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오전에 멜로디와 함께 죄악의 탑을 돌면서 실시간 랭킹 1위를 탈환했다. 그것도 2등과의 격차를 크게 낸 상태로.
방금 막 끝내고 쉬고 있었는데 벌꿀오소리가 그새 랭킹을 본 모양이다. 그는 천상검이 올 때까지 시도조차 못 하고 있어서 잔뜩 예민해진 상태였다. 던전도 못 돌고, 죄악의 탑도 못 돌고. 업적 노가다만 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길드] 벌꿀오소리: 천상님 오면 진짜... 미친 듯이 갈굴 거야..... 두고 봐... 가만 안도!!
[길드] 카젤: 그 불똥이 왜 나한테 와요ㅋㅋ
[길드] 벌꿀오소리: 아 몰라ㅠㅠㅠㅠㅠ
[길드] 벌꿀오소리: 플래까지도 못 가면 어쩌지?
[길드] 카젤: 플래는 가능하지 않을까?
[길드] 카젤: 금방 들어오겠죠. 기다려 봐요
[길드] 벌꿀오소리: ...내가 멜로디랑 해야 했는데... 쳇
[길드] 카젤: 어라? 남의 듀오를 막 넘보네?
[길드] 벌꿀오소리: 허어? 듀오라고 품는 거 보소?
[길드] 카젤: ㅋㅋㅋㅋㅋㅋ 랭킹 게시판 다시 보고 오셈. 저걸 보면 누구든 품을 수 있지 않을까?
[길드] 벌꿀오소리: ...젠장ㅠㅠ
가볍게 벌꿀오소리를 처단한 주하는 다시금 식사를 재개했다.
주하의 모니터 화면엔 죄악의 탑 실시간 랭킹이 떠 있었는데, 2등과 3등은 아직 진행하지 않는지 잠잠했다. 다행히도 2등과는 20층 정도 벌려 놨으니 당장은 여유가 있는 상태였다.
[파티] 멜로디: 카젤님
[파티] 카젤: ㅇㅇ
마지막 빵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주하는 멜로디의 부름에 곧장 대답했다.
[파티] 멜로디: 계속 악탑 도는 건 효율이 별로일 것 같고... 2등 올라오는 거 보면서 다른 콘텐츠도 병행하면 될 것 같은데
[파티] 멜로디: 어떻게 생각해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효율적이었다. 랭킹은 1위만 유지하면 되니까 굳이 층수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었다. 각자 남은 콘텐츠 하다가 순위가 아슬하다 싶을 때 다시 만나서 올리면 그만이다.
집계가 끝날 때까지 긴장을 풀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죄악의 탑에만 집중할 필요도 없었다.
[파티] 카젤: 괜찮네요
그럼 뭘 할까.
평판도 올려야 하고, 업적도 채워야 하고, 채집도 해야 하고, 전문 기술도 올려야 하는데 할 게 너무 많아서 걱정이다. 평판은 지금 사람이 많아서 별로일 것 같은데. 업적 채우면서 채집이나 할까?
[파티] 멜로디: 그럼 업적 하면서 채집이나 하죠
멜로디도 같은 생각 하고 있었나 보다. 역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효율이 좋은 콘텐츠임이 틀림없었다. 자, 그럼 배도 채웠으니 슬슬 해 볼까.
[파티] 멜로디: 어디부터 갈까요?
[파티] 카젤: 네?
[파티] 멜로디: 어느 맵부터?
[파티] 카젤: ...?
[파티] 멜로디: ?
“뭐야?”
갑자기 왜 저래? 저만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본인 알아서 선택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의아함에 가만히 쳐다보는데 문득 멜로디와의 대화가 묘하게 어긋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죠’, ‘갈까요?’의 마지막 종결 어미가 그랬다. 이거 설마 같이 하자는 말인가?
[파티] 멜로디: 설마 혼자 하려고?
역시나 멜로디에겐 따로 한다는 선택지가 없었나 보다. 같이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무조건 그래야 한다는 듯이 저를 엮고 있었다. 보통 이런 개인 콘텐츠는 혼자 하거나 친한 사람들끼리 하지 않나?
