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반대로 가는 게 아니라면 또 뭐가 남았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딱히 다른 공략은 떠오르지 않았다. 화면이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이 너무나 컸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둠은 대충 알겠는데, 붉은색이 문제였다.
그럼, 일단 되는대로 막 던져 볼까?
“생존기 써 보는 건?”
—방금 내가 써 봤는데 의미 없었어.
“생존기도 아니면, 아예 외곽으로 달려 보는 건?”
—외곽이라…….
“점프도 해 볼까? 아! 아니면 어둠 때 안전 구역이 따로 표시되지 않았을까? 그것도 확인해 봐야 할 거 같은데.”
—오, 카젤 님. 뭐가 많네요.
—이런 거 좋다! 우리 막둥이들은 춤춰 보자는 소리나 해서 속에 열불이 나는데 카젤 님은 뭔가 굉장히 현실적이야. 좋아, 좋아!
—셋 다 해 보자.
아예 허무맹랑한 말은 아닌지 파티원들은 긍정적이었다. 정작 주하는 이런 반응을 기대하진 않아서 당혹스러웠지만 말이다. 하긴, 춤춰 보자고 하는 의견보다는 나으려나?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개인주의나 일시불은 공략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공략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 어둠은 단순한 패턴이 아닌 큰 원과 작은 원, 그 사이에 비어 있는 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각각 네 구역을 정해서 안전 구역이 있는지까지 확인했지만, 이는 없었고 하필 한 발을 걸쳤던 리미티드가 사망하기까지 했다.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는 그는 한껏 침울해 보였다.
괜찮다고 다독이던 순간, 어김없이 붉은 화면이 나타났다. 핏물이 어찌나 생생한지 마치 진짜 모니터에 흐르는 것만 같았다.
—바나나는 뛰어 보고, 카젤은 외곽으로 이동해 봐. 지구 형은 중앙에 그대로 있고 난 보호막 둘러 볼게.
—오케이, 스페이스 연타 중!
“달려왔어.”
각자 지정한 대로 진행하자 외곽 끝까지 달려온 카젤에게도 보호막이 들어갔다. 이 중 하나라도 걸리길 바라며 간절히 보고 있는데.
—아…….
—으으.
—흠, 쉽지 않네.
남은 네 명도 모두 죽어 버렸다. 멜로디의 말대로 쉽지 않다고 느낀 주하는 의자 깊숙이 몸을 뉘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어내는 소리가 컸던지 멜로디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땅 꺼지겠어.
“……도저히 모르겠다.”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고 심지어 점프까지 해 봤는데 뭐 하나 걸리는 게 없었다. 한 명이라도 살았으면 감을 잡을 텐데 붉은 화면만 나오면 모두 죽어 버리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슨 5인 영웅 던전을 이렇게 어렵게 냈지? 여기 보스가 주는 아이템은 스펙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갑옷과 하의라서 무조건 클리어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난도면 일반 유저는 분명 트라이하다가 끝날 게 뻔했다.
아니면 공략만 알면 충분히 넘길 수 있는 기믹인데 저희가 삽질하는 걸 수도 있었다.
‘공략만 알면 충분히 넘길 수 있는 기믹이라…….’
톡, 톡, 토독. 주하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피아노 치듯 두들겼다. 고민할 때 종종 튀어나오는 버릇이었다.
어렵게 가지 말고 좀 더 쉽게 생각해 볼까 하고 고민하던 바로 그때, 멜로디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짧은 탄식을 흘렸다.
—아, 혹시?
“혹시? 혹시 뭐?”
—붉은색 화면은 원래 나오면 안 되는 기믹이 아닐까?
“나오면 안 되는 기믹?”
—지금까지 계속 어둠에서 죽는 사람들이 있었잖아. 그래서 전멸하지 않았나 싶은데.
—……설마.
—아, 아니야. 아니라고 말해 줘. 그러면 너무…….
그러고 보니 어둠 페이즈를 다섯 명이 다 살아서 넘긴 적이 없었다. 꼭 한 명 내지는 두 명이 사망했는데, 그 이후는 무슨 짓을 해도 무조건 전멸이었다. 멜로디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분명.
“……사이버 유격.”
누군가가 기믹 처리에 실패하면 파티나 공격대 전체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이버 유격이었다. 5인 던전에 이런 레이드 기믹을 넣는다고? 그것도 고작 짧은 화면만 보여 주면서?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아니라고 부정해 보지만, 확실히 라나탈의 이번 확장팩은 기존의 유형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많이 했다. 타워를 파티로 만들었다는 것과 퀘스트의 유형을 여러 가지로 나눴다는 점, 그리고 던전의 난도를 높였다는 것까지.
그렇다면 사이버 유격도 그럴 일 없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한번 해 봐야 알겠지. 근데 아무래도 예상이 맞는 거 같은 게, 보스가 2페이즈로 넘어갈 때 하는 말이 이걸 뜻하는 거 같거든.
“무슨 말을 했더라?”
—죽음은 언제나 함께하는 법.
“……그게, 그런 뜻이었어? 그냥 항상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이런 뜻이 아니고?”
—다르게 생각하면 언어유희로 볼 수 있지.
이걸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멜로디가 유추한 공략이 맞을 것 같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선 2페이즈 어둠 때 누구도 죽어서는 안 됐다. 다른 때보다 부담감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내 탓이오.
