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처음엔 내가 생존기 쓸게. 그다음부터는 힐러 외생기25)랑 번갈아 가면서 쓰자.
지구침략이 순서를 정하자마자 보스가 고개를 뒤로 확 꺾었다. 탱커 버스터의 모션이었다.
지구침략은 제게 날아오는 부리를 보며 대미지 감소 생존기를 사용했다. 그 상태로 부리에 찍혔는데, 이상하게도 피가 전혀 닳지 않았다. 처음과 똑같이 가득 차 있는 피통을 보며 주하는 눈을 깜박였다.
“방금 탱버 맞지 않았어요?”
—맞았죠.
“근데 피가 왜 그대로예요? 버근가?”
버그를 의심하자 주하를 제외한 팀원들 모두가 크게 웃었다. 깍깍거리며 즐거움을 주체하지 못한 바나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하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그야 맞자마자 멜로디가 채웠으니까요.
“네?”
—탱버 같은 스킬은 모션이 커서 예측하기가 쉽잖아요. 그래서 타이밍 맞추면 피가 하나도 닳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건 아는데, 이렇게까지 티가 안 날 수가 있어요?”
—저도 멜로디 말고는 본 적이 없긴 해요.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한가? 피가 얼마나 닳을지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이라니. 반응이 빠른 건 물론, 예측 힐도 자주 받아 봐서 그의 실력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거의 신기에 가까운 기술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새삼 멜로디가 다시 보였다.
—왜? 새삼 반했어?
감탄하며 멜로디를 보고 있는데, 어이없는 질문이 들려와 단숨에 미간을 구겼다. 아까부터 자꾸 묘한 말을 하는데 말이야……. 어디 한번 해 보자는 건가? 오기가 불쑥 치솟았다.
“평소에도 이래?”
—내가 뭘?
“귀엽다질 않나, 반했냐고 묻질 않나. 왜 그렇게 간드러져.”
—간…… 뭐?
“오해할 것 같잖아. 설마…… 너 나 꼬셔?”
—풉!
—아하하하하!!!
일부러 워딩을 강하게 했더니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멜로디는 입을 다물었고, 파티원들은 신난다며 웃어 댔다.
—아, 진짜 미쳤다…….
—와…… 개주랑 시불이가 왜 카젤 님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
드디어 한 방 먹인 기분에 피식 웃고 있는데, 멜로디도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웃긴 모양이었다.
—꼬시는 것 같았어?
“조금?”
—의외로 눈치가 빠르네. 꼬시는 거 맞아. 어때? 넘어올 생각 있어?
“내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
—더 잘해 줘야겠다, 그럼.
“내가 말 안 해 줬나? 나 눈 높아.”
—그럼 더 좋지. 원래 눈은 높을수록 좋은 거야.
어떻게 된 게 한마디를 안 진다. 장난으로 시작한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게 아주 작정한 것 같았다. 쉽게 당할 녀석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니 민망함에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서로의 얼굴에 먹칠하는 걸로도 모자라 이상한 사람으로 찍히게 생겼다. 이미 바나나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흐느끼고 있어서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로미젤과 줄로디는 이어지지 않는 게 좋아.”
—로미젤과 줄……로디……. 그래, 그런 호칭이 있었지. 그런데 왜?
“새드로 끝나잖아. 우린 인연이 아니야.”
—푸핫!
—끕…… 크큽.
웃음 참기에 실패한 바나나와 지구침략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아니, 웃는 게 아니라 거의 울고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채팅창에서도 폭주했다.
[파티] 바나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지구침략: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이크 너머로 누군가가 책상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하기로는 바나나가 아닐까 싶다. 회오리 디버프가 두 개 붙어 있는 걸 봐선 확실했다.
“어, 탱버다. 우리 이제 집중할까요?”
—아……. 나 죽을…… 허윽, 것…… 같아.
“실제로 죽어 가고 있어요. 멜로디가 힐을 안 주네요.”
—계속 맞을 거면 그냥 죽어.
—아흑…… 카젤 님, 진……짜. 어디 계세요. 제가…… 그쪽으로 절이라도, 해야 할…… 흡, 것 같아요.
“절하지 말고, 살아 주시면 안 될까요. 내기가 걸려 있어서…….”
그제야 내기를 떠올렸는지 바나나가 숨을 헐떡이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그 와중에도 사방팔방으로 절을 해대고 나서야 만족하는 걸 보니 바나나의 집념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와, 진짜. 본인이 로미젤과 줄로디를 언급할 줄이야. 나는 로미오 역할이다, 하고 자랑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멜로디가 줄리엣인 걸 인지시켜 주는 거죠.”
—아하하! 그럼 인정!
—그럼 두 사람은 운명이네요. 로미젤 님, 우리 줄로디 잘 부탁드려요.
“음, 그건 좀. 아까 말했잖아요. 우린 만나면 안 되는 인연이라고. 전 해피엔딩이 좋거든요.”
—그건 아니죠! 현대판은 충분히 해피엔딩 가능해요! 각색이라는 좋은 방법이 있잖아요.
“생각해 볼게요, 생각만.”
대놓고 떨떠름해하는 카젤의 대답에 바나나와 지구침략은 한껏 즐거워했다. 그들에게는 멜로디를 놀릴 수 있는 이 시간이 아주 소중한 것처럼 보였다.
