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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 줍는 힐러-16화 (16/130)

16화

쉴 때가 된 게 아니라 이미 한도를 초과했다. 이 파티에서 가장 힘든 사람을 뽑으라면 여름n모기와 자신일 테니까. 오죽하면 여름n모기도 울면서 애원하겠는가.

그나저나 이렇게 피곤하기는 또 처음이네. 확장팩 첫날부터 달려서 이틀간 밤새웠을 때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레이드 퍼킬을 위해 달렸던 날보다 더 힘들었다.

[파티] 일시불: 그럼 세 시간 자고 올까여? 패턴 맞춰야 할 듯

[파티] 카젤: ...겨우 세 시간?

[파티] 개인주의: 10만 골이 눈앞에서 아른거리지 않나요?

[파티] 카젤: 검은 도포 입은 사람이 아른거리긴 함

[파티] 개인주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일시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여름n모기: 카젤님도 보여요?... 나만 보이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존재했구나...

[파티] 개인주의: ㅋㅋㅋㅋㅋㅋ 정신 차려요! 따라가면 안 돼!

[파티] 일시불: ㅋㅋㅋ ㅇㅋ! 그럼 네 시간으로?

[파티] 여름n모기: 다섯 시간! 다섯 시간!! 300분!!!

[파티] 개인주의: 그건 안 되겠는데? ㅇㅁㅇ

주하는 멍해지는 정신을 겨우겨우 붙잡으며 뻑뻑한 눈꺼풀을 문질렀다. 졸려서…… 진짜 너무 졸려서 미치겠다. 힘든 것보다 수면이 너무나 절실했다.

[파티] 멜로디: 다섯 시간 정도는 괜찮아

[파티] 여름n모기: 길마님ㅠㅠㅠㅠㅠㅠ

[파티] 멜로디: 네 시간이면 아마 두 사람 못 일어날걸?

[파티] 여름n모기: ㅇㅇ;;;

[파티] 개인주의: 뭐지? 대장님이 웬일로 봐주신다;;

[파티] 멜로디: 이미 저쪽 팀이랑 차이 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나머지 던전 세 개는 한 번에 다 할 거라서ㅋㅋ

[파티] 개인주의: 오호

[파티] 일시불: 1보 후퇴 2보 전진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당장이라도 침대에 뛰어들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을 뿐이었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냥 이대로 정신 놓을까?

[파티] 멜로디: 카젤님

[파티] 개인주의: 카젤 형?

[파티] 일시불: 카젤 형님?

[파티] 여름n모기: 뻗으셨나...

거의 쓰러져 가는 와중에 알람이 계속 울렸다. 힘겹게 고개를 들자 멜로디에게서 귓속말이 와 있었다.

[귓속말] 멜로디: 카젤님 이만 자러 가요. 다섯 시간 알람 맞춰 놓고

[귓속말] 멜로디: 카젤님?

[귓속말] 멜로디: 자나?

[귓속말] 멜로디: 의자에서 자지 말고

[귓속말] 멜로디: 일어나요

주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나마 한 가닥 남은 정신 줄을 아슬아슬하게 붙잡을 수 있었다.

[귓속말] 카젤: 네

[귓속말] 멜로디: 못 일어날 것 같으면 깨워 줘요?

[귓속말] 카젤: 아뇨. 알람 맞춰 두면 돼요

[귓속말] 멜로디: ㅇㅋ

주하는 파티에 먼저 쉬러 갈게요, 라고 쓰고 곧바로 일어났다. 게임을 끌 여력도, 인사받을 여유도 없어서 컴퓨터는 그대로 둔 채 침대에 파고들었다. 정신을 완전히 놓기 전, 그나마 알람을 떠올리곤 중얼거렸다.

“시리야…… 다섯 시간 뒤에, 알람 울……려 줘.”

핸드폰에서 무어라 대답한 것 같지만 대답을 듣기도 전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방이었다.

***

그런 날이 있다. 눈을 감았을 뿐인데 1초 만에 개운하게 눈을 뜨는 그런 날, 꿈조차 꾸지 않고 피곤함도 모두 사라진 날.

바로 오늘이었다.

주하는 잠기운이 완전히 가신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개운한 몸과는 다르게 찝찝함이 느껴진 탓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마지막 기억.

“뭐야, 몇 시지?”

다급히 시계를 보았다. 시침은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을 잤던 마지막 시간이…… 그러니까.

……오전 11시.

약속했던 시간에서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미친.”

주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로 향했다. 꺼져 있는 컴퓨터 전원을 누르는데 문득 어제 제가 끄고 잤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신이 없었던 터라 당장은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든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는데, 켜져야 할 컴퓨터가 감감무소식이다. 몇 번을 눌러 봐도, 본체를 두들겨 봐도 반응이 없었다.

