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광폭화 모드가 무적이라니. 분명 다른 기믹이 있을 것이다. 주하는 멜로디에게 돌발 퀘스트를 주었다.
[파티] 카젤: 기믹 확인해야 하니까 죽으면 안 돼
[파티] 멜로디: 죽은 사람이
[파티] 멜로디: 바라는 게 많네
[파티] 카젤: ㅋㅋㅋㅋㅋㅋ 불가항력이었어
브레스 첫 대상이 제가 아닌 멜로디였다면 지금 저기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 사람은 저였을 것이다. 이렇게 보니까 먼저 누운 게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저 대신 뛰어다니는 멜로디를 보고 있자니 괜히 웃음이 흘러나왔다. 주하는 편하게 기믹을 확인하며 눈을 굴렸다.
주변은 이상 없고, 보스 몹도 광폭화 모드 말고 바뀐 건 없다. 벽도 별다를 게 없고 천장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쭉 이어지던 시선이 순간 멈추었다. 주하는 화면을 돌려 네 개의 기둥 끝, 구렁이 석상이 있는 부분을 응시했다. 언제부터 저랬지?
구렁이 석상은 검은 눈을 반짝이며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래를 보자 그곳엔 알이 가득했다. 침을 맞은 알들은 조금씩 크기를 키워 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불길한 모양새였다.
[파티] 카젤: 기둥 아래에 알 커지고 있는데?
이 사실을 알리자 멜로디는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발견한 것 같았다.
[파티] 카젤: 왜?
[파티] 멜로디: 칼 표시 떴어. 알에 공격해야 하나 본데
이번엔 직접적으로 알을 깨야 하나 보다. 관전 모드에서는 상호 작용과 공격 여부를 알 수 없고, 실제로 플레이하는 유저만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멜로디가 알에 다가가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힐러의 모기 딜로는 알을 깰 수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깨지 못한 알에서 새끼들이 우르르 부화하기 시작했다.
[파티] 멜로디: 아
[파티] 카젤: ㅋㅋㅋㅋㅋㅋㅋㅋ 잡아먹힌다
부화한 새끼들은 멜로디에게 무섭게 달려들었다. 맞는 족족 시전이 밀려서 공격하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대미지도 상당해서 피가 출렁이니 결국 멜로디는 도망을 택했다. 어떻게든 끝까지 버텨 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멜로디는 보스와 새끼들을 달고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끼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알이 부화하기 전에 깨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 당연했다.
대체 몇 마리를 달고 뛰는 건지, 워렌스워드 저택에서 여름n모기가 1층 몹을 죄다 달고 뛰는 모습이 겹쳐 보였다.
[파티] 카젤: 와, 스펙터클하네
[파티] 카젤: 좀비 영화 찍으면 잘 찍겠다
[파티] 멜로디: ㅋㅋ
그 와중에도 여유가 있는지 멜로디는 제 장난에 가볍게 웃었다. 주하도 실없이 웃으며 맵을 쭉 둘러보았다. 이제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화한 새끼들로 인해 화면이 온통 검게 변했다.
[파티] 카젤: 언제까지 버티실 겁니까 슨생님. 사생팬을 그렇게 끌고 다니고 싶으세요?ㅋㅋ
[파티] 멜로디: ㅇㅋ 사생팬은 좀 아니지 ㅋㅋ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더는 도망갈 수 없던 멜로디는 손을 놓았다. 제자리에 우뚝 서자, 수십 마리의 새끼들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카젤과 멜로디가 모두 죽자 두 사람은 죄악의 탑에서 튕겨 나왔다.
주하는 유저들이 바글바글한 타워 앞을 보다가 멜로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전과 달리 총생명력이 줄어 있었다. 아마 아이템 몇 개는 깨진 듯했다. 그 많은 몹한테 처맞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파티] 카젤: 거기서 술래잡기는 왜 해?
[파티] 멜로디: 그냥ㅋㅋ
[파티] 카젤: 쓸데없는 데서 힘 잘 빼네. 아이템 깨졌지?
[파티] 멜로디: ㅇㅇ
[파티] 카젤: 수리하고 오자
안 그래도 카젤의 아이템 내구도도 간당간당했다. 누운 것만 여섯 번에 몹한테 맞은 것도 있으니 슬슬 수리할 타이밍이긴 했다.
‘수리비 꽤 나오겠네.’
내구도에 불이 들어오는 걸 오랜만에 봤더니 진짜 레이드 하는 기분이 들었다. 죄악의 탑 때문에 발을 동동 굴렀던 과거가 있었지만, 지금에서야 모두 용서했다. 2인 레이드는 정말 신의 한 수였달까. 재미있으면 다 수용할 수 있는 고인물다운 생각이었다.
주하는 대도시로 돌아와 아이템을 수리하고 물약을 채워 넣었다. 다시 죄악의 탑으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에게 귓속말이 왔다.
[귓속말] 개인주의: 카젤 형! ㅎㅇ
리프 길드의 막내 중 하나, 개인주의였다.
[귓속말] 카젤: ㅎㅇ
[귓속말] 개인주의: 혹시 지금 바빠요?
[귓속말] 카젤: 왜요?
[귓속말] 개인주의: 길드에서 대장님 부르는데 대답을 안 해서요! 귓말해도 반응 없고. 완전 잘근잘근 씹히고 있음 ㅠㅠ
[귓속말] 카젤: 악탑 도느라 바빠요 ㅋㅋㅋ
[귓속말] 개인주의: 쳇! 나도 돌고 있는데
[귓속말] 카젤: 대신 불러 줘요?
[귓속말] 개인주의: 아니... 그건 아니구..... 걍 궁금해서
[귓속말] 카젤: ㅇㅇ?
