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길드는 저렇게 순항하고 있는데, 저는 복불복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라니.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길드 대화창에서 다 보이니 답답함을 감출 수 없었다.
천상검은 제게 요령도 좋고 운도 좋다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래 보이진 않았다. 차라리 멜로디가 넌 요령도 없냐고 했던 말이 사실에 더 근접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죄악의 탑에서 문 선택하는 것도 운이 없구나. 운 좋은 건 아이템 강화할 때만인가?
어쨌든 마지막 보스를 잡아야만 아이템을 먹을 수 있는데 그 앞에서 끝나 버렸으니 이번 파티도 제대로 망쳤다. 중간 보스는 아이템 강화 재료인 아드룬만 드롭할 뿐이었다.
그나마 아드룬이라도 먹은 게 어디냐 싶겠지만, 투자한 시간을 생각하면 오히려 적자였다. 다른 파티는 두 시간 동안 최대 세 번까지 던전을 도니까.
주하는 게임 내에서 지원하는 일정 관리 창을 열었다. 다이어리처럼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라 달력이 나와 있었다. 다음 패치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그동안 최소한 하루에 다섯 번 정도 돌면 하나쯤은 먹을 수 있을까?
“대충 던전 하나당 두 시간 잡으면 열 시간…….”
시간이 지날수록 클리어 타임은 줄어들 테니 조금 빡빡하게 한다면 얼추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아이템 드롭 운도 따라 줘야 하겠지만.
남아 있는 보스를 마지막으로 쳐다본 주하는 미련을 털어 버리고 대도시로 돌아왔다. 때마침 길드 팀도 던전이 끝났는지 휴식 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길드] 온별: 아... 템 안 나오니까 빡친다 ㅠ 좀 쉬자
[길드] 세렌디피티: 이번엔 안 쓰는 아이템이 나오냐ㅠㅠ
[길드] 살금: 궁수 템이 왜 나와 아오...
[길드] 베르메르: 뭐? 궁수 템? ㅅㅂㅠㅠㅠㅠㅠㅠㅠㅠ
[길드] 블랙체리: <링크: 불타는 원혼의 장갑(궁수)>
[길드] 베르메르: 짜샼ㅋㅋㅋㅋㅋ 해 보자는 거냐!
[길드] 블랙체리: ㅋㅋㅋㅋㅋㅋ 내가 뽀개야지
[길드] 베르메르: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처음의 걱정과 다르게 팀원들은 블랙체리를 챙기느라 바빴다. 적응하다 못해 완전히 그들과 동화된 듯한 모습이었다. 이제는 그를 걱정할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주하는 길드 채팅창에 관심을 끄고 파티 찾기 창을 열었다. 유저들이 올려 둔 구인 모집을 쭉 훑고 있는데, 아까부터 접속해 있던 멜로디에게서 귓속말이 날아왔다.
[귓속말] 멜로디: 던전 끝났어?
마을로 돌아온 지 이제 2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빠르기도 하지.
오늘은 일찍 접속했더니 멜로디보다 제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그가 접속했을 땐 이미 하늘 정원에 있었을 때라 귓속말이 오지 않았지만, 이렇게 마을에 오니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귓속말] 카젤: 아니 잠깐 쉬는 타임
[귓속말] 멜로디: 어때? 던전 잘돼 가?
[귓속말] 카젤: 그냥저냥
[귓속말] 멜로디: 템은?
[귓속말] 카젤: 나올 리가 없지ㅋㅋ
못 잡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늘 중으로 아이템을 하나라도 볼 수 있을지 확신도 들지 않았다. 일단 열심히 들이대 봐야지.
[귓속말] 카젤: 근데 넌 던전 안 가?
[귓속말] 멜로디: ㅇㅇ 오늘 다 악탑 돌고 있음
[귓속말] 카젤: 언제 가려고?
[귓속말] 멜로디: 쟤네 악탑 끝나면 갈 거 같은데
그럼 지금 멜로디는 할 게 없다는 건데…….
주하는 친구 창을 열어 멜로디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는 예상했던 대로 울부짖는 평원에 있었다. 이제는 다른 지역에 있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평판을 다 올릴 때까지 저곳에서 벗어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귓속말] 멜로디: 넌 오늘 던전 언제까지 해?
[귓속말] 카젤: 저녁 먹기 전까지는 할 듯
[귓속말] 멜로디: 지금 아침인데?
[귓속말] 카젤: 그래서 오늘은 너랑 못 놀아 줘ㅋㅋㅋ
[귓속말] 멜로디: ㅋ
주하는 멜로디를 상대하다가 문득 본가에 있는 고양이가 떠올랐다. 게임을 하다 보면 자기 좀 보라며 키보드에 드러눕는 녀석 때문에 한참 손을 내어 줘야 했는데, 왠지 멜로디도 그러는 것 같았다.
나 좀 신경 쓰라고, 하던 거 그만하고 나랑 놀아 달라고, 눈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고양이처럼.
진짜 고양이라면 엉덩이라도 쓱 밀겠는데, 멜로디는 어째야 할까? 하여간 신경 쓰이게 하는 데 뭐 있는 녀석이었다.
[귓속말] 카젤: 심심하면 귓말 계속하든가
[귓속말] 멜로디: 놀아 줄 거야?
[귓속말] 카젤: ㅋㅋㅋ ㅇㅇ
[귓속말] 멜로디: 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 멜로디: 걍 낚시나 하고 있을 테니까 끝나면 말해
[귓속말] 카젤: 낚시? 업적이나 평판작 하지 왜?
[귓속말] 멜로디: 너랑 다 맞춰 놔서 안 돼
[귓속말] 카젤: 뭐??
