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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53화 (53/130)

53화

말할 때마다 라쿤은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살랑살랑 움직이는 꼬리를 보며 주하는 대화에 집중했다.

<그게 뭐냐면! 아주 간단해. 나를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다만 조금이라도 틀리면 미로 밖으로 튕겨 나갈 테니까 조심해야 해. 하! 지! 만! 성공했을 때는 아주 즐겁고 행복한 일이 일어날 거야! 그러니까 꼭 성공하길 빌어!>

“뭐라고?”

—왜? 뭔데?

“춤 틀리면 미로 밖으로 튕긴대. 윽, 시작했다.”

<우선, 뭐가 있는지부터 알아볼까? 자, 잘 봐! 첫 번째는 이거야.>

라쿤은 왼쪽으로 한 바퀴 돌며 엉덩이 같은 골반을 흔들었다. 동시에 시스템 알람이 같은 모션인 1번을 누르라고 지시했다.

주하는 얼른 1번을 눌렀다. 그러자 단상 위에 있는 카젤 캐릭터가 라쿤과 똑같이 움직이며 골반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야, 춤 잘 추네.

“아…… 맙소사.”

<좋았어! 이번엔 반대로!>

카젤이 잘 따라 하자 라쿤은 다음 춤을 보여 주었다. 시스템 알람은 2번을 누르라고 알려 주었다. 주하는 떨리는 손으로 2번을 눌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카젤 캐릭터가 골반을 흔들었다.

만들어진 모션이긴 하지만, 엉덩이를 흔드는 모션이 생각보다 도발적이었다. 19세 게임이라 이런 부분에서 자유로운 건지 골반도 무척 자유분방했다. 마치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해 만들어진 춤 같았다.

멈추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미로 밖으로 튕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음 동작까지 따라 했는데, 하필 손으로 자기 몸을 쓸어내리며 살짝 주저앉는 모션이었다.

—오.

멜로디의 감탄에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캐릭터가 아닌 실제 자신이 그의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어딘가에 숨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라쿤은 냉정했다. 기어코 마지막 춤까지 추게 하더니 이제부터가 진짜라며 자신을 따라 하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노래의 볼륨이 높아지며 쿵쿵 귀를 때려 대기 시작했다.

몇 번을 누르라는 안내도 없어서 라쿤이 움직이는 모션을 보고 춤을 따라 해야 했다. 주하의 손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완전 아이돌인데?

“…….”

—나 보여? 내 캐릭터 지금 형광봉 손에 들고 흔들고 있어.

“……조용히 해.”

—뒤에 있는 라쿤이랑 칼군무네. 역시 카젤. 여기서도 반사신경은 빛을 발하는구나.

멜로디는 저를 구경하면서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춤을 추는 동안 표정이 좋다든지, 이 부분이 킬링 포인트 같다든지 하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마음 같아선 닥치라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육성으로는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드디어 1절이 끝나고 2절로 넘어가는 구간이었다. 춤을 추던 라쿤은 오른쪽 화면으로 이동하고, 왼쪽에는 세로로 긴 반투명한 박스가 나타났다.

“불안하게 뭐가 또 바뀌냐.”

—2절은 뭔데? 지금 카젤 캐릭터랑 라쿤들 가볍게 스텝만 밟고 있어.

그때, 반투명한 박스 위로 세로로 긴 줄이 그어지더니 맨 아래 피아노 건반이 스르륵 올라왔다.

리듬 게임이었다.

“2절은 리듬 게임이네. 이거 설마 하나라도 틀리면 게임 오버되는 건 아니겠지?”

—리듬 게임까지 나왔어?

“어. 완전 본격적이야. 개발진, 대체 무슨 일이야.”

—업적에서 사용하는 단발성 게임인데 그렇게나 디테일하게 나왔다고?

“너도 해 보면 알걸? 아, 시작한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선을 따라 네모난 바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아래 누를 수 있는 키보드가 떠올랐는데 QWERASDF, 그리고 스페이스 바였다.

주하는 박자에 맞춰 하나씩 누르기 시작했다. 집중해서 39콤보까지 맞췄는데, 40콤보가 되자마자 오른쪽 옆에서 춤추고 있던 라쿤이 말했다.

<호우! 40콤보! 스피드 좀 팍팍 올려 볼까? 자, 달려 보자아아아아! 아, 맞다. 틀리면 알지?>

라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음악이 빨라졌다. 떨어지는 바도 속도가 붙고, 개수도 점점 늘기 시작했다.

“미쳤다.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처음부터야. 근데 속도 빨라졌어. 아, 아! 뭐야, 더 빨라져!”

—춤이 엄청……. 눈을 못 떼겠네. 나중에 제복 의상 입고 춰 볼래? 사 줄게.

“사 주면 받긴 하겠지만, 춤은 안 춘다.”

—춰 달라고 사 주는 건데? 안 추면 안 사 줘야지. 그나저나 키보드 부서지겠다.

“그런 거 신경 쓸 때가 아냐. 와! 놓칠 뻔. 말 걸지 말아 봐.”

—내가 옆에 있는데 한눈파는 게 가능해?

“어, 가능하니까 얌전히 있자!”

주하는 저를 방해하는 멜로디를 최대한 무시하며 리듬 게임에 집중했다. 틀리는 순간 미로부터 다시 시작하고 또 리듬 게임을. 아니, 이 끈적끈적한 춤을 춰야 했다. 제발 한 번으로 끝내자.

춤과 노래에 어찌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개발자들이 이곳에 자신들의 광기를 녹여 낸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성인 게임을 이렇게 이용하다니. 업적은 좀 무난하게 갑시다, 제발.

주하는 속으로 투덜대며 열심히 손을 놀렸다.

