㅋㅋㅋㅋ

[길드] 블랙체리: 옛설 ^^77 풀셋 맞추면 미터기 뚫어 드립니다!

[길드] 세렌디피티: 풀셋 맞출 때까지 우리 끌고 간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저 녀석 템 저주를 어케 해야 하지? 굿이라도 해야 하나ㅡㅡ;;

[길드] 살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천상검: ㅋㅋㅋㅋㅋㅋ

대화가 이상했다. 마치 블랙체리가 자진신고 공격대 팀원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블랙체리 본인뿐만이 아니라 팀원들도 모두 당연하다는 듯 토벌전 레이드를 언급했다.

주하는 친구 창을 열어 벌꿀오소리를 찾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이라도 알아보려 했는데,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한 게 단순히 PC방 내부 온도가 낮아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스쳐 지나갈 줄 알았던 불안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

에이, 설마. 아니겠지. 천상검이 분명 레이드는 저와 함께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들이 이야기하는 건, 그저 블랙체리를 놀리기 위한, 또는 서로에게 장난치기 위한 말일 테지. 그럴 것이고,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 보려고 해도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주하는 키보드 위에서 방황하는 손을 꾹 맞잡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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