저번에 개인주의와 일시불도 그러더니, 멜로디의 빈틈을 찾는 건 무척 드문 일인가 보다. 주하는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웃음 버튼 오프했음! 이제 달려 볼까?
—나나야. 너만 살면 될 것 같아.
—야, 멜로디! 힐 내놔!
지구침략이 걱정스레 말하자 바나나는 당당하게 힐을 요구했다. 멜로디는 힐을 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내기가 걸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짧게 혀를 찼다.
—쯧, 부끄럽지도 않아?
—뭐가? 난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
—딜도 꼴등인데 기믹은 다 맞고 있잖아. 카젤이 널 어떻게 보겠어.
—뭐? 내가 꼴찌라고?
바나나는 부랴부랴 딜 미터기를 확인했다. 1등은 카젤, 2등은 리미티드, 3등이 자신인 것을 본 그녀는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웃다가 이 지경이 되다니! 바나나는 이럴 순 없다며 중얼거리더니 강화 물약을 들이켰다.
—리밋아 너도 물약 먹어! 난 망했어도 너는 할 수 있어!!!
—먹었는데도 지고 있어요.
—먹었다고?
바나나는 딜 미터기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최약체로 손꼽히는 보석술사에게, 1티어인 흑마법사와 권투가가 딜에서 밀린다? 저야 삽질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권투가인 리미티드까지 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물론, 보석술사도 랭커는 다르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보술…… 딜 좋네요?
“손이 바빠서 그렇지, 나쁘지 않아요.”
—워낙 희귀종…… 아니, 희귀 클래스라 만나기 어려워서 몰랐어요.
“보석술사가 정령사 버프랑 상성이 좋아서 딜이 좋은 것도 있어요.”
—버프 없어도 차이는 크게 안 났을걸.
중간에 튀어나온 멜로디가 카젤을 치켜세웠다. 카젤이 멜로디와 다니면서 그의 실력을 인정한 것처럼, 멜로디도 카젤과 함께하면서 실력을 확신한 상태였다.
지난 시즌 자진신고 길드에서 다른 1티어 딜러들을 제치고 카젤이 2, 3위를 유지한 게 운이 아닌 실력이었음을 멜로디가 보증한 것이다. 지금도 파티에서 1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세간에서 알고 있는 일반 보석술사와 랭커들은 확실히 격차가 어마어마했다.
—아, 오랜만에 불타오르네.
—저도요.
흑마법사인 바나나와 권투가인 리미티드는 처음으로 팀원이 아닌 딜러에게 경쟁심을 느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같은 딜러인 카젤이 그 미묘함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주하는 눈을 길게 휘며 느릿하게 말했다.
“말보단 행동이죠.”
—그럼요. 던전에 있는 모든 네임드를 잡아서 가장 많은 1위를 차지한 사람에게 내기 승리 금액 몰빵 어떠세요?
—나나야, 그건 좀 너무 판이 큰데?
—외계인 형, 딜러의 자존심을 우습게 보지 마세요.
—맞아. 잘 모르는 탱커는 얌전히 있어!
—선율아……. 쟤네 좀 말려라.
—글쎄? 카젤이 수락하면 하는 거지.
—다들 내기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니? 어휴.
탱커와 힐러는 모르는 딜러들만의 자존심 대결은 조금씩 불타오르고 있었다. 클래스만 다르지 세 사람 모두 똑같은 최상급 아이템에 강화도 똑같이 전부 30강이었다. 이미 서로의 아이템을 스캔한 딜러들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중 카젤만이 멜로디의 이름이 선율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속으로 감탄했다. 왜 아이디가 멜로디인가 했더니 이름 때문이었구나. 어울리게 잘 지은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 당장 집중해야 할 것은 딜 미터기였다.
“이번 보스는 제외하고 다음 보스부터 체크하죠.”
—오케이! 콜!
—너희 그렇다고 기믹 무시하면 안 된다? 카젤 님도 안 돼요.
—하루 이틀 장사해? 우리가 그런 아마추어 같은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랜덤 기믹에 걸려도 다 본인 운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크! 카젤 님, 역시 말이 잘 통해!
바나나는 만족스러워하며 카젤에게 엄지를 치켜들었고, 카젤도 그에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상대편 팀과의 내기는 당연히 이긴다는 전제하에 딜러들끼리의 또 다른 내기를 진행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멜로디도 흥미로운지 딜러들의 경쟁 심리를 툭툭 건드렸다. 꼴등은 페널티가 하나 더 있어야지 않겠냐며 1등에게 추가로 2만 골드를 더 지급할 것을 제안했다. 모두가 그렇듯 본인이 꼴등을 할 거라 생각지 않은 딜러들은 흔쾌히 수락했다.
지구침략은 그 꼴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지만, 이미 판은 벌어진 후였다.
—일단 1넴부터 잡자, 딜러들.
내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에도 탱커 버스터를 끝낸 멜로디는 다음 기믹에 집중할 것을 알렸다. 다들 알겠다며 대답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공격이 들어왔다.
25) 다른 유저가 걸어 주는 단일 대상 생존기. 외부 생존기라 불리는데, 줄여서 외생기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