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분명히 해결책은 있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어쩌다가 죄악의 탑 상위 랭킹에 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평판작에 좀 더 투자하면 되고, 영웅 던전을 열심히 돌아서 강화 재료를 모으면 된다.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하면 되니까 굳이 유난 떨 필요는 없었다.
[파티] 카젤: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진짜 괜찮아.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돼ㅋㅋ
[파티] 멜로디: 신경 쓰지 말라고?
[파티] 카젤: 어 그래! 큰일도 아닌데 왜 그래? 그냥 다른 사람 구하면 되는데
[파티] 멜로디: 허? 대놓고 바람피우겠다는 사람은 처음 보네? 방금 나보고 듀오 하자며? 왜 갑자기 말을 바꿔?
[파티] 카젤: 바람이라니;; 무슨 표현을 그렇게 해; 게다가 듀오 하자는 건 이번 주 이야긴데?
[파티] 멜로디: 나랑 하다가 다른 사람이 눈에 찰 것 같아? 얜 왜 안 보이는 데서까지 구르려고 하지? 그냥 계속 나랑 같이 해
[파티] 카젤: 넌 너희 팀 있잖아
[파티] 멜로디: 너도 알다시피 악탑은 인원 상관없잖아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반박하고, 저렇게 말하면 이렇게 반박하고. 이상한 말까지 하면서 제 의견을 고집하는 멜로디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전에는 리프 공대장의 폭군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잔뜩 신경질이 난 ‘멜로디’ 같았다.
이렇게 말하면 당연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따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파티] 멜로디: 그러니까 딴생각하지 말고
[파티] 멜로디: 악탑은 무조건 나랑 돌아
[파티] 카젤: --;;
[파티] 멜로디: 랭킹 1위 말뚝 박아 줄 테니까
어찌 보면 오만하다 볼 수 있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러나 그 오만함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과 같았다. 멜로디는 자신이 한 말을 충분히 지킬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 맛을 이미 맛보았으므로 속절없이 끌릴 수밖에 없었다.
죄악의 탑 랭킹 1위에 말뚝을 박아 준다니. 멜로디가 보여 주는 확신에 주하는 심장이 무섭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파티] 멜로디: 설마 다음 주부터 같이 할 사람 구해 둔 건 아니지?
[파티] 멜로디: 있으면 당장 못 한다고 말해
[파티] 멜로디: 말하기 힘들면 내가 말할 테니까
[파티] 카젤: 없어; 그런 사람
다른 사람이 없다는 말은 듀오를 하겠다는 간접적인 수락이었다.
멜로디는 카젤의 상황이 영 마뜩잖았지만, 대답은 만족스러웠는지 이 이상 몰아붙이지 않았다. 다만 잔소리는 여전했다.
[파티] 멜로디: 내가 옆에 있는데 넌 요령도 없냐
[파티] 카젤: 요령이 없는 게 아니라 현실을 잘 아는 거지;
[파티] 멜로디: 퍽이나
[파티] 카젤: ㅋㅋ
주하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혼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기분은 좋은지 모르겠다. 멜로디도 제가 웃는 게 어이가 없었는지 감정 표현을 사용해 제 기분을 표현했다.
<멜로디가 당신을 보며 미간을 찌푸립니다.>
[파티] 카젤: 이마에 주름 생긴다
[파티] 멜로디: 주름 생긴다고 바랠 얼굴이 아니라
[파티] 카젤: ??? 얼굴에 자신 있나 보다?
[파티] 멜로디: 너만큼은 아닙니다. 미남 카젤님ㅋ
[파티] 카젤: ㅋㅋㅋㅋ;;;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냐
[파티] 멜로디: 평생?
[파티] 카젤: 오글거리니까 하지 마 --^
[파티] 멜로디: 왜? 실제로 잘생겼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
주하는 핸드폰을 들어 올려 자기 얼굴을 비춰 보았다. 잘생겼다는 말보다는 시원시원하게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어떤 선배는 제 얼굴을 이렇게 평가했다.
