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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19화 (19/130)

19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달리다가 결국 막다른 길에 도착했다. 주하는 방으로 들어가 구석까지 달렸다. 쫓아오는 몹들은 기차처럼 줄줄이 달려오고 있었다. 예쁘게 모여 있으면 얼마나 좋아. 광역 CC기를 쓴다고 해도 몹을 전부 맞히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이 다가온 놈들에게 기절 스킬을 날렸다. 몹들이 해롱대는 사이에 주하는 냉큼 옆으로 빠져나갔다.

뒤늦게 달려오는 몹에게 몇 대 맞았더니 피가 쭉 닳아서 바로 물약 하나를 먹었다. 마지막에 달려온 몹에게는 생존기를 두르고 맞았더니 피가 간당간당하게 남았다. 딸피로 생존한 채로 주하는 겨우 복도로 나올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달리고 있는데, 문득 파티 대화창이 시끄러운 게 보였다.

[파티] 여름n모기: 나 도착했는데;; 왜 길마님만 있냐?

[파티] 개인주의: 와씨! 여기 아니잖아!

[파티] 개인주의: 다시 달려감;;

[파티] 일시불: 나 죽는다! 으악!

[파티] 일시불: ㅁㅊ!

저뿐만 아니라 다른 딜러들도 난리였다. 그래…… 너희도 다 실수했구나. 일시불은 무적기를 사용했는지 호들갑 떨어 댄 것과 달리 살아 있었다.

[파티] 멜로디: 딜러 세 명 각각 적립

[파티] 일시불: 내 만 골! 으악!

[파티] 개인주의: ㅠㅠㅠㅠㅠㅠㅠㅠ

[파티] 카젤: ㅠㅠㅠ

[파티] 멜로디: 빨리들 오지? ㅋㅋㅋ

[파티] 여름n모기: 휴... 살아남았다

다시 제대로 길을 찾아 중앙에 도착하니 여름n모기와 멜로디가 몹을 끌면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드디어 파티원을 만났다는 반가움 반, 삽질 포인트를 쌓았다는 안타까움 반으로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파티] 여름n모기: 카젤님 도착

[파티] 여름n모기: 너희 언제 오냐

[파티] 개인주의: 곧 감;; 거의 도착

[파티] 일시불: 저도 다 와 감

거짓은 아니었는지 조금 후 개인주의와 일시불이 동시에 나타났다. 그 뒤로 수많은 몹이 우르르 몰려왔다. 징그럽기도 하네. 다 모인 몹을 보니 족히 100마리는 되어 보였다.

파티원이 모두 합류하자마자 여름n모기가 광역 도발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몹들이 탱커에게 달려들었다. 그제야 딜러와 힐러는 달리기를 멈출 수 있었다.

[파티] 개인주의: 개 무서웠어 ㅠㅠ

[파티] 일시불: 황천길 찍고 왔어;; ㅠㅠ 손에 식은땀 난다

[파티] 개인주의: 카젤 형도 삽질했나 본데...

[파티] 카젤: ㅇㅇ;

[파티] 카젤: 이 짓을 30판 해야 한다니... 벌써 피곤함;

[파티] 개인주의: 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일시불: ㅋㅋㅋㅋ 빨리 적응해야 할 듯;;;

일시불의 말대로 적응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던전을 이따위로 만들다니. 당근 퀘스트도 그렇고, 죄악의 탑도 그렇고, 던전까지. 너무 실험정신이 투철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워렌스워드 던전은 우리가 무리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말이다. 분명 이렇게 잡으라고 만든 던전은 아닐 것이다. GM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면 또라이라고 욕할지도 모르겠다.

한차례 숨을 돌린 주하는 열심히 달리는 몹에게 보석 폭탄 스킬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이 끝도 없는 마라톤에서 여름n모기를 해방시켜 줘야 했다.

어느 정도 적당히 폭탄을 심고 나자 여름n모기가 알아서 파티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몹 피가 많지 않으니 심어 둔 폭탄이 다 터진다면 한 번에 우르르 쓰러질 것이다.

[파티] 개인주의: 한 방에 가자!

[파티] 일시불: 가즈아!

준비를 마친 딜러들이 보석 폭탄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어그로가 모두 카젤에게 갔지만, 대상이 바뀌는 순간 몹은 모두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드디어 다사다난했던 한 타임이 끝났다.

[파티] 여름n모기: 다른 던전이랑 피로도가 다른데;;

[파티] 개인주의: 그래도 잘만 하면 빨리 끝날 것 같음 ㅇㅅㅇ

[파티] 일시불: 오 그러네? 삽질했는데도 15분 걸렸어

[파티] 개인주의: 이번 타임 보스 잡고 나가면 20분. 1층에서 삽질 안 하면 앞으로 던전 하나당 15분이라는 소리!!!

[파티] 여름n모기: ㅇㅋ 빨리 끝내자;

다 같은 마음인지 보스 방 문을 여는 속도가 재빨랐다. 기분 좋게 안으로 들어갔는데, 문이 닫히는 순간 멜로디가 말했다.

[파티] 멜로디: 딜러들 적립 확인해

[파티] 멜로디: 개인주의, 일시불 각각 만 골

[파티] 멜로디: 카젤님 노예 계약서 1장

[파티] 개인주의: ;;;;;

[파티] 일시불: ;;;;;

[파티] 카젤: ;;;;;

[파티] 여름n모기: ㅋㅋㅋㅋㅋ

워렌스워드 저택이 딜러들에게는 최악의 던전으로 기억될 순간이었다.