[귓속말] 멜로디: 맞춰 놨으니까 같이 한다고
주하는 파티 찾기 창을 살피다가 멈칫했다. 업적이랑 평판을 같이 맞춰 놨으니까 혼자는 안 하겠다고? 효율 따지는 멜로디가 할 만한 선택은 아니었다.
[귓속말] 카젤: 너... 멜로디 맞아?
[귓속말] 멜로디: 아닐지도?
[귓속말] 카젤: ......
[귓속말] 멜로디: 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 멜로디: 사실 평작은 내가 좀 더 해 놔서 차이가 있긴 한데, 여기서 더 벌어지면 안 돼
[귓속말] 멜로디: 알아서 놀고 있을 테니까 던전 잘 돌고 와ㅋㅋ
멜로디는 그렇게 말하곤 조용히 사라졌다. 정말 낚시하러 간다고? 여덟 시간 내내?
당황한 주하가 멜로디를 붙잡으려다 아까 한 대화를 떠올렸다. 죄악의 탑을 도는 팀원들이 돌아오면 던전 간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낚시도 오래 하진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멜로디는 저녁까지 낚시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 같아 주하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지금까지 평판이나 업적을 계속 같이 했으니 맞추는 거야 어렵진 않지만…….
“왜 그렇게까지 하지?”
그럴 의무도 없고,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괜히 멜로디를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누구한테 빚지는 건 별론데…….
주하는 친구 창에 있는 멜로디의 아이디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여전히 울부짖는 평원에 있는 그는 열심히 낚시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제가 하던 그곳에서 혼자 조용히.
다른 리프 길드원들은 멜로디의 말대로 죄악의 탑을 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덩그러니 남아 있을 그가 눈에 밟혔다. 차라리 혼자라도 던전을 갔으면 좋겠는데 그러진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주하는 던전 파티를 찾으면서도 멜로디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존재가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크기를 키워 가고 있었다.
***
하늘 정원 던전 두 번째 파티 실패.
곧바로 이어진 세 번째 파티도 실패.
심기일전해서 새로 짠 네 번째 파티도 실패.
머피의 법칙은 끈질기게도 주하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탱커가 괜찮으면 힐러가 이상하고, 힐러가 괜찮으면 탱커가 이상하고, 둘 다 괜찮으면 딜러가 문제다. 뫼비우스 띠처럼 반복되는 불운에 주하는 골이 다 아파졌다.
다섯 시간 내내 하늘 정원에서 삽질했더니 입에 단내가 날 지경이다. 그 와중에 길드 팀에선 보석술사 장갑이 나와서 갈았다는 소리나 하니 열심히 해 보려 했던 마음이 찬물을 맞은 것처럼 푸시식 식어 버렸다.
주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마을로 돌아와 사람이 없는 건물 내부에 카젤 캐릭터를 세워 두었다.
‘……정말 쉽지 않네.’
아무리 공개 파티라도, 아무리 영웅 던전이 어렵더라도, 이렇게까지 못 잡는 건 말이 안 됐다. 적어도 50퍼센트 확률로 무난한 팀과 망한 팀을 만나야 했는데 망한 팀만 줄줄이 만날 줄이야.
제가 너무 만만하게 본 건지, 아니면 상황이 그렇게 흘러간 건지. 오늘은 던전 가는 날이 아니니 포기하라고 협박이라도 하는 걸까. 괜히 허탈해져 자꾸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멍하니 10분쯤 흘려보냈을까. 문득 멜로디가 생각나 친구 창을 열었다. 그는 예상과 다르게 자리 비움이 떠 있었다. 지역은 여전히 울부짖는 평원이었다. 설마 낚시하다가 졸고 있는 건가?
다른 리프 길드원들도 보니 모두 울부짖는 평원에 몰려 있었다. 죄악의 탑이 끝나면 던전 간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봐도 평판작이나 채집을 하는 것 같았다.
잠깐 쉬는 걸 수도 있지. 그리 생각하며 의미 없이 가방만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멜로디 님이 파티에 초대했습니다.>
자리 비움을 끝낸 멜로디가 제게 말도 없이 파티 초대를 먼저 날린 것이다. 선뜻 수락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어김없이 귓속말이 날아왔다.
[귓속말] 멜로디: 초대받아
[귓속말] 멜로디: 좋은 말로 할 때
딱 봐도 멜로디의 기분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뭐에 또 기분이 상해서 이러는지, 심란한 건 제가 더 심란한데 말이다.
어쨌든 이대로 두면 무어라 쏘아 댈 게 분명해서 주하는 초대를 수락했다. 그러자 울부짖는 평원에 있던 멜로디가 언제 마을로 돌아왔는지 멀지 않은 곳에 파티원 표시가 떴다.
그도 저를 발견했는지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파티] 멜로디: 여기서 뭐 해?
[파티] 카젤: 조용한 곳에서 쉬고 있지
[파티] 멜로디: 너희 팀은 지금 던전 돌고 있는데?
[파티] 카젤: 음...
언제 그것까지 확인하고 왔대?
주하는 들통난 거짓말에 한숨을 쉬었다. 일부러 숨기긴 했지만, 언젠가 알아챌 날이 올 거라 예상하긴 했다. 다만 이렇게 이르게는 아니었다.
설마하니 멜로디가 저와 길드를 검색하며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우연히 같은 던전을 돌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긴가민가한 것 같은데, 저 혼자 마을에 있는 걸 보고 확신한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파티 초대를 건 것으로 직접 증명해 보였다.
[파티] 멜로디: 하늘 정원에 여섯 명이 들어가 있길래 누군가 혼자 돌고 있겠다 싶었는데 그게 너였어?
[파티] 멜로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