[파티] 카젤: 우리 같이 해요?
[파티] 멜로디: 그럼 연약한 힐러 버리고 혼자 하려고요?
멜로디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선택하라면 단연코 ‘연약한’을 꼽을 수 있었다. 어딜 봐서 연약하다는 건지.
[파티] 카젤: 연약? ㅎ
[파티] 멜로디: ㅇㅇ
와, 정말 양심 없구나.
힐러인 정령사로 딜러인 보석술사를 쫓아오던 멜로디가 아니던가. 다른 딜러들을 다 제치고 올 정도로 빠르게. 분명 솔플용 아이템이 있을 것이다. 아니, 그것도 그런데 본인 길드원들도 있을 텐데 왜 나한테?
[파티] 카젤: 길드분들은요?
[파티] 멜로디: 오늘은 악탑 돈다고 정신없음
[파티] 카젤: 그럼 템 갈아 끼고 혼자 도셔도 되지 않아요?
[파티] 멜로디: 왜요?
[파티] 카젤: --??
[파티] 멜로디: 딜러 있는데 굳이
[파티] 카젤: 헐?
[파티] 멜로디: 어차피 둘이 진행 속도 똑같은데 따로 할 이유도 없지 않나? 하다가 랭킹 보고 바로 이동할 수도 있고
그건…… 그렇긴 한데.
고민하는 동안 멜로디는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이래도 거절할래? 하고 묻는 것처럼. 주하는 채팅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파티] 멜로디: 수색하는 것도 혼자보다는 둘이 더 빠를 테고
[파티] 멜로디: 몹 잡는 것도 같이 되니까 부담 없고
[파티] 멜로디: PVP 지역에서 뒤치기 맞을 일 없고
[파티] 멜로디: 미니게임 공략법도 공유할 수 있고
[파티] 멜로디: 거기다 심심하지 않잖아요?
[파티] 멜로디: 어딜 봐도 같이 하는 게 이득인데?
이 사람이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평소 할 말만 하던 사람 같지 않게 그는 무자비하게 채팅창을 점령했다. 타자가 어찌나 빠른지 체감상 0.1초에 한 줄씩 올라오는 것 같았다.
[파티] 멜로디: 그리고 오늘은 계속 같이 하기로 하지 않았나?
[파티] 멜로디: 약속했는데 그렇게 쉽게 어기면 안 되죠
[파티] 멜로디: 미남 카젤님^^
마지막 일격까지 맞고 나자 머리가 띵했다. 멜로디는 보기와 다르게 뒤끝 있는 사람이었다. 주하는 저도 모르게 입가를 가리며 얼굴을 숨겼다.
[파티] 멜로디: 그럼 샤하스모르 지역은 사람 많으니까
[파티] 멜로디: 울부짖는 평원부터 하러 가죠 ㄱㄱ
먼저 포탈을 탔는지 멜로디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도 부랴부랴 포탈을 탔다. 로딩 화면으로 넘어가 일러스트를 가만히 쳐다보던 주하는 그제야 헛웃음을 토해냈다.
“몰아치는 게 수준급이네.”
개인주의와 일시불이 왜 대장님, 대장님 하는지 조금 이해가 됐다. 이렇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만을 말하며 끌고 가는데 따라가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폭군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항상 1위를 유지하는 사람의 말이다. 믿고 따라가는 만큼 보상은 확실할 터였다.
솔직히 멜로디가 했던 말 중 트집 잡을 만한 부분은 없었다. 단 하나, 놀리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지.
어쨌든 그의 말대로 따로 다닐 필요는 없었다.
[파티] 멜로디: 쉬운 것부터 끝내죠
[파티] 카젤: 네--) 그럼 몹부터 잡아요
[파티] 카젤: 지나가면서 몇 개 체크해 놨으니까 따라와요
업적용 몹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지만, 지나가면서 미리 확인해 둔 터라 기억하기는 쉬웠다.
