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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48화 (48/130)

48화

1페이즈는 무난하게 클리어하고, 2페이즈로 들어왔다. 지구침략과 리미티드가 본진으로 합류하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공략을 확인할 때가 왔다. 첫 번째 목표는 전원 생존. 그 누구도 죽어서는 안 됐다.

NPC의 목소리와 함께 맵이 깜박였다. 찰나였지만, 왠지 전보다 더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이번엔 처음에 나왔던 좌우 방향이었다.

“좌측 조심.”

어둠 속에서 이동하고 난 후 다들 조용히 기다렸다. 누군가 죽었다는 말도 없었고, 탄식의 한숨도 없었다. 모두 생존한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 집중하고 있는데, 화면이 또다시 깜박이며 안전 지역이 보였다. 지금까지 계속 나타났던 붉은 화면은, 팀원들이 모두 생존해 있자 나타나지 않았다.

“성공이네요. 이번엔 원형이요.”

—역시 전멸할 때 나오는 연출이었군.

—쉿! 일단 피하는 거에 집중해.

이제야 제대로 된 공략을 찾아냈다. 정말로 단 한 명의 실수가 전멸로 이어지는 기믹이 영웅 던전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도 조금은 까다롭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구치가 높지 않다는 건데, 이마저도 레이드 유저에게나 쉽지, 일반 유저들은 한참 헤맬 터였다. 그저 익숙해지는 것만이 답이었다.

주하와 파티원들은 계속해서 안전 지역이 나오는 곳을 확인하며 이동했다. 좌우, 위아래, 원형, 네모, 마지막으로 외곽으로 피하는 것까지. 총 다섯 번의 기믹이 끝나자 드디어 화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난 죽을까 봐 긴장했더니 손에 땀 찼어.

주하는 키보드와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손바닥을 옷에 쓱 문질렀다. 지구침략처럼 땀이 차진 않았지만, 저도 긴장했던 건 매한가지라 조금이라도 풀어 주기 위해서였다.

—페널티도 페널틴데, 나 때문에 전멸하는 게 더 싫었어.

—맞아, 그게 더 싫어.

—아쉽네, 돈 좀 벌 수 있나 했더니.

—저러다 한번 걸려 봐야지, 어휴.

2페이즈 어둠 기믹을 공략하고 났더니 다들 마음의 짐을 던 듯했다. 멜로디가 살짝 도발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슬렁슬렁 넘길 정도였다.

어둠이 끝나자 관리자 네테람은 탱커를 쫓아 본진으로 다가왔다. 지구침략은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가 주의를 밖으로 끌었다. 기본적으로 보스의 시선은 본진으로 향하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뒤를 리미티드가 바짝 따라붙었고, 보스 공략은 다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딜러들이 열심히 딜을 하자 관리자 네테람의 피는 어느새 30%로 떨어졌다. 이대로 쭉 평탄하게 끝날 것 같진 않아서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녀석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뭐야? 어디 갔지?

—어? 저깄다. 제단 위.

네테람은 순간이동으로 제단으로 돌아가 있었다. 지구침략이 빠르게 달려가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놈은 두 팔을 펼친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탱킹이 되지 않아 당혹스러워하던 그때였다.

네테람 주변에 있던 검들이 재빠르게 이동해 맵 외곽으로 향했다. 검은 유저를 포위하듯 둥그렇게 자리를 잡았다. 중앙을 향해 검끝을 겨누며 가로로 누운 검이 강강술래 하듯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두 바퀴 정도 돌았을 때쯤, 검끝에서부터 붉은 선이 쏘아져 나왔다.

—와, 섬뜩하다.

—죄다 멜로디한테만 향하고 있네.

멜로디는 제게만 고정된 게 맞는지 좌우로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검끝에 연결된 선이 그를 따라 똑같이 이동했다. 대상이 어디로 가든 끝까지 쫓아가려는 모양이다. 저 붉은 줄은 레이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설마 한 번에 다 몰아치는 건 아니겠지?”

—아니길 바라야지.

—과연 멜로디가 살 것인가.

—살아야 해. 지금 죽으면 보스 못 잡아.

네테람의 피는 아직 27%나 남아 있었다. 녀석의 검이 멜로디를 향하는 순간에도 계속 딜을 넣었기에 피가 더 줄긴 했어도 아직 안정권은 아니었다. 적어도 10% 이하로 떨어져야 힐러 없어도 간당간당하게 잡을 수 있을 터였다.

—어? 뭐야. 외계인 어디 갔어?

—헐, 나 제단에 묶였어.

주하가 멜로디의 생존을 셈하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지구침략이 사라지더니 제단에 꽁꽁 묶인 채로 나타났다. 다급히 타깃을 바꿔 봤지만, 공격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다.

—뭐야, 불안하게 탱커는 묶이고 힐러는 집중포화야.

—설마…… 딜러 기믹인가?

—탱커와 힐러를 살려라?

“주변에 상호작용되는 건 없어요. 탱커 풀어 줄 방법이 없어 보이는…… 어? 줄 색이…….”

