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이 정도는 그래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에 그러려니 하는데, 이번 확장팩에 새로 나온 영웅 던전은 전과 달리 난도가 급격하게 오른 상태라 걱정이었다.
일반 던전에서는 메즈22)를 하지 않아도 몹을 몰아서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웅 던전은 일반 몬스터도 네임드급으로 올라서 메즈가 거의 필수였다. 보텍스 문의 CC기는 먹히지도 않는 녀석들이었다.
그렇게 두 마리를 묶어 두고 남은 두 마리를 탱커가 잡고 있는데도 버티질 못하니 개인 역량이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가감 없이 말하자면 지금 파티의 탱커와 힐러는 필요 역량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다시 던전에 진입한 파티원들은 버프와 도핑을 하고 전멸했던 곳까지 달려갔다. 이번에도 두 마리는 메즈하고 탱커가 남은 몬스터를 탱킹했다.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피를 어찌어찌 채우고 드디어 남은 무리를 잡을 수 있었다.
[파티] 라잌댓: 와 진짜... 겁나 아프네;
[파티] 휘핑크리미: 힐이 못 따라감 ㅠㅠ
[파티] 라잌댓: 작은 힐 말고 큰 힐도 써 주세요
[파티] 휘핑크리미: 시전 땡기는 동안 죽을 거 같아서 못 해요;;
[파티] 라잌댓: ㅡㅡ;;; 흠 ㄹㅇ 빡세네
던전 자체가 난도가 높은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전멸할 정도로 힘들진 않다.
탱커는 바닥 피하면서 움직이고, 힐러는 작은 힐로 쭉 하다가 가속 버프 터지면 그때 큰 힐을 시전하면 된다. 정 안 되면 중간에 대미지 감소 생존기 하나 넣으면 되고. 아마 가속 버프가 터지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건지, 원래 스타일이 그런 건지.
주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앞에는 드디어 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돌고 있는 영웅 던전은 하늘 정원으로 첫 번째 보스는 커다란 새였다. 일반에서는 랜덤으로 바람 폭풍을 날리고 탱커 버스터23)를 사용하는데, 생각보다 대미지가 약해서 크게 문제 되는 기믹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은 영웅 던전이다.
주하는 공략을 끝낸 사람들이 올린 팁을 미리 살펴본 뒤였다. 라나탈에는 폐인급 유저들이 많아서 영웅 던전의 정보는 어느 정도 풀려 있는 상태였다. 스트리머들도 높은 조회 수를 위해 던전 관련 영상을 빠르게 업데이트하니 조금만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파티] 카젤: 보스 스킬 설명해 드릴게요.
[파티] 라잌댓: 앗! 그건 좀...
[파티] 카젤: 네?
[파티] 라잌댓: 저 일부러 정보 안 보고 왔는데
[파티] 휘핑크리미: 저도 안 보고 왔어요ㅎ 첫 던전이라 공략하는 기분 느끼고 싶어서
주하는 눈을 깜박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공략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는데, 초를 칠 순 없지 않은가. 던전을 빨리 클리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트라이하는 즐거움도 중요하다. 당연히 존중해 줘야 했다.
다만 다른 딜러들은 영 마뜩잖은지 짧게 신음을 흘렸다.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이미 40분을 소모했으니 빨리 깨고 싶어 하는 낌새였다.
그래도 딜러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파티] 민초단회장: 빨리 시작하죠 그럼
[파티] 라잌댓: ㄱㄱ
그렇게 준비해 둔 공략 설명은 뒤로하고 파티는 어떤 정보도 없이 보스에게 달려들었다.
주하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대충 견적을 내놨기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공략법을 알려 줘도 마지막 보스까지 갈까 말까 한데, 아무것도 모른 채로 시작하니 시간을 엄청나게 잡아먹을 터였다.
별다른 기대 없이 보스에게 달려가면서 주하는 반 포기 상태로 화면을 응시했다.
익숙한 막공의 향기를 느끼며, 스킬을 누를 뿐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하늘 정원 영웅 던전은 첫 번째 보스도 잡지 못하고 파티가 해산됐다. 딜러들은 문제가 없었지만, 역시나 탱커와 힐러가 기믹을 넘기지 못한 것이다.
보스가 사용하는 바람 폭풍은 한 대 맞는 순간 디버프가 생기고, 연속으로 맞으면 대미지가 중첩된다. 3중첩이 되면 힐러의 힐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피가 빠져서 다들 움직임에 신경 썼다. 그렇게 딜러들은 바람 폭풍을 확실하게 피했지만, 힐을 시전해야 하는 힐러는 한두 대씩 맞았다. 거기서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서야 드디어 힐러가 바람 폭풍에 적응했다. 다시 진도가 나가려나 싶었던 그때, 다음 기믹인 탱커 버스터가 발목을 잡았다.
탱커에게 강한 일격을 날리는 스킬은 무조건 생존기를 사용해야만 살 수 있었는데, 쿨타임이 없어서 랜덤으로 튀어나왔다. 이는 탱커와 힐러의 생존기를 번갈아 가며 사용해서 넘겨야 했다. 하지만 힐러가 전혀 따라오지 못하고 계속 탱커를 눕히니 기분이 상한 탱커가 먼저 파티를 탈퇴한 것이다.
전멸만 열다섯 번. 중간에 수리 타임도 가졌고 공략법도 공유해서 진행했지만, 첫 번째 보스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두 시간 가까이 던전에서 굴렀더니 다들 지쳐서 인사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주하도 몰려오는 피로에 맥이 풀렸다.
다시 조용한 호숫가로 달려간 그는 낚싯대를 드리우며 생각에 잠겼다.
