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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44화 (44/130)

44화

커다란 새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하강해 리미티드를 물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 상태로 고개를 마구 흔들자 리미티드의 피가 쭉쭉 빠지기 시작했다. 멜로디가 힐을 퍼붓는 사이, 딜러와 탱커가 열심히 공격을 넣고 있었다.

—……물렸을 때 딜 안 들어가네요.

—그런 게 운이라는 거지.

멜로디가 확인 사살을 날리자 이 상황이 마뜩잖은지 리미티드가 불편함을 내비쳤다. 온전히 딜러의 역량으로 순위가 매겨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 왠지 불안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대답했던 바나나와 카젤도 현실을 마주하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제발 나만 걸리지 마라.’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딜러들은 손에 슬그머니 땀이 차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일정 시간이 지나자 새는 물고 있던 리미티드를 뱉어내고 다시 하늘로 떠올랐다. 다음 타깃이 누가 될 것인지 서로 눈치를 보는데, 하강해서 내려온 새가 물어 버린 건 다행히도 탱커인 지구침략이었다.

고개를 마구 흔들며 지구침략을 아그작아그작 씹어 대는 새에게, 딜러들은 미친 듯이 스킬을 욱여넣었다. 다음 하강은 보기 싫다는 의지가 확연하게 느껴지는 공격이었다.

그렇게 딜을 쏟아 내자 피는 10%가 되었고, 보스는 온몸이 붉게 변하며 광폭화 모드로 넘어갔다.

퉷, 소리가 들릴 정도로 입에 물고 있던 지구침략을 바닥으로 거칠게 뱉어낸 보스는 카젤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카젤의 어그로 수치가 탱커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카젤 님! 튀어요!

놀란 지구침략이 카젤에게 외쳤다. 떨어지면서 넉백을 당한 터라 도발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티원 모두가 죽을 위기에 처한 카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카젤의 주변으로 다섯 개의 보석이 생겨나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보석은 곧장 지구침략에게 날아가 화려하게 폭발했다. 카젤에게 향하던 보스의 고개가 돌아간 건 동시였다.

언제 어그로가 튀었냐는 듯 보스는 지구침략에게 달려들었다. 탱커가 다시 단단히 어그로를 잡고 나자 보스는 딜러들의 공격에 맞아 바닥으로 쓰러졌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보스를 잡았다는 알람이 떠올랐다. 그제야 지구침략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하니 딜러에게 어그로를 빼앗길 줄이야. 지구침략에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그로가 왜 튀었지?

“……아, 저도 놀랐어요. 설마 물리면 어그로가 리셋되나? 탱커가 걸린 건 처음 봐서.”

—리셋은 아니고 줄어드는 거 같던데.

—헐…… 진짜?

—탱커 걸리면 안 되겠네.

그동안 딜러랑 힐러가 걸린 것만 봤지, 탱커는 처음이라 이런 효과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나마 바로 어그로 전이 스킬을 썼으니 다행이지, 보스가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큰일 날 뻔했다.

—그런데 그 스킬 어그로 넘기는 거 맞죠? 계속 쓸 수 있는 거예요?

“아뇨, 몹이 절 봐야만 활성화돼요.”

—좋은 스킬인데 발동이 까다롭군요.

지구침략은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긍정했다. 보석술사는 다른 클래스에 비해 독특한 스킬이 많아서 ‘광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효율이 좋은 것도 있고, 왜 이런 게 있나 싶은 것도 있어서 발동이 까다로운 스킬은 딱히 특별하지도 않았다.

—외계인 형, 혹시 모르니까 어그로 세팅으로 해 주세요. 보석술사랑 권투가는 어그로 감소 스킬이 있지만, 흑마법사는 없어서.

리미티드가 조곤조곤 말하자 지구침략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세팅 바꾸고 어그로 관리 빡세게 할게.

—좋아, 이제부터 진짜 내기다!

예외인 1넴을 잡았으니 앞으론 진짜 경쟁이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바나나가 기꺼워하자 지구침략은 못 말리겠다는 듯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방어도는 조금 약하지만, 어그로 하나만큼은 최고인 혈기사조차도 긴장하게 만드는 최상급 딜러들의 무한 경쟁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아! 안 돼! 왜 하필 나야!

—외곽에다 똥 버리고 와.

카젤 팀은 하늘 정원의 마지막 보스인 나무 괴물, ‘분노한 엔트’를 공략하고 있었다. 타임 어택이 걸려 있는 보스라 기믹과 딜 모두 신경 써야 했지만, 팀원들은 타임 어택에 눈길 한 자락 주지 않았다. 내기 때문에 알아서 극딜하고 있으니 그저 부가적인 기믹일 뿐이었다.

하지만 분노한 엔트는 아주 귀찮은 스킬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탱커를 제외한 랜덤 대상에게 씨앗을 하나 심어 놓는데, 그 씨앗은 3초 후에 대상을 중심으로 바닥에 독 장판을 깔았다. 이 장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넓어졌다.

문제는 장판 대미지가 어마어마해서 힐로는 절대 커버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씨앗에 걸린 사람은 본진에서 가장 먼 곳에 가서 터트리고 와야 했다.

그 스킬의 첫 번째 타깃은 다름 아닌 바나나였다.

딜러 세 명의 딜량이 비슷해서 조금이라도 손실이 있으면 바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이라 바나나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만 걸릴 순 없어! 딜러 한 명씩 다 걸리자!

