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상황을 보아하니 최소 3∼5명에게 쫓기고 있는 것 같았다. 상대가 한 명이나 두 명이면 승산이 있었을 테지만, 다수는 피하는 것만이 답이었다. 제아무리 랭킹 1위의 정령사라고 해도 다 죽일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싸움이 일어난 건 그렇다 치고, 지역 채팅창에서 입방정 떨어 대는 건 대체 무슨 매너지. 전형적인 무개념들의 썩은 인성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주하는 아이템과 스킬을 PVP용으로 교체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세 번째 포인트로 달려가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아이콘이 보였다. 아이디는 아직 흐릿하지만, 아이디 뒤에 있는 친구 아이콘은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쫓아오는 다수의 유저까지.
역시 예상한 대로 멜로디는 1:5의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피가 줄었다 차올랐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게 불안해 보여 괜스레 초조해졌다.
주하는 주변을 둘러보다 멜로디가 도망가는 방향에 있는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그와 대놓고 합류하는 것보다는 몰래 뒤를 치는 게 효율적이었다.
살짝 밖을 내다보자 멜로디와 다섯 명의 추격자들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주하는 각종 도핑 음식을 먹고 무기를 꺼내 들었다.
드디어 멜로디가 바위를 스쳐 지나가고, 그 뒤를 쫓는 다섯 명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주하는 가장 후미에 있는 힐판매중에게 보석 체인을 걸고 쭉 잡아당겼다. 그는 이동 속도가 느리고 방어력이 약한 힐러, 사제 클래스였다.
녀석을 끌고 온 주하는 각종 도트 스킬을 넣어 두고 침묵을 걸었다. 도망가려는 낌새가 보여 다리를 묶자 움찔거리며 멈춰 섰다.
[일반] 힐판매중: ??
갑자기 나타난 제가 공격을 해 오니 의아한 모양이다. 하지만 주하는 가볍게 무시하고 침묵이 끝날 때쯤 기절을 걸었다. 해롱거리며 행동 불가 상태가 된 힐판매중에게 주하는 대미지가 좋은 단일 스킬을 사용했다. 운 좋게 크리티컬이 터져 피가 한 번에 쑥 빠져버렸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녀석들은 멜로디를 쫓던 걸 포기하고 제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별로네.”
주하는 바위를 끼고 반대편으로 돌며 힐판매중에게 보석 체인을 걸어 잡아당겼다. 파티원들에게서 멀어진 힐판매중이 벗어나려 바둥거렸지만, 보석 체인에 걸린 녀석은 질질 끌려오기만 할 뿐이었다.
드디어 자유를 얻은 멜로디가 제게 달려오며 파티 초대를 걸었다. 창이 뜨자마자 확인을 누르니 그가 인사하며 버프를 걸어 주었다.
[파티] 멜로디: 땡큐
[파티] 카젤: ㅇㅇ
든든하게 버프를 받은 주하는 화면을 돌려 바위 너머를 확인했다. 놈들의 위치를 보니 곧 바위를 꺾어 나타날 타이밍이었다.
속으로 카운트를 세던 주하는 이쯤이다 싶을 때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녀석들이 나타날 자리에 범위형 스킬을 시전했다.
캐스팅이 끝까지 다다랐을 즈음, 네 명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함께 하늘에서 푸른색 보석 가루가 흩날렸다.
<시크릿 스톤: 2성>
그와 함께 쫓아오던 녀석들의 머리 위로 별 모양이 빙글빙글 돌았다. 네 명 모두 광역 기절 스킬에 적중한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자리에 못 박혀 있어야 했다.
그 잠깐 사이 힐판매중이 본인의 피를 채우려 했지만, 주하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녀석을 반대편으로 쭉 밀어 버렸다.
[일반] 힐판매중: 아! ㅅㅂ!
캐스팅도 취소되고 파티원들과도 더 멀어진 힐판매중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게 파티원들이랑 잘 붙어 다니지 그랬어.
주하는 무심한 낯으로 힐판매중을 두들겨 팼다. 남을 공격하면 본인도 공격당할 수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거늘. 멜로디를 쫓아가느라 바빠서 주변을 살피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힐러를 지키지 않은 파티원들도 문제고.
힐판매중의 피가 20%쯤 남았을 때, 기절이 끝난 녀석들이 무섭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제 옆으로 막 도착한 멜로디의 무기에서 빛이 번쩍였다. 그러자 달려오던 녀석들의 머리 위에 Zzz가 떠올랐다. 멜로디의 수면 스킬도 제대로 적중한 것이다.
주하는 어이가 없어서 파티 말로 물었다.
[파티] 카젤: 저렇게 뭉쳐서 오는 건 광역 CC기를 써 달라는 거지?
[파티] 멜로디: ㅋㅋㅋ
PVP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는 녀석들을 보니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떤 클래스가 어떤 스킬을 가졌는지는 기본적으로 숙지해야 할 텐데 너무나 미흡해 보였다. 아니면 붙잡힌 힐러가 죽어 가니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고.
어쨌든 덕분에 놈들이 자는 4초 동안 카젤과 멜로디는 힐러를 눕힐 수 있었다. 죽은 상태로 부활을 기다리는 힐판매중이 지역 창으로 욕설을 내뱉고 있었지만, 주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힐러를 잃어버린 놈들은 짜증을 숨기지 않고 카젤과 멜로디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살짝 벌어진 채 놈들에게 마주 달려갔다.