“뭐 하나 걸리적거리는 게 없어서 볼 때마다 속이 시원하다!”
대체 볼 때마다 속이 시원한 얼굴은 뭘까.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을 때, 선배는 묘하게 웃으며 “그런 게 있어”라고만 했다. 어쨌든 나쁜 뜻은 아닌 것 같아서 그러려니 넘겼다.
[파티] 카젤: 들어 본 적 없는데
[파티] 멜로디: 그래? 다들 보는 눈이 없나?
[파티] 카젤: ㅋㅋ?? 나 본 적 있어?
[파티] 멜로디: 그렇게 꿀잠 자는데 당연히 잘생겼겠지
[파티] 카젤: ......하
시간차 공격하기 있냐. 진지하게 핸드폰으로 얼굴을 살피던 제가 바보지. 실제로 저를 아는 사람인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제대로 농락당해 버렸다.
[파티] 카젤: 헛소리 그만하고 악탑이나 가자
[파티] 멜로디: 평판 얼마 안 남았을 텐데 이것부터 하지
[파티] 카젤: 내일부터 영던 다녀야 해서 지금 시간 날 때 가는 게 좋아
[파티] 멜로디: 영던 간다고?
[파티] 카젤: ㅇㅇ
[파티] 멜로디: ...그래?
멜로디의 대답엔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는 한참 침묵하더니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파티] 멜로디: ㅇㅋ 그럼 악탑부터 ㄱㄱ
주하는 살짝 묘한 느낌을 받았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어서 가볍게 흘려 넘겼다. 그것보다는 죄악의 탑을 원하는 층까지 도달하는 게 급선무였다.
[파티] 카젤: ㄱㄱ 오늘은 네가 문 다 열어
[파티] 멜로디: 말은 바로 하자
[파티] 멜로디: 초반 빼고 너한테 문 맡긴 적 없어ㅋ 앞으로도 그럴 거고 ^^
오늘도 멜로디는 팩트로 카젤의 입을 막아 버렸다. 주하는 양심상 아니라고 말도 못 하고 미약하게 반항했다.
[파티] 카젤: ...ㅎㅎㅗ
[파티] 멜로디: ㅋㅋㅋㅋㅋㅋ
누누이 말하지만, 라나탈은 운빨 망겜이었다.
***
[길드] 온별: 야 천상아 벌꿀님 오늘 몇 시에 오셔?
[길드] 천상검: 저녁에 온댔는데 왜?
[길드] 온별: 그럼 우리 먼저 영던 돌고 있겠음
[길드] 천상검: ㅇㅇ
[길드] 세렌디피티: 어디부터 가지?
[길드] 온별: 하늘 정원부터 가자
[길드] 세렌디피티: ㅇㅋ
[길드] 블랙체리: 드디어 영던 간다ㅋㅋ
[길드] 문정: ㄱㄱ
자진신고 팀원 중 세렌디피티 팀이 먼저 영웅 던전을 돌기로 했다. 겨우 파티를 찾아 이제 출발하려던 주하는 길드원들의 대화를 보며 중얼거렸다.
“같은 던전 가네.”
다른 던전도 많이 있었지만, 지금 주하에게 던전을 골라 갈 여유 따위는 없었다. 딜러를 구하는 파티 어느 곳이든 신청을 넣어야 했으므로. 모든 영웅 던전을 개방해 놔서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주하가 속한 팀이 던전에 들어갔을 때, 자진신고의 세렌디피티 팀도 동시에 하늘 정원 던전에 진입했다.