***

워렌스워드 저택에 갇힌 지 여덟 시간째.

드디어 영웅 던전을 위한 숙련 게이지를 다 채웠다. 처음 던전에 적응하기 위해 시간을 들였던 것에 비해선 진전이 빠른 편이었는데, 후반부에 적응하다 못해 마스터해 버린 덕분이었다. 지름길도 알아내고, 지형을 이용하는 것도 능숙해지니 속도가 붙었다.

물론 초반의 삽질이 크게 작용한 것도 있었다.

개인주의는 5만 골드를 적립했고, 일시불은 4만 골드를, 여름n모기는 3만 골드를 적립했다. 멜로디는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고, 주하는 세 장의 노예 계약서를 작성했다. 억울하다고 몇 번 반발했지만, 번번이 지각생 타이틀에 발목이 잡혀 버렸다.

그 이후는 악으로 깡으로 돌았다. 인간이 각성하면 얼마나 큰일을 해내는지 증명한 아주 좋은 예시였다. 멜로디를 제외한 네 명의 파티원들은 그렇게 갈렸다.

“……와, 엄청 피곤하네.”

주하는 목덜미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앉은 자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더니 허리고 어깨고 목이고 뭉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대로 다음 던전을 바로 가면 담 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파티] 일시불: 몰이가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ㅠㅠ 모기 형님이랑 카젤 형님이 왜 쓰러졌는지 이제 이해가 된다

[파티] 개인주의: 맞아ㅠㅠㅠㅠ 이걸 밤새고 두 탐이나 연달아 했으니ㄷㄷㄷ

[파티] 여름n모기: 이제야 알겠니? ^^;;;

[파티] 개인주의: 솔직히 쉬지 않고 다음 던전 가는 건 오바다;; 대장님도 피곤하지 않아요?

[파티] 여름n모기: 길마님... 쉬자 제발

[파티] 멜로디: ㅇㅇ 20분 쉬다 와

[파티] 개인주의: 와... 20... 20분...

[파티] 개인주의: ......감사합니다

20분이라도 주는 게 어디야. 멜로디가 폭군처럼 몰아붙이는 것에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20분이 정말 꿀처럼 느껴졌다.

주하는 뻐근한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의자에 푹 기댔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이 축 늘어지니 그제야 근육이 욱신거리는 게 느껴졌다. 운동을 좀 해야 하나? 건강한 게임 라이프를 즐기기 위해선 몸이 받쳐 줘야 할 텐데.

아직 창창한 22살 청년은 갑작스럽게 건강 고민을 시작했다. 일단 중간중간 스트레칭이라도 열심히 하다가 여유가 생기면 운동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 맞다.”

잠깐의 휴식을 만끽하며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컴퓨터 망가졌지, 참.”

덕분에 PC방으로 달려왔는데 이제야 집 컴퓨터가 생각나다니. 네 시간 지각한 것 때문에 정신없긴 없었나 보다. 고장 난 게 파워였던가?

주하는 인터넷에 들어가 제품 몇 개를 둘러보았다. 가격대가 성능별로 천차만별이었지만, 고민하지 않고 성능 좋은 고가의 제품을 선택했다. 싼 제품 샀다가 터지는 꼴을 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얼마 전에 컴퓨터 부품 몇 개를 고성능으로 바꿨는데 파워가 버티지 못한 것 같았다. 같이 구매했어야 했는데 뭘 믿고 구형을 그대로 썼는지 모르겠다. 꼭 이렇게 나중에 후회한다니까.

구매를 마친 주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음료수도 사 와야겠다 싶어 의자를 미는데, 어딘가 툭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무언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어.”

뒤를 돌아보자 바닥을 흥건히 적신 커피와 나뒹구는 일회용 컵이 보였다. 설마…….

끼기긱.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겨우 움직이자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커피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하는 다급히 의자를 빼고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남자의 옷 이곳저곳을 살폈는데, 다행히도 흘린 곳은 없어 보였다. 저 멀리서 아르바이트생이 이 상황을 봤는지 청소도구를 꺼내고 있었다. 이래저래 민폐를 끼친 것 같아 일회용 컵이라도 주울까 싶어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제 어깨를 잡는 손길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손에 묻을 텐데 그냥 두세요.”

그렇긴 한데……. 정말 이대로 있어도 되나? 민망함에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저를 빤히 쳐다보더니 제 자리의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이 사람도 라나탈 하는 사람인가? PC방에 같은 게임을 하는 유저가 있다면 으레 눈길이 가기 마련이었다. 예상이 적중했는지 남자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화면을 살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청소해야 해서 잠시 자리 좀.”

“아, 네. 죄송합니다.”

사고 수습하러 온 아르바이트생의 요청에 주하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사이 남자가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다는 것은 모른 채였다.

모니터를 보다가 주하에게 시선을 돌린 남자는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가늘게 휜 눈으로 곤란해 보이는 라나탈 유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는 청바지와 하얀 티셔츠 차림이었는데, 팔다리가 쭉쭉 길게 뻗은 체형이라 아주 잘 어울렸다. 얼굴도 작고 이목구비도 시원시원해서 잘생겼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전혀 꾸미지 않았음에도, 아니, 씻고 급하게 나왔는지 머리가 살짝 떠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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