주하는 이동을 위해 탈것을 소환하려다 눈을 굴렸다. 먼저 올라타 있는 멜로디를 응시하던 그는 묘하게 웃고는 캐스팅을 해제했다.
쫑긋거리는 귀와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고 있자니 문득 지난 시즌 업적 보상으로 받았던 탈것이 떠올랐다.
주하는 수집품 창을 열어 페이지를 넘기며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그것을 스킬 창에 바꿔 두고 누르자 이펙트와 함께 새하얀 고양이가 소환되었다. 마침 눈도 보라색이었다. 따로 염색약을 사지 않아도 되었다.
[파티] 멜로디: 고양이?
[파티] 카젤: ㅇㅇ
[파티] 멜로디: 고양이 좋아하나 봐요? 펫도 그렇고
[파티] 카젤: 네 본가에서 고양이 키우거든요. 하얀색
주하는 식빵 굽는 고양이를 움직여 멜로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녔다. 멜로디는 그런 주하를 말없이 응시했다. 마치 무언가 가늠하려는 듯이.
[파티] 멜로디: 근데...
[파티] 카젤: ㅇㅇ?
[파티] 멜로디: 왜 내 등이 무거운 거 같지?
[파티] 카젤: ㅋㅋㅋㅋㅋㅋㅋ
이제야 돌아오는 반응에 주하는 길게 웃었다.
멜로디는 하얀 묘인족에 보라색 눈을 가지고 있고, 옷도 흰옷에 보라색 포인트가 있었다. 누가 봐도 멜로디와 제가 소환한 고양이는 같은 핏줄처럼 똑 닮아 있었다. 주하는 씨익 웃었다.
[파티] 카젤: 고양이 예쁘죠?
[파티] 멜로디: 내 칭찬 하는 거예요?
[파티] 카젤: 설마요; 제 고양이 칭찬하는 건데요
[파티] 멜로디: ㅋㅋㅋ
[파티] 멜로디: 진짜?
[파티] 카젤: ㅇㅇ
늠름한 용을 타고 있던 멜로디가 탈것을 해제했다. 그러더니 머리 위로 카트 아이콘이 떠올랐다. 숍에 접속했다는 뜻이다.
잠시 후 멜로디는 저와 똑같은 탈것을 소환했다. 색만 다른 고양이를.
검은 털에 붉은 눈을 가진 고양이는 멜로디를 등에 업은 채 기지개를 켜며 하품했다. 가만히 서 있을 때 취하는 모션 중 하나였다.
제 캐릭터와 닮은 검은 고양이를 보던 주하는 피식 웃었다. 제가 먼저 시작하긴 했지만, 이렇게 반응이 바로 돌아올 줄이야. 숍에 들어가서 탈것 전용 염색약을 구매했을 멜로디가 왜인지 귀엽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검은 고양이도 멋있네. 다음엔 자신도 세트로 맞춰서 해 볼까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멜로디의 충격적인 한마디가 올라왔다.
[파티] 멜로디: 내 고양이는 못생겼네
“뭐?”
너무 놀라서 육성이 먼저 튀어나왔다. 누가 못생겼다고? 고양이가? 내가? 아니, 카젤 캐릭터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채팅창을 보았다. 하지만 멜로디가 던진 폭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못……생겼다고.
[파티] 멜로디: 역시 검은색보다 흰색이 더 잘 받는 거 같아
[파티] 카젤: 무슨 헛소리를?
[파티] 카젤: 검은 게 훨씬 잘 빠졌는데?
말도 안 되는 억지는 당장 바로잡아야 했다. 솔직히 흰색보다는 검정 아닌가? 스타일로 보나 카리스마로 보나 당연히 검은색이 우세하지. 하얀 건 예쁘기만 하고 멋있진 않잖아.
주하의 눈에 각자의 고양이 위로 멜로디와 카젤 캐릭터가 덧그려졌다. 단순히 고양이의 컬러가 아닌 멜로디 vs 카젤이 된 것이다. 몇 년을 애지중지하며 키운 주인으로서 절대 밀려서는 안 될 싸움이었다. 처음 캐릭터를 만들 때도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못생겼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