외곽으로 달려가면서 그녀는 당당하게 저주를 걸었다. 그러나 주하는 어림도 없다는 양 그녀에게 말했다.

“그런 말 하는 사람이 더 많이 걸리는 거 알죠?”

—모르시나 본데, 제 저주는 강력하답니다!

“그럼 리미티드 님만 끌고 가 주세요.”

—……카젤 님,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차분하고 단정한 목소리의 리미티드가 카젤이 넘긴 저주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이곳은 서로서로 경계할 수밖에 없는 전쟁 한복판이었다.

—와…… 미터기 1, 2등이 계속 바뀌네.

—카젤, 좀 더 분발해 봐.

“크리가 안 터져. 확률이 42%인데.”

—네 운은 악탑에서만 나쁜 게 아니었네.

“네 버프가 이상한 게 아니고?”

—어차피 크리는 확률이잖아. 누구 탓을 해.

자꾸만 맞는 말로 후려치니 뒤통수가 얼얼했다. 신규 대륙으로 넘어오면서 이전 시즌 아이템에 점감 효과가 붙어서 효과가 줄어들었는데, 그 와중에도 크리티컬이 42%면 상당히 높은 수치라 할 수 있었다. 정령사의 치명타 상승 버프도 받고, 도핑도 모두 치명타로 먹었기에 가능했는데, 그럼에도 역시 확률은 확률이었다.

주하는 열심히 손을 놀리면서도 멜로디를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혹시 사실 적시 명예훼손이라고 아냐? 모르면 고소 한번 당해 볼래?”

나름대로 감정을 가득 담아 말했는데, 멜로디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나붓한 그 소리에 주하는 슬그머니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말할 때는 괜찮지만, 저렇게 웃을 때는 여전히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쓸데없이 열일하는 음성에 아직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 목소리가 확실한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나 모르겠다.

주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딴 건 몰라도 운 좋은 건 있어.”

—뭔데?

파티원들도 궁금했는지 귀를 쫑긋거리는 게 보였다. 주하는 덤덤히,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을 피력했다.

“강화 운은 남들보다 좋아.”

—……정말?

—오? 진짜요?

“네, 제 운이 거기 다 몰빵된 거 같아요.”

—강화 신청 가능한가요?

라나탈에는 재미있게도 대리 강화 시스템이 있다. 파티를 한 채 강화 NPC에게 재료를 올리면 오른쪽 하단에 [파티원에게 강화 신청하기] 버튼이 생긴다. 이것은 흔히 강화 운이 좋은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재미로 사용했다.

주하는 이걸로 벌꿀오소리의 강화를 도와주기도 했다. 무기를 25강에서 30강까지 가는 데 100번 내로 끝냈더니 한동안 벌꿀오소리가 도핑 물약을 조공하며 떠받들었다. 보통 25강에서 26강 가는 데 평균 40번은 시도해야 성공하는 걸 보면 확실히 운이 좋았다.

그날을 떠올리며 주하는 가느스름하게 웃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친절하고 확실한 카젤 대리 강화 상점입니다. 우리 상점은 예약제로만 진행하오니 이 점 미리 양해해 주시고요. 이번에는 특별히 할인가로 여러분을 모시겠습니다. 방어구는 개당 5만, 액세서리는 개당 3만, 무기는 7만 골입니다.”

—옴마야…… 사기꾼이 여기 있었네.

“고갱, 아니, 고객님. 딱 한 번 해 보시면 달리 생각하실 겁니다. 이런 행운은 다시 없을 거라 제가 장담하죠.”

—응, 괜찮아요. 다른 고갱님을 찾아 주세요.

“저런, 그럼 카젤 대리 강화 상점은 이만 닫겠습니다.”

능청스럽게 말하자 다들 장난인 줄 알고 웃고만 말았다. 예상한 반응이라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멜로디만이 진지하게 받아들였나 보다.

—이번에 템 먹으면 나 해 줘.

“응? 진짜?”

—대신 다른 사람들은 해 주면 안 돼.

—뭐야! 네가 그러니까 나도 부탁하고 싶어지잖아!

—이미 나랑 계약하고 닫았어.

저 대신 멜로디가 단칼에 거절하자 바나나가 마구 웃었다. 역시 도전은 길마님이 먼저 해 보는 게 좋겠다며 나중에 결과나 알려 달라고 말했다.

대화하며 열심히 보스를 잡고 있는데, 또다시 씨앗이 생겨났다. 바나나가 씨앗을 버리고 본진에 합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기믹이 꽤 빠른 편이었다.

“아, 이번엔 나네.”

주하는 자신의 디버프창에 생긴 씨앗을 보며 바로 외곽으로 이동했다. 가면서도 도트 스킬과 즉시 시전 스킬을 최대한 사용했다. 대미지는 크진 않았지만, 딜을 쉬지 않고 넣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본진에서 시즈 모드26)로 딜을 넣고 있던 바나나는 제 뒤에서 날아가는 카젤의 스킬을 보며 감탄했다.

—보술이 무빙도 좋네요.

“그럼요, 보술 좋아요. 부캐로 한번 키워 보세요.”

—이런 말이 있죠. 보술을 키워 보라 제안하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라고. 넘어지면 밟아 주는 진정한 친구요.

“진짜 좋아서 추천하는 거예요…….”

—전 그냥 카젤 님 보술 보는 걸로 만족할게요.

26) 한자리에 자리 잡고 강력한 공격을 퍼붓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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