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딜러 줍는 힐러-35화 (35/130)

35화

파티 구성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사이에 물속으로 들어간 찌를 인지하지 못하고 놓치고 말았다. 낚시에 실패한 카젤은 대기 모드로 돌아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주하도 키보드에서 손을 놓은 채 눈만 느리게 깜박이고 있었다.

[길드] 천상검: ㅋㅋㅋㅋㅋ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까 오늘부터 미리 악탑 돌아 놔라

[길드] 베르메르: 악탑은 지난주처럼 할 거지?

[길드] 천상검: ㅇㅇ 이번 주까지 듀오로 하고 다음 주엔 5/5로 가보자. 영웅 던전 팀 그대로 가면 될 것 같은데

[길드] 온별: ㅇㅋ

[길드] 살금: 야 체리 이번 주 악탑은 무조건 3위 안에 든다 ㅇㅋ?

[길드] 블랙체리: ㅇㅋ

[길드] 천상검: 너네 3위 하고 나랑 벌꿀님은 1위 ^^

[길드] 살금: ㅅㅂ... 너 지난주엔 거의 황금 게이트만 나왔다며! 벌꿀님 손이 그렇게 금손이었냐;?

[길드] 천상검: ㅇㅇ 장난 아님ㅋㅋㅋ

[길드] 블랙체리: 이번엔 내 손이 금손일 예정

[길드] 살금: 넌 문 건들지 마-_- 양심 챙겨

[길드] 블랙체리: 왜;; 형ㅠㅠ 이번엔 날 좀 믿어 봐

[길드] 살금: 응 안 돼

영웅 던전으로도 모자라 죄악의 탑까지 팀원이 모두 결정 나 있었다. 주하는 빠르게 올라가는 길드 대화창을 응시하다가 길게 숨을 뱉어 냈다.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나는 그냥 둬도 알아서 잘하니까 제외한 건가? 아니면 계속 블랙체리와 함께했더니 빼기 애매했던 걸까? 무슨 이유에서든 일단 제게 상황 설명은 해 줘야 했을 텐데 아무런 언질도 없이 다 정해 버리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설마 ‘레이드 팀원끼리 영웅 던전을 간다’라는 암묵적인 약속이 바뀐 건 아닐 테고.

주하는 고민하다가 불현듯 팀원들과 제 사이를 떠올렸다. 벌꿀오소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데면데면하다고 해야 할까? 전부터 그런 낌새는 있었지만, 확장팩이 열리고 나서는 완전히 겉돌고 있었다.

길드에서 인사하는 것도, 대화하는 것도, 벌꿀오소리 말고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기껏해야 게임 관련 질문에 대답하는 것 정도?

그러고 보니 핵 관련 문제가 생겼을 때도 길드에서 누구 하나 제게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까지 제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오히려 궁금해졌다.

대체 뭘 어쩌고 싶은지.

반짝이는 호수를 한참 응시하던 주하는 다시 길드 채팅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벌꿀오소리의 부재로 천상검만 평판 작업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죄악의 탑을 돌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끊이지 않는 대화에 마우스로 길드 창을 쭉 올렸는데, 영웅 던전 파티 구성 내용은 사라지고 없었다.

의자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이마를 문지르며 고민했다. 천상검에게 물어볼까 말까. 대답을 들어도, 듣지 않아도 상황이 바뀔 것 같진 않았다. 그렇지만 앞일을 위해 확답은 받아야만 했다.

천상검에게 귓속말하기 위해 대화창을 띄웠다. 뭐부터 물어야 할지 생각하다가 문득, 멜로디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일 생기면 말하라고 했던 그 말이.

“…….”

정말 그 녀석 말대로 밸도 없구나, 나.

눈을 꾹 감은 주하는 꽉 막힌 속을 한숨으로 달래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곤 자리 비움을 해제하고 천상검에게 말을 걸었다.

[귓속말] 카젤: 천상님

[귓속말] 천상검: 네?

[귓속말] 카젤: 저희 영웅 던전 파티 구성 끝났나요?

[귓속말] 천상검: 아

[귓속말] 천상검: 네 끝났어요

[귓속말] 카젤: 저는 어디예요?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나왔던 말이라 부러 모른 척 물었다. 그러자 천상검은 침묵했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할지 고르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그는 빨리 대답했다.

[귓속말] 천상검: 죄송한데 카젤님이 체리한테 자리 좀 양보해 줘야 할 것 같아요

[귓속말] 카젤: 양보요?

[귓속말] 천상검: 지금껏 같이 했던 게 있어서 갑자기 알아서 하라고 하기도 그렇고...

[귓속말] 천상검: 카젤님은 저희보다 빨리 던전 게이지 올릴 정도로 요령도 좋고 운도 좋으니까 영웅 던전까지만 따로 합시다

천상검이 하는 말은 궤변이었다. 굳이 한 명을 제외하면서까지 팀을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번갈아 가면서 돌면 될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레이드 팀에 제 자리가 없다든지 하는 그런…….

그런데 그렇다고 보기엔 마지막 말이 걸렸다. ‘던전까지만’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다는 것이.

[귓속말] 카젤: 영웅 던전까지요?