[귓속말] 개인주의: 대장님이랑 카젤 형이랑 계속 100층에 있길래 보스 나오냐고 물어봤는데 대답을 안 하잖아요.....
[귓속말] 카젤: 지금 몇 층인데요?
[귓속말] 개인주의: 저 이제 99층! ㅇㅅㅇ/
‘99층이라고? 이렇게 빨리?’
주하는 시계를 확인했다. 30분 정도 지났나?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 여기까지 추격할 줄이야. 그나저나, 곧 100층에 진입할 텐데 뭐가 그리 궁금한 걸까.
그러다 문득 멜로디와 저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았다. 멜로디는 씹고 있고 저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고 있네? 그것도 내 시간을 들여서.
“……오호.”
주하는 개인주의가 무얼 원하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귓속말] 카젤: 바로 다음 층이네요
[귓속말] 개인주의: ㅇㅅㅇ네넹
[귓속말] 카젤: 그럼 올라오면 알 수 있겠네 ㅋㅋ
[귓속말] 개인주의: ...그렇긴 한데
[귓속말] 카젤: ㅇㅇ 수고ㅋ
[귓속말] 개인주의: 앜ㅋㅋㅋㅋ 카젤 형 잠시만요!
[귓속말] 카젤: ^^ 이제 바쁨
[귓속말] 개인주의: 악!!! 안 통하넼ㅋㅋㅋ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어 보려는 개인주의의 처절함에 주하는 가볍게 웃었다. 고작 몇 초 따라잡아 보겠다고 아주 깜찍한 짓을 했다.
하지만 개인주의는 목표를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다. 2위인 그들을 바짝 쫓고 있는 벌꿀오소리 팀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집착을 생각해 보면, 개인주의는 우리가 아닌 3위를 더 무서워해야 했다. 벌꿀오소리는 광기에 물든 채 천상검의 멱살을 움켜쥐고 야차처럼 죄악의 탑을 돌고 있었다. 길드 대화창에서 나누는 대화를 보면 저마저도 천상검이 불쌍하게 보일 정도였으니까.
이걸 개인주의에게 말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형평성을 위해 알려 주지 않기로 했다. 1위를 노리는 게 아니라 2위를 사수할 수 있느냐가 더 큰 문제라는 걸 모른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물론 그래서 재미있다는 건 비밀이었다.
어쨌든 개인주의와 놀아 줄 시간은 없었다. 주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귓속말] 카젤: 그럼 오늘치 귓말 끝
[귓속말] 개인주의: 헐 오늘 치라뇨? 그런 게 어딨어요ㅋㅋ
[귓속말] 카젤: 여기 있죠ㅋ
[귓속말] 개인주의: ㅋㅋㅋㅋ 에잇! 알겠어요!
[귓속말] 개인주의: 내일 또 충전해서 귓말할게요!
개인주의는 자신의 계획이 들통났음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열심히 하라며 응원까지 한 그는 마지막까지 유쾌했다. 이 정도 방해 공작은 애교와 다를 바 없었기에 주하도 웃으며 인사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2위와 3위의 추격전은 여전했다. 무섭게 달리는 벌꿀오소리와 99층인 개인주의.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곧바로 죄악의 탑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 멜로디에게 달려가는 동안 개인주의에게 제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가 물었다.
[파티] 멜로디: 개주가 귓말했어?
[파티] 카젤: ㅇㅇ
[파티] 멜로디: 뭐라는데
[파티] 카젤: 시간 끌려고 열심이던데
[파티] 멜로디: ㅋㅋ
[파티] 카젤: 님네 막내 관리 좀요
[파티] 멜로디: 너도 그냥 무시해
[파티] 카젤: ㅋㅋㅋ
너무 당당하게 무시하라고 하니 개인주의가 조금 불쌍해 보이기는 했다.
다시 죄악의 탑으로 들어간 주하와 멜로디는 라스탈리온 공략에 집중했다. 소환 마법진의 문양을 외워서 순서대로 알을 까고, 반응형 기믹도 수월하게 넘기자 어김없이 광폭화 모드가 되며 알이 생기기 시작했다.
[파티] 멜로디: 내가 보스 어글 잡고 있을 테니까 넌 알부터 까
[파티] 카젤: ㅇㅇ
네 방향 브레스 기믹이 끝나는 순간 그동안 쌓아 두었던 어그로 수치는 사라진다. 멜로디는 일부터 공격을 맞으며 힐 어그로로 보스를 잡아 두었다. 그동안 주하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착실하게 알을 깨기 시작했다. 힐러가 잡을 땐 힘들었지만, 딜러가 잡기 시작하니 알을 깨는 건 수월했다.
그렇게 한 바퀴 돌며 네 방향의 알을 깨자 파편이 라스탈리온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또 무슨 기믹이 나오려나 노려보고 있는데, 다행히도 라스탈리온이 바닥에 넘어지며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파티] 멜로디: 지금 딜 타이밍
주하는 중앙에 있는 라스탈리온에게 달려가 다급히 스킬을 퍼붓기 시작했다. 백 퍼센트 확률로 그로기 상태가 오래가지 않음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큰 스킬 좀 남겨 둘걸.’
알 빨리 깨겠다고 쿨타임 긴 스킬을 썼더니 조금 아쉬웠다. 최대한 딜을 욱여넣고 피가 어느 정도 닳았을 때쯤 라스탈리온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모든 딜이 1로만 들어가기 시작했다. 설마…….
[파티] 카젤: 또 무적?
[파티] 멜로디: 외곽에 알 다시 생겼어
[파티] 카젤: ;;;
주하는 다시 기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번 알은 붉은색이 아닌 노란색이었다. 다른 알이 나타났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닌데. 설마 새로운 패턴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