—죄송합니다.
—미안, 더는 실수하면 안 되겠다.
멜로디와 카젤을 제외한 세 사람은 최소 한 번 이상 죽은 상황이었다. 자신의 실수를 탓하며 사과하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주하는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을 타이밍이 아닌데도 그랬다.
“하하.”
—뭐야아. 카젤 님, 왜 웃어요. 부끄럽게…….
—너무 해맑게 웃으셔서 민망하군요.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카젤이 웃겠어.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냥 나온 거라. 멜로디 말은 무시하세요.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그저 솔직한 그들이 귀엽게 보였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가 어려워서 은근슬쩍 넘겨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니. 너무 차이가 나서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들었냐, 멜로디? 카젤 님이 얼마나 정의롭고 착한 분인지, 나는 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다 뛴다.
—너보다 내가 먼저 알았으니까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어. 그보다, 그렇게 내기 좋아하는 분이시니 실수할 때마다 페널티 고?
—됐거든?
—개주랑 시불이가 길드 창고에 골드 어떻게 넣었는지 알고 있지?
—그거랑 무슨 상관이냐!
—팀 내기도 똑같이 시작했으면 페널티도 똑같이 해야 형평성에 맞지 않나? 애들한테 말한다?
—미쳤어? 그 자식들이 쫓아다니면서 괴롭힐 거 생각하면 위염 재발할 것 같단 말이야!
—그러니까 해야지. 안 죽으면 되잖아.
—그 공략이 확실한 것도 아닌데?
바나나는 어떻게 해서든 올가미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제가 봐도 이미 약점은 잡힌 상태였다. 꼼짝없이 멜로디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저도 한번 겪어 봤기에 괜히 바나나가 짠하게 느껴졌다.
—해 보면 알지. 확인해서 맞으면 실수할 때마다 만 골씩 걷는다.
—와, 이 독재자!
—물론, 카젤도 똑같이 걷을 거야.
“……뭐 하는 짓이야?”
—아니면 이번에도 노예 계약서? 콜?
“바나나 님, 멜로디 좀 어디 버릴 데 없어요? 꼭 길드에 품어야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수도권 매립지에 보내 버려야 할 것 같은데…….”
—동감이에요. 그런데 하필 저런 놈이 길마에 공대장이라. 에휴.
“답도 없군요.”
주하는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저런 내기를 권유하면 먼저 말한 사람이 걸리는 법인데, 멜로디는 워렌스워드 저택에서도 걸리지 않았고, 여기서도 왠지 무사할 것 같았다. 본인도 잘 알고 있어서 그런지 무척 자신만만했다.
—골드보단 계약서가 낫지?
“아니? 차라리 골드가 낫지. 전에 있던 계약서도 아직 두 장이나 남아 있는데 여기서 더 늘어나면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그냥 내 전용 노예 하면 되지.
—카젤 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멜로디가 양심이 좀 많이 없어요. 이해해 주세요.
“개인주의 님한테 들었어요. 그리고 이미 당하기도 했고.”
—아, 아앗. 그럼 나중에 멜로디 사용 설명서 좀 드릴까요?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설마, 저기서 다른 게 또 있어요?”
—어이쿠! 이런, 생각해 보니까 포장지 뜯고 사용하셨으면 반품 불가입니다. 고갱님.
“산 적도 없습니다만, 판매자님.”
—듀오끼리 알아서 하십시오! 자자! 다시 출발해 봅시다!
냉큼 발을 빼는 바나나를 보며 주하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제게 떠넘기는 솜씨가 마치 이날을 기다렸다는 것인 양 거침없었다. 이런 와중에도 멜로디는 그저 짧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주웠으니까 카젤 주인은 나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왜? 악탑 앞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왔다 갔다 하다가 날 간절하게 쳐다봤잖아. 그래서 내가 주웠는데.
“내가 언제 간절하게 쳐다봤는데?”
—날 집사로 간택해 놓고 이러기야?
“그런 적 없……. 아니, 그나저나 동물 비유는 언제까지 할 거야?”
—너도 하잖아. 내 머리 쓰다듬고, 나랑 닮은 하얀 고양이 탈것도 타고. 예쁘다고 칭찬도 해 놓고선.
“하아…….”
주하는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기에 말려들어 갔다가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던전 공략에 집중하자.
“멜로디 님, 이만 마지막 보스 공략하러 가실까요?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답니다.”
—그럼. 실수하면 계약서 추가한다?
“맘대로 하시든가요.”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멜로디와 레이드 빼고는 다 같이 하고 있지 않던가. 노예 계약서가 늘어나든 말든 지금과 같은 패턴은 계속 유지될 것이다. 저와 평판과 업적 진행도를 맞추기까지 할 정도니까. 저번처럼 의견이 분분할 때나 계약서를 들이밀겠지.
그럼 굳이 멜로디와 힘겨루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골드 굳는 거지, 뭐. 마음의 평온을 얻은 주하는 다시금 보스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둠 패턴이 다 나온 것 같진 않으니까 잘 확인하고, 절대 실수하지 마. 죽으면 알지?
—내가 레이드 때보다 더 집중한다, 진짜.
—알아서 하세요.
멜로디는 바나나를 대충 상대하겠다는 티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저 보스 공략에만 신경 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