영웅 던전부터는 아이템을 먹어야 하는데, 이런 식이면 다음 3.1 패치까지 최소 요구치를 맞추지 못할 것 같았다. 3.1 패치엔 10인 토벌전이 세 개가 나오는데, 이때부터 레이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웅 던전에서 방어구를 맞추고, 토벌전에서 무기와 액세서리를 맞춰야 3.2 패치에서 나오는 레이드에 갈 수 있었다.
10인 토벌전이 나오는 3.1 패치까지는 대략 한 달이 남아 있는데 과연 그 안에 방어구를 다 먹을 수 있을까?
방어구만 여덟 갠데 특정 던전에서 랜덤으로 떨어져서 운이 나쁘면 아무리 돌아도 맞출 수 없었다. 지금까지 카젤의 아이템 운을 떠올려 보면 딱히 좋다고 볼 수 없어서 문제가 컸다. 던전을 빨리, 많이 도는 것만이 답이었다.
막공의 한계를 느끼고 나니 차라리 영웅 고정 팀을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던전을 돌다가 괜찮은 사람들 있으면 물어보고 시간을 맞춰서 돌면 될 것 같다. 그러다 한두 명씩 빠지면 부족한 클래스를 다시 모으고, 또 던전을 돌고 그러면…….
“…….”
주하는 호수를 말없이 응시하다가 급 현타가 몰려와 책상 위에 드러누웠다. 그사이 흔들리던 찌가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며 낚시에 실패했다는 안내가 떴다.
눈을 깜박이며 별 의미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책상 위에 있는 과자와 음료 캔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번 확장팩은 열심히 해 보겠다고 준비했던 것들이었다.
지난 시즌 레이드 퍼클에 실패하고, 이번엔 무조건 리프 길드를 이기겠다고 다짐했는데. 생각보다 목표로 향하는 길이 녹록지 않았다. 경쟁 상대인 리프 길드원과는 친해지고, 정작 제 원래 팀원들이랑은 멀어지는 이상한 상황만 만들어지다니.
지금까지 멜로디와 리프 길드원들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영웅 던전까지 그럴 순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딜러가 곧 돌아올 테고, 본인들 아이템을 맞춰야 하는데 저까지 신경 써 달라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친해진 것과 별개라는 건 누구보다 제가 잘 알았다.
과자와 캔을 톡톡 두드리며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게임에서 누군가가 저를 부르고 있었다. 귓속말 알람이 시끄럽게 울리는 걸 보니 99.9퍼센트의 확률로 멜로디였다.
슬쩍 고개를 들어 화면을 보자 역시나 멜로디가 등장했다.
[귓속말] 멜로디: 나 왔어
[귓속말] 멜로디: 뭐 해?
[귓속말] 멜로디: 평판작은 안 하는 거 같은데
[귓속말] 멜로디: ??
[귓속말] 멜로디: 자리 비움?
멜로디를 보자 자꾸만 그가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야기하라고 했던 그 말이.
“……참 속도 없다.”
가시밭길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아무리 저라도 덤덤할 수는 없었다.
뭐…… 파티 짜다 보면 언젠가 안정권에 들어서긴 하겠지. 지금 당장 암담하다고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기는 싫었다.
허리를 세워 몸을 일으킨 주하는 다시 키보드를 붙잡았다.
[귓속말] 카젤: 장실 다녀옴
그러자 이번에도 멜로디의 빠른 파티 초대가 날아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초대를 수락하며 가방을 정리하고 있자 멜로디가 물었다.
[파티] 멜로디: 그 구석에서 뭐 해?
[파티] 카젤: 낚시
[파티] 멜로디: 낚시? 전문 기술 요리사야?
[파티] 카젤: ㅇㅇ
[파티] 멜로디: ㅋㅋ 완전 맞춤형 딜러였네
[파티] 카젤: 몬 소리야?
[파티] 멜로디: 재료 줄 테니까 나도 요리 좀 만들어 줘. 거의 다 써 가서 슬슬 만들어야 하거든
[파티] 카젤: 길드에 요리사 없어?
[파티] 멜로디: ㅇㅇ 요즘 접속 못 하는 사람이 요리사라
라나탈의 전문 기술은 변경이 불가능할 정도로 전문적이다. 제작 도안을 획득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 처음 선택한 전문 기술을 끝까지 유지한다. 게다가 제작할 때도 전용 스킬을 사용해야 해서 클래스 주인이 아닌 한 제작할 수가 없었다.
[파티] 카젤: ㅇㅇ 필요할 때 말해
[파티] 멜로디: 혹시 이번 확팩 신규 도안 배웠어?
[파티] 카젤: 평판 한 단계 더 올리면 배우긴 하는데 재료가 빡세서 효율은 별로일걸? 그냥 전 시즌 요리 만들면 돼. 효과가 비슷해서
[파티] 멜로디: 전 시즌 최상급 요리?
[파티] 카젤: ㅇㅇ
[파티] 멜로디: ㅇㅋ 그럼 재료 다 있음. 지금 가능?
[파티] 카젤: 가능
[파티] 멜로디: 아 애들한테 말해도 돼? 너 요리사라고
[파티] 카젤: ㅇㅇ 상관없어
[파티] 멜로디: 거기서 낚시하고 있어. 재료 들고 간다
22) 상대 플레이어나 몹들을 행동 불가 상태로 빠트리는 CC기의 일종. 유지 시간이 긴 게 특징이다.
23) 탱커에게 강한 일격을 주는 스킬. 보통 생존기를 사용해야 넘어갈 수 있다. 줄여서 탱버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