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물고기를 열 마리 잡는 동안 침묵은 계속 이어졌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닐 테고, 보지 못한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 조용하다니.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때 오프였던 벌꿀오소리의 접속 알람이 울렸다.
<길드원 벌꿀오소리 님이 접속했습니다.>
[길드] 벌꿀오소리: 하잇
[길드] 온별: 어서 오세요
[길드] 살금: 어서 와요
[길드] 블랙체리: ㅎㅇ
[길드] 세렌디피티: 하아ㅏㅏㅏ이 ㅇㅂㅇ/
제 질문에 조용하던 길드 대화창이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주하는 그 광경을 말없이 응시했다.
[길드] 천상검: 아침 먹었어요? 벌꿀님?
[길드] 벌꿀오소리: ㅇㅇ 아침엔 역시 고기인 듯
[길드] 베르메르: 꿀벌님 아침부터 고기라눀ㅋㅋㅋ 그게 넘어감? 위장이 미스릴로 만들어졌나?? 강한 위장인데?
[길드] 벌꿀오소리: ㅋㅋㅋㅋㅋ 베르님은 나약한 위장을 가지고 계시나 보군 좀 단련해 보시죠ㅋ
[길드] 천상검: 아침에 고기는 국룰 아님?
[길드] 살금: 허... ㅋㅋㅋㅋㅋㅋㅋ 너 아침에 뭐 들어가면 더부룩하다고 안 먹잖아???
[길드] 온별: 사랑은 위장도 변화시킬 수 있는 법
[길드] 베르메르: 애쓴다 애써... 꿀벌님 이쯤이면 천상검이 불쌍해 보이지 않나요? ㅋㅋㅋ
[길드] 벌꿀오소리: ^^ 아니요 전.혀!
[길드] 세렌디피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온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베르메르: 쳇ㅠㅠㅠ 좀 더 노력해라 천상검
[길드] 천상검: ㅋㅋㅋㅋㅋㅋ ㅗㅗㅗㅗ 닥1쳐
[길드] 블랙체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후로 천상검은 여전히 벌꿀오소리에게 들이댔고, 벌꿀오소리는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걸 보며 길드원들은 웃기 바빴다.
벌꿀오소리가 능청맞게 대답하긴 했지만, 불편한 대화임에는 분명했다. 대체 어디가 웃음 포인트인지 주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두 번이야 그러려니 하겠는데,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벌꿀오소리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으니 일단은 그대로 두긴 하지만,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가 길드 대화창에서 말하는 게 어색해진 것처럼, 이들도 어색해진 걸까? 제 질문에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벌꿀오소리가 접속하고 나서야 반응하는 길드원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팀원들이 제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고.
[길드] 벌꿀오소리: 근데 블랙체리님 바지는 드심? 이틀 내내 어둠의 심장에서 사시더만
[길드] 블랙체리: ㅠㅠㅠㅠ 아뇨... 안 나옴
[길드] 벌꿀오소리: 몇 부위 남았어요?
[길드] 살금: 쟤 바지랑 어깨랑 장갑 남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과연 3.1 패치 전까지 다 먹을 수 있을 것인가? ㅋㅋㅋㅋ
[길드] 블랙체리: 아... 형...ㅠㅠㅠㅠ 나는 슬퍼 죽겠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길드] 온별: 강화 재료 먹으려면 계속 영던 돌아야 하니까 언젠간 먹겠지. 근데 문제는 바지임... 쟤 하나 때문에 어둠의 심장을 계속 돌아야 해......
[길드] 천상검: 걱정 마 우리도 상의 못 먹은 사람 있다ㅋㅋㅋ 다 같이 고통받는 거야......
[길드] 베르메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는 즐겁다고 난리인데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주하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다.
“…….”
푸르스름한 새벽녘,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워 의미 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게임을 늦게 끈 터라 바로 잠을 자야 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그날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혹시나 제가 오해했던 건 아닌가 하고 몇 번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간간이 대답해 주던 천상검마저도 이제는 대놓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블랙체리도 전에는 미안해하는 기색이었는데 요즘엔 언제 그랬냐는 듯 귀찮아했다.
공사 구분하자고 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선을 그어 버리면 레이드 할 때 어떻게 하자는 걸까. 공략도 공략이지만 대화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레이드를 할 수 없었다. 제가 이것저것 해 보자 말해도 듣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방법을 고심하고 있는데, 베개 옆에 놔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을 보니 멜로디였다.
“여보세요.”
—네에, 여보, 세요.
주하는 손등으로 눈을 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요즘 멜로디는 이상한 짓을 해대고 있었다. 그놈의 애인인지 뭔지. 둘만 대화할 때도 가끔 제 반응을 즐기려는 듯 이렇게 장난을 걸곤 했다.
“이상하게 끊어서 말하지 말라고 했지.”
—네가 맨날 그렇게 받잖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들 이렇게 받지 않을까? 서비스직 빼고.”
—음, 그럼 앞으로 다르게 받아 봐. 요즘엔 개성이 드러나는 게 좋다던데.