드디어 끝이 가까워져 왔다. 리듬에 맞춰 떨어지는 바를 정확하게 맞히다 보니 마침내 화면 중앙에 피니시가 떠올랐다.

“하아, 드디어 끝났다.”

—잘 추던데? 덕분에 구경 잘했다.

“웃지 마라. 다음은 네 차례야.”

—음? 그럴 리가. 나도 완료 떴어.

“뭐라고?”

—혼자 하는 업적이 아니니까 당연히 같이 완료되지. 너는 춤추고 나는 봉 흔들고. 이것도 스킬이야. 타이밍 맞춰서 열심히 눌렀는데?

“와, 진짜 억울하다, 억울해.”

—영상 잘 찍어 놨으니까, 나중에 보여 줄게.

[파티] 카젤: ㅗㅗㅗㅗ

[파티] 멜로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리듬 게임이 끝나자마자 업적 완료가 뜨고 화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월드 알림이 울렸다.

<‘오늘부터 아이돌!’ 리듬 게임 오픈!

최초 완료자: 카젤, 멜로디

대도시 광장에 있는 프로듀서 NPC에게 말을 걸면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총 50가지의 노래가 난도별로 있으니 파티, 또는 공격대로 다 함께 즐겨 보세요! 춤은 역시 K팝이죠!>

“…….”

—…….

그 순간 지역 채팅창이 폭발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하는 화면을 멍하니 보다가 바짝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뭐야? 뭔 소리야 이게? 카젤님ㅋㅋㅋㅋㅋㅋㅋㅋ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귓속말] 개인주의: 카젤 형ㅋ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 바나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닠ㅋㅋㅋㅋ 카젤님ㅋㅋㅋㅋ 멜로디랑 뭘 하고 다니시는 거예옄ㅋㅋㅋㅋㅋㅋ

[귓속말] 일시불: ㅋㅋㅋㅋㅋㅋㅋ형님ㅋㅋㅋㅋ 어디서 몰래 춤추다가 걸리셨어욬ㅋㅋㅋㅋㅋㅋ

[귓속말] 월차연차휴가: 앜ㅋㅋㅋㅋㅋㅋㅋ 카젤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 Snow: ㅎㅎㅎㅎㅎㅎㅎ 미쵸따... 갓겜이다... 콘텐츠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0^

[귓속말] 여름n모기: ㅋㅋㅋㅋ 이런 걸 다 여시네;;;;

친구 귓속말만 열어 놨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또 폭주했을지도 몰랐다. 이미 지역 채팅창과 월드 채팅에서 카젤과 멜로디를 찾는 유저들이 신나게 웃어 대고 있었다.

“이거…… 히든 콘텐츠였어?”

—하아.

“어쩐지 퀄리티가 좋다고 했다……. 콘텐츠로 내놓으려고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거였어.”

—그런데 왜 하필 우리가 먼저 찾은 건데?

“그러게, 왜 하필 우리였을까? 갈대 섬을 발견하신 멜로디 님, 말씀해 보시겠어요?”

—…….

그도 이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나저나 귓속말로도 이 난리인데, 멜로디는 길드창으로 얼마나 놀림받고 있을까? 보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당사자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카젤과 멜로디가 같이 춤을 춰서 콘텐츠를 열었다고 생각할 터였다. 정작 춤을 춘 건 저 혼자였는데 말이다.

잠깐,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내가 더 이득인 것 같은데? 멜로디의 명성에 개그 이력이 한 줄 붙었다는 소리잖아. 저야 뭐 떨어질 명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멜로디 님이 열심히 춤춰서 히든 콘텐츠를 열어 주셨다고 소문나겠네.”

—…….

“괜찮아. 나만 알아주면 되지.”

주하는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 냈다. 이게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역시 아직 세상은 살 만했다.

—사람과의 관계에선 오해가 있으면 안 돼. 이거 영상 게시판에 올린다.

“초상권 침해요, 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랑 말도 안 하면서 무슨 관계요.”

—진실을 밝혀야지.

“가끔은 진실을 묻을 때도 있어야죠. 그게 세상을 위한 일이라면.”

—세상을, 위한, 일?

빙글거리며 놀려 대는 카젤을 한참 쳐다보던 멜로디는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하긴, 저렇게 춤추는 카젤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 주는 건 안 되지. 잠깐 잘못 생각했네.

그러고 보니 리듬 게임에 정신이 팔려서 못 봤는데, 카젤 캐릭터가 어떻게 춤을 춘 거지? 주하는 순간 불안해졌다.

“뭘 어떻게 췄길래 그래?”

멜로디는 대답 대신 메신저로 영상을 보냈다. 그리고 카젤 캐릭터의 현란하게 움직이는 골반을 본 주하는 이마를 짚었다.

—역시 진실은 묻어야겠지?

“부탁, 드립니다. 멜로디 님.”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멜로디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복 의상 사 줄 테니까, 내 앞에서 한 번 더 추자.

“진심이야?”

—진심인데?

“……그럼 공평하게 가자. 둘 다 입고 추는 거야.”

—흠, 칼군무 가능해? 가장 어려운 난도로 할 건데.

“방금 퍼펙트 찍은 거 실시간으로 봤잖아.”

—오케이, 디데이는 내일로.

그나마 혼자 추는 게 아니라 다행이다.

그런데 제복 입고 추는 걸 대체 왜 보고 싶어 하는 거야? 제복 의상이 핏이 예쁘기로 소문나긴 했는데, 실제 군인 정복 같은 옷이었다. 그런 옷을 입고 골반 춤이라니.

주하는 멜로디의 취향을 의심하며 고개를 저었다. 범인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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