[파티] 카젤: 마검사부터 잡는다
[파티] 카젤: 다른 녀석들 발만 잡고 있어
[파티] 멜로디: ㅇㅋ
거리에 제약이 없는 마검사는 PVP에서 가장 귀찮은 클래스로 통한다. 가까이 있을 땐 근접 딜러가 되고, 멀리 있을 땐 마법사가 된다. 그래서 힐러 다음으로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하는 클래스였다.
주하는 멜로디에게 달려가는 마검사에게 보석 체인을 날렸다. 정확하게 적중하자 녀석을 납치하듯 끌어왔다.
[일반] OvOmlm: 넌 뭐야?
뭐긴 뭐야, 보석술사지.
속으로만 대답한 주하는 마검사에게 침묵 스킬을 날렸다. 마검사는 기본적으로 마나를 사용하는 클래스라 침묵을 당하는 순간 스킬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근접형 딜러이기도 하기에 평타 대미지를 무시할 수 없었다.
스킬을 쓸 수 없었던 마검사는 평타라도 사용하기 위해 카젤에게 달려들었다. 마침 보석 체인으로 가깝게 끌어 준 터라 붙는 건 쉬웠다.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 놓고 평타를 허용한 카젤을 미련하게 보며 마검사는 검을 휘둘렀다.
마검사에게 각종 도트 스킬을 넣고 있던 카젤이 반응한 것은 그때였다. 카젤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자 마검사의 검은 카젤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베었다. 타격음 대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거리는 딱 한 끗 차이였다.
그것을 아쉬워한 마검사는 다시 카젤에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로 마검사의 근접 공격은 단 한 번도 카젤에게 적중하지 않았다. 그제야 마검사는 이상함을 느꼈다.
처음엔 운 좋게 사거리 밖으로 피한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공격을 모조리 피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운이라고 볼 수 없었다. 치밀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일부러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카젤을 때려 보겠다고 침묵이 끝난 줄도 모르고 평타만 쓰던 마검사는, 그사이 각종 도트 디버프에 걸려 피가 이미 반 토막이 나 있었다. 뒤늦게 생존기인 마법 보호막을 사용했지만, 보호막이 둘리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른 세 명을 상대하던 멜로디가 마검사의 마법 보호막을 지워 버린 것이다.
[일반] OvOmlm: ㅅㅂ
마검사가 다급히 물약을 마시고 다시 카젤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작은 회오리가 몰아치더니 마검사를 잡아당겼다. 스킬 시전도 못 하게 막히고, 대시기로 빠져나가려고 해도 다시 끌려가길 반복하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카젤은 간단하게 마검사를 눕혀 버렸다.
[지역] OvOmlm: ㅅㅂ 뭐야 저거? 핵 아님?
[지역] OvOmlm: 핵 같은데???
바닥에 싸늘하게 누워 버린 마검사는 지역 채팅창에서 카젤의 핵 사용을 의심했다.
[지역] OvOmlm: 광역 CC기가 무슨 15초를 넘어?
[지역] OvOmlm: 저건 말이 안 되는데
[지역] 크리힛: 왜? 뭔데?
[지역] OvOmlm: 카젤 << 이 ㅅㄲ가 핵 쓰는 듯
[지역] 손좀바꿔줄사람: 무슨 핵?
[지역] OvOmlm: 몰라 무슨 회오리 같은 스킬이 15초 이상 끌어들이던데? 진짜 아무것도 못 하고 누워 버림
[지역] 손좀바꿔줄사람: 헐 그런 게 있어?
[지역] OvOmlm: ㅈㄴ 짜증 나네
[지역] 크리힛: 카젤님 ㄹㅇ 핵 사용함?
핵을 사용한다는 의심이 불거지자 지역 채팅창은 갑작스럽게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카젤에게도 귓속말이 쇄도했는데, 주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검사가 핵으로 죽었다는 소리에 멜로디와 카젤을 공격하던 놈들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저들도 핵에 당할까 봐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싸움은 중단됐지만, 지역 채팅창과 귓속말은 점점 더 불타오르고 있었다.
[지역] 악킬: 어쩐지 둘이서 다섯 명한테 달려들더라
[지역] Britz: ㅈㄴ 뻔뻔하네
[지역] ILLHVHL: 핵을 당당하게 쓸 줄이야 ㅅㅂ
[지역] 손좀바꿔줄사람: 히든 특성 아니야?
[지역] 악킬: 아무리 히든 특성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밸런스 조율은 하잖아. 여태 나온 것들도 다 그랬고
[지역] ILLHVHL: 15초 행동 불가는 선 넘었지
주하는 상황을 몰아가는 녀석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보텍스 문은 한 대만 쳐도 보석이 부서지며 CC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AI로 된 몬스터들은 보석을 깰 생각을 하지 않으니 30초 동안 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유저에게는 너무나 나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보텍스 문의 단점을 모르는 유저에게 사용한다면 강력한 CC기가 될 수 있다. 방금 마검사를 잡았던 상황처럼 말이다.
저도 나름 랭커인데 설마 대놓고 핵을 사용했을까. 심지어 개발사에서 랭커들을 따로 관리하는 팀이 있는데,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절대 핵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핵 사용으로 신고한다고 해도 당연히 아니라는 답변만 받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지역 채팅창에서 난리 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