혹시 몰라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멜로디에게 연결된 붉은 선이 검은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곧 공격을 시도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멜로디에게 해골 징표가 크게 떠올랐다. 불길한 징조였다.

—나 디버프 생겼어.

“디버프? 뭔데?”

—검에 한 대라도 맞으면 즉사라는데?

—잉? 저거 유도 미사일 같은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설마…….”

—인터셉트.

불길함은 왜 빗나가지 않는가.

당혹스럽게 검을 바라보고 있는데, 드디어 공격이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검이 멜로디에게 향하고 있었다. 주하는 다급히 멜로디 주변으로 이동했다.

—아놔! 너한테 가는 공격 우리가 중간에 대신 맞아야 하는 거야? 하나도 놓치면 안 되고?

—한 대라도 맞으면 나 죽어.

—미치겠다!

바나나의 외침에 자극당한 것인 양 검은 미친 듯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주하는 다급히 구역을 지정했다.

“제가 8시, 바나나 님이 4시, 리밋 님이 12시 맡아요.”

—오케이.

—자리 잡았어요.

그 후로 딜러들은 꽁지 빠지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중앙에서 짧게 이동하려고 했지만, 검에 맞자마자 주변에 광역 대미지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멜로디에게서 멀어져야만 했다. 그런데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고, 날아오는 방향도 제각각이라 딜러들은 정신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멜로디도 딜러들의 피를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움직일 여유도 없이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는데, 가만히 구경하고 있는 건 탱커인 지구침략뿐이었다.

—다들 파이팅.

—탱커가 부럽긴 처음이네!

동감이었다. 수많은 레이드를 해 봤지만, 탱커보고 쉬라고 하는 기믹은 난생처음이었다. 전투 시작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딜을 퍼부어야 하는 딜러로서 당연히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검을 맞기를 한참. 드디어 공격이 끝나 갈 기미가 보였다. 주변에서 빙글빙글 돌던 검이 많이 사라진 것이다. 안도하며 7시 방향에 있는 검을 맞았는데, 순간 리미티드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2시 끝에 있는데 10시에 검 하나 놓쳤어요!

하필 마지막 검이 애매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리미티드가 가기엔 너무 먼 곳이라 주하가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4시 쪽으로 조금 이동할게.

다행히 다른 검은 더 없어서 멜로디가 4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 순간, 멜로디에게 있던 디버프가 딜러 전원에게 전이되었다. 검에 한 대라도 맞으면 즉사한다는 그 디버프가.

—헐?

—뭐야?

“어라?”

설마 디버프 대상이 움직이면 전이되는 거였어? 주하는 자신의 머리 위에 뜬 해골 징표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딜 미터기로 시선이 돌아갔다.

1등 카젤, 2등 바나나, 3등 리미티드.

찰나의 순간 번뇌가 찾아왔다.

현재 1등이라 여기서 죽는다면 꼴찌가 되니 내기에서 지는 것은 물론, 가지고 있는 돈도 내주어야 한다. 한두 푼도 아니고 10만 골드가 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몸을 피하면 멜로디가 죽거나 다른 딜러가 죽을 수도 있었다. 차라리 멜로디가 죽어서 다시 트라이하는 게 낫지 않을까? 깔끔하게 리셋하는 거지.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나?

“…….”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기믹을 넘길 수 있는데 미터기 때문에 전멸시키는 건 내 욕심이었다.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딜 내기가 걸려 있으니까 다들 이해해 주지 않을까? 아니, 저 때문에 다시 시작하게 되면 제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음, 그래도 걸린 골드가 어마어마한데…….

고작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마음속에서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무색하게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멜로디 앞을 가로막은 주하는 제게 다가오는 검을 보며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번뇌는 무슨. 머리만 복잡했었지,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어…….

—음.

해골 징표가 있는 상태로 검에 맞자마자 카젤은 바닥에 쓰러졌다. 주하는 회색빛 화면을 보며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전투 중에는 부활이 불가능해서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구경하고만 있어야 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대의 희생.

—고민도 안 하고 그냥 들이대시네요. 대단하심.

—고의는 아니지만, 멜로디가 뿌린 똥을 카젤 님이 회수하셨네.

—역시 카젤 님은 멜로디의 듀오시군요.

“몸이 그냥 가네요…….”

사람들의 칭찬과 격려가 오가는 동안 멜로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일이 당혹스러운 건지, 미안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깔끔하게 포기해서 제 마음은 편한데, 멜로디는 많이 미안한가 보다. 너무 신경 안 썼으면 좋겠는데.

기믹이 끝나고 나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피하거나 상쇄하는 기본적인 공략뿐이어서 쉽게 끝낼 수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보스인 네테람이 쓰러졌다.

—좋았어, 팀 내기는 승리!

—막내들 찡찡대네, 귀엽게.

—일단 아이템부터 볼까? 카젤 님이 상자 열어 보세요.

“제가 열어 볼까요?”

멜로디의 부활을 받고 일어난 주하는 상자로 향했다. 아이템이 두 개 나오는 곳은 상자도 두 개였다. 일단 왼쪽 상자부터 손을 대자 아이템 선택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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