“욕은 어때? 오래 살고 좋을 것 같지 않아?”
이렇게 말해도 제가 하지 못할 것을 아는지 멜로디는 웃기만 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한 거겠지.
이럴 때면 제가 너무 순진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떡하나. 대화창에서야 ㅅㅂ 정도는 쓸 수 있어도 육성으로 욕을 하는 건 못 하겠는데.
—그러고 보니,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아니.”
—……너무 단호하지 않아?
“너한테는 단호해도 돼. 이상한 거 물어볼 것 같으니까 그냥 안 들을래.”
—이상한 거라니. 그런 거 아닌데? 날 그렇게 못 믿어?
“뭘 보고 믿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음…….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는 거 말고는 괜찮은데?
“심장이 왜 빨리 뛰어? 달리기라도 했어?”
—아니이. 그건 아닌데.
멜로디는 말끝을 길게 늘이며 웃음을 흘렸다. 마치 ‘궁금하면 더 물어봐’ 하고 여지를 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당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미 전적이 있기에 주하는 다시는 말려들 생각이 없었다.
“그럼 병원 가 봐. 갑자기 빨라진 거면 문제 생긴 걸 수도 있으니까. 요즘은 젊은 나이라도 건강 관리 잘해야 해.”
일부러 진지하게 말하자 건너편에서 신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렇지. 이미 놀릴 준비 해 놓고 제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하여튼 음흉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아아…… 안 걸리네. 이젠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아 버린 것 같아. 어떡하지?
“어떡하긴, 이젠 나를 놔줘야지.”
—난 한번 주우면 절대 버리지 않아.
“대체 언제까지 주웠다고 할 거야? 그리고 뭘 버리지를 않아? 내가 무슨 물건이야?”
—정확하게 말하면 내 딜 노예지.
“그 계약서 내가 구매해도 되나? 사용하지 않을 거면 그냥 나한테 팔아.”
—개당 백만 골드. 그 이하로는 안 팔아.
“와, 세상에 이런 협잡꾼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당연히 너에 대한 소유권인데 그 정도는 되어야지. 백만 골드도 싸게 부른 거야.
“비싸게 책정해 줘서 고오맙습니다?”
—천만에.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야.
뭘 그렇게 뿌듯해하고 있냐? 어이가 없어서 픽 웃자 멜로디도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튼 이상한 소리를 잘해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요즘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왜?”
—요 며칠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
주하는 손등으로 덮어 놨던 눈을 깜박이다가 천천히 손을 치웠다. 그렇게 티가 났던가? 나름 감추려고 노력했는데, 멜로디에게는 다 보였나 보다. 이래서 눈치 빠른 사람은 안 된다니까.
“그냥.”
—그냥?
“날이 더워서 축 처지니까 그렇지.”
—……너 밖에 나가지도 않잖아. 에어컨도 시원하게 틀어 놔서 가끔 춥다고 하지 않았나?
“밥, 먹으러 갈 때는 나가거든?”
—어쩌다 한번 한 시간 정도 나갔다 오는데 날이 더워서 축 처져? 대단히 예민한 몸을 가지고 계시나 보네……?
“어, 내가 좀 예민해.”
—정말? 흐음, ……은데?
마지막 말은 입 안에서 웅얼거리듯 말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뒷말로 유추해 보면, 좋은데? 괜찮은데? 뭐 이런 종류이지 않을까.
그런데 아무리 봐도 멜로디에게 좋을 일도 없고 괜찮을 일도 없으니,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았다.
“뭐? 뭐라 그랬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멜로디는 오늘따라 실실 웃어 댔다.
“나 그만 괴롭히고 얼른 집에 들어가라.”
—걸어가고 있어. 도착할 때까지 전화 끊으면 안 돼.
멜로디는 항상 PC방에서 게임을 했다. 왜 집에서 안 하냐고 물으니 처음 게임을 했을 때 PC방에서 했더니 이제는 그게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어차피 운동하러 나가기도 해야 하니 겸사겸사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멜로디는 뭐 하는 사람일까. 저처럼 대학생일까?
이름이야 예전에 우연히 들은 것도 있고 전화번호를 저장하면서 메신저에 자동으로 실명이 떠서 알고 있긴 하지만, 그 외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반말에다가 너, 너, 하고 친구처럼 말을 놨는데 만약 형이라면 굉장히 당혹스러울 것 같았다.
절대로 개인 신상을 물어보거나 듣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게임 친구. 그 이상은 제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왜 조용해? 고민 있어?
“너 언제 들어가나 생각하고 있었어.”
—피, 곤한가? 자꾸만 발걸음이 느려진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아.
어디서 대놓고 수작질인지, 이제는 감추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는다. 일부러 톡톡 건드리는 말에 주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난 자야 하니까 이만 끊는다?”
—……매정하다. 매정해. 어두운 밤길 걸어가는 내가 걱정되지도 않아?
“밤길? 지금 슬슬 해 뜨려고 하는데?”
—이럴 때가 더 위험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