[길드] 세렌디피티: 얼마나 아플지 기대된다 +_+
[길드] 살금: 하여튼 탱 변1태ㅋㅋㅋ
[길드] 온별: 똑바로 안 하면 힐 안 준다
[길드] 세렌디피티: ㅡㅜ
[길드] 천상검: ㅋㅋㅋㅋㅋ 야 보챗에서 영상 틀어 봐
[길드] 세렌디피티: ㅇㅋ 내 시점으로 틈
[길드] 베르메르: 노가다하면서 너희 죽는 거나 구경해야겠닼ㅋ
[길드] 블랙체리: ㅋㅋㅋ 다들 보챗 ㄱㄱ
다들 음성 대화방으로 몰려갔는지 이후 길드 대화창은 조용해졌다. 주하도 들어가서 영상을 볼까 하다가 그냥 지금 파티에 집중하기로 했다.
첫 번째 보스 몹으로 가는 길목은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한번 전멸하고 나서는 다들 바짝 긴장한 채 플레이했기 때문이다. 어제처럼 탱커가 무빙을 안 한다거나, 힐러가 힐 메커니즘을 모른다든가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딜러가 문제였다. 탱커와 힐러가 버텨 주는 만큼 딜을 뽑아야 하는데, 카젤을 제외한 두 명의 딜러가 1인분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딜러들은 아이템 강화 수치도 높지 않고, 딜 사이클도 완벽하게 맞추지 못하니 차이가 극심했다. 나쁜 의미로 카젤이 혼자 딜 미터기를 뚫는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아무리 카젤이 혼자 캐리를 한다고 해도 한계는 존재했다. 신규 확장팩의 영웅 던전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었으니까. 하필 이번 시즌엔 난도가 높게 나와서 더 문제였다.
그나마 세 번째 보스까지 꾸역꾸역 잡았지만, 마지막 보스는 잡지 못하고 결국 파티는 해산되었다.
카젤이 두 시간가량 던전의 마지막 보스도 잡지 못하는 동안 길드의 세렌디피티 파티는 쭉쭉 진도가 나가고 있었다.
[길드] 천상검: 아 영상 재미없어서 난 나옴ㅋㅋㅋ
[길드] 베르메르: 나두ㅠ 처음에나 죽지 두 번째부터는 안 죽어서 재미없닼ㅋㅋㅋ
[길드] 온별: ㅋㅋㅋ 영던 어렵다더니 ㅈㄴ 별거 없네
[길드] 세렌디피티: 좀만 적응하면 40분 이내에 한 탐 돌 것 같은데?
[길드] 살금: ㅅㅂ 딜러 템이 나와야 40분 찍지
[길드] 세렌디피티: ㅋㅋㅋㅋ 내 거만 나와서 배 아프쥬?
[길드] 세렌디피티: <링크: 불타는 망자의 장갑(가디언)>
[길드] 살금: 비틱 ㅗㅗㅗㅗㅗㅗ
[길드] 온별: 쥬길까 저거
[길드] 세렌디피티: 헉ㅠㅠ 잘못했어요 힐느님...
[길드] 블랙체리: ㅋㅋㅋㅋㅋ
다들 즐거운지 길드 대화창은 시끌벅적했다.
주하는 파티원들이 다 빠져나간 하늘 정원 던전에 남아 잡지 못한 마지막 보스 앞에 앉아 있었다. 기믹 적응의 문제였다면 조금 더 도전했겠지만, 안타깝게도 타임 어택이 걸린 보스였다.
1인분도 하지 못하는 두 명의 딜러를 데리고는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다. 탱커와 힐러가 마지막까지 버티는 동안 보스의 피는 40% 이하로 내려가지 않을 정도였다.
혹시 몰라 세 번을 더 해 봤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탱커와 힐러가 먼저 포기를 외쳤다. 주하도 타임 어택까지는 어찌할 수 없어서 차마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
대신 탱커와 힐러에게 개인적으로 영던 파티를 같이 다니지 않겠냐고 물었는데, 그들은 이미 파티가 있고, 팀원들이 없는 동안 한번 살펴보러 왔을 뿐이라고 했다. 그렇게 영입도 시원하게 물 건너갔다.
이래저래 아쉬움만 남아서 파티가 해산한 뒤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역시 명불허전 막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