[귓속말] 천상검: 네

[귓속말] 카젤: 그럼 레이드는

[귓속말] 천상검: 당연히 레이드는 같이 해야죠

[귓속말] 천상검: 체리는 아이템까지만 맞춰 주려고요. 그럼 다른 레이드 팀에 가기 수월하겠죠

정말로 그저 블랙체리가 안쓰러워서 챙겨 주려는 것뿐인가?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천상검 본인이 레이드는 저와 한다고 못을 박았으니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최악까지 생각했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공사 구분하는 것처럼 레이드는 레이드, 친목은 친목. 그렇게 나눠야 할 것 같다. 어차피 자진신고 길드에 온 이유도 레이드 때문이었으니 전과 다를 바 없다.

[귓속말] 천상검: 아 그리고

[귓속말] 천상검: 악탑도 따로 도셔야 해요

[귓속말] 천상검: 이건 체리랑 계속 돌기로 약속해서ㅎ

[귓속말] 천상검: 레이드 콘텐츠는 아니니까 괜찮죠?

‘레이드 콘텐츠가 아니다’라……. 누가 봐도 죄악의 탑은 레이드 콘텐츠다. 평판 점수에 아이템 강화 재료를 주는 죄악의 탑 보상은 레이드와 직결되는 콘텐츠였으니까.

팀원들이 좋은 보상을 받을수록 레이드의 난도는 낮아지기 때문에 특히나 퍼클을 노리는 팀은 필수라고 봐야 했다.

천상검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죄악의 탑을 친목으로 구분하겠다고 했다. 그들에겐 그런 콘텐츠가 된 것이다. 저는 그의 말대로 알아서 잘하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말이다. 아마도 멜로디와 1위를 한 게 영향이 가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천상검은, 아니, 자진신고 길드는 카젤이 그저 레이드 공략을 위한 비즈니스적 관계로 남길 바랐다. 친하진 않지만, 레이드에선 꼭 필요하니 이해득실에 맞춰 같이 한다는 느낌으로.

그래, 괜히 눈치 보느니 차라리 이런 관계가 나을지도 모르지.

가장 중요한 레이드는 문제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금은 홀가분해진 주하는 낚싯대를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웅 던전도 알아서 돌아야 하니 낚시에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었다.

[길드] 베르메르: 아 미1친ㅋㅋㅋㅋ

[길드] 온별: 사람들이 다 오해하고 있는데 솔직히 우리들 중에 가장 질 나쁜 사람이 천상검이야

[길드] 살금: ㅋㅋㅋㅋㅋㅋ진짜 또라이 같음 저ㅅㄲ

[길드] 블랙체리: 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천상검: ㅋㅋㅋㅋ 닥1쳐

무슨 일로 저렇게 즐겁게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주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들만 아는 이야기를 하며 노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길드 대화창을 닫고 파티 찾기 창을 활성화하자 리스트가 주르륵 떠올랐다. 모든 영웅 던전을 열어 놨으니, 딜러 구하는 곳만 찾으면 된다. 막공이야 이미 숱하게 다녀 봐서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이 걸리더라도 보스까지 잘 잡도록 노력하면 될 터였다.

멜로디와 리프 길드원들이 같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이미 영웅 던전은 길드원이랑 같이 다니겠다고 거절하기도 했고, 무슨 일 있을 때마다 그들을 찾는다면 민폐 끼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었다. 멜로디가 아무리 본인에게 말하라고 했다지만, 그래도 정도는 지켜야지.

그나마 이번 주 죄악의 탑은 멜로디와 같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어제까지는 혼자였는데, 설마 그사이에 팀을 짠 건 아니겠지?

처음부터 죄악의 탑에 제 자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면 멜로디를 냉큼 잡았을 텐데……. 오면 한번 물어봐야겠다. 그래도 이젠 길드원 눈치 볼 필요가 없어졌으니 이거 하나만큼은 만족스러웠다.

고민을 끝마친 주하의 검은 눈동자가 파티 찾기 창의 리스트를 쭉 훑기 시작했다. 대부분 탱커나 힐러, 아니면 특정 클래스를 구하는 것들뿐이었다. 딜러를 구한다는 파티는 금방 사라졌고, 또다시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다 운 좋게 파티에 합류하게 되자 주하는 곧장 던전으로 향했다.

드디어 첫 영웅 던전이었다.

***

[파티] 휘핑크리미: ㅠㅠㅠㅠ 죄송합니다

[파티] 휘핑크리미: 어흑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파티] 라잌댓: ㅡㅡ;; 다시 가 보죠

온통 회색으로 변한 화면에 다섯 명의 파티원들은 유령으로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주하는 자동 달리기를 설정해 두고 휘핑크리미와 라잌댓의 아이템을 살펴보았다.

둘 다 <불안정한 차원 세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전 시즌 레이드 아이템으로 최상급은 아니지만, 교복으로 통하는 무난한 아이템이었다. 문제는 강화 단계가 높지 않다는 건데, 가장 높은 강화가 19였다. 최고 단계가 30강임을 감안하면 이들은 적당히 즐기는 평범한 유저들이었다.

파티를 꾸리고 영웅 던전에 들어간 지 30분이 지난 지금. 첫 번째 보스로 가는 길목에서 벌써 다섯 번째 전멸을 보고 있었다.

아이템 강화 수치가 높지 않은 만큼 최대한 공격을 맞지 않아야 하는데, 탱커인 라잌댓은 피할 수 있는 바닥 장판을 계속 맞고 있었고, 힐러인 휘핑크리미는 급격하게 떨어지는 피를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탱커도 탱커지만 힐러도 스킬을 잘못 운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딜러인 제가 이것저것 지적하는 건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기에 주하는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