싸한 기분에 컴퓨터 연결선을 확인했다. 선은 제대로 다 연결되어 있었고, 멀티탭 전원도 잘 들어와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본체를 뜯어 보았다. 그 상태로 전원을 눌렀지만 파워가 돌아가지 않았다.

혹시 터졌나? 하필 이럴 때?

주하는 곤란한 낯으로 컴퓨터를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중요한 건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겼다는 것이다. 세 시간이나 지났다니. 당장 PC방으로 향하려 했는데, 스쳐 지나간 거울을 보곤 침음을 삼켰다.

“으음.”

잔뜩 눌린 머리와 반질반질하게 부은 얼굴. 누가 봐도 방금 깨어난 사람이었다. 이런 꼴로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PC방에 오래 있을 텐데 적어도 멀끔한 모습으로 나가야 했다.

초스피드로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기도 전에 옷을 갈아입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문지르고 핸드폰과 지갑을 들고나왔다.

가까운 곳에 PC방이 있었지만, 사양은 별로라 좀 더 먼 곳으로 향했다. 원하는 PC방에 도착하니 PM 7:30이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안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한 자리를 발견하고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핸드폰을 확인했다. 분명 자기 전에 알람을 설정했던 것 같은데, 리스트를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발음이 뭉개져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알람이 울렸으면 적어도 깨기라도 했을 텐데.

“잘하는 짓이다.”

답답한 마음에 핸드폰을 엎어 두었다.

컴퓨터가 켜지자마자 라나탈을 실행했다. 다행히도 미리 업데이트해 뒀는지 곧바로 게임 화면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라나탈도 지금 피크 타임이라는 것. 접속 대기열을 본 주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 시간이 30분 후로 나와 있었다.

“……미치겠네, 진짜.”

제대로 민폐 짓을 해 버렸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당혹스럽기도 한편, 난감하기도 했다. 멜로디가 힘들면 깨워 준다고 했는데, 완곡하게 거절하지 않았나. 그래 놓고 보란 듯이 지각해 버렸으니…….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와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불편한 마음으로 하루 같은 30분을 보내고 드디어 게임에 접속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세 명에게서 귓속말이 날아왔다.

[귓속말] 개인주의: 카젤 형^^

[귓속말] 일시불: 이게 누구신가,,, 아홉 시간 만에,, 뵙는 카젤 형님이네,,, 조흔 쿰,,, 꾸셨나여?

[귓속말] 여름n모기: ㅋㅋㅋㅋㅋㅋㅋㅋ

그와 동시에 멜로디에게서 초대가 들어왔다.

<멜로디 님이 파티에 초대했습니다.>

친구 추가를 하지 않았음에도 바로 연락이 온 걸 보니 그동안 저를 열심히 검색한 것 같았다. 이미 예상했으므로 얌전히 초대받았다. 파티에 들어가자마자 이번엔 파티 대화창이 시끄러워졌다.

[파티] 개인주의: 카젤 형은 아마 미남일 거야. 여덟 시간 꿀잠 자는 사람이 못생겼을 리가 없어

[파티] 일시불: 눈빛이 초롱초롱하겠지?

[파티] 개인주의: ㅇㅇ 얼굴에서도 광채가 쏟아지고 있을걸

[파티] 일시불: 나는,, 다섯 시간밖에... 못 잤는데,,,

[파티] 개인주의: 그래서 네가 못생겼구나아

[파티] 일시불: 닥1쳐 줄래?

저를 놀리고 있는 와중에도 그들은 서로를 저격했다.

의자에 푹 기대며 고민하던 주하는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걸 보니 내기는 아직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명백한 제 실수였다.

[파티] 카젤: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네요

[파티] 여름n모기: 괜찮아요 카젤님 ^^;;

[파티] 일시불: 일곱 시간 주무신,,, 모기 형님,,, 정말 괜찮나요?

[파티] 개인주의: 지각생 두 분이 서로 의지하고 있네, 참 보기 조아요, 보기 조아! ㅇ.ㅇ

[파티] 여름n모기: ;;;

안타깝게도 여름n모기 역시 지각한 모양이다. 하긴, 기절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그렇게 힘들었는데. 동질감을 느끼며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죄송하다고 말하자 그동안 조용히 있던 멜로디가 드디어 반응했다.

[파티] 멜로디: 미남 카젤님

[파티] 멜로디: 충전은 다 하신 것 같은데

[파티] 멜로디: 이제 막 굴려도 되죠?

[파티] 멜로디: ^^

평소 잘 쓰지 않던 웃는 이모티콘까지 나온 걸 보니 작정하고 굴릴 모양이었다. 거기다 미남 카젤이라니. 푹 잤다고 놀리는 모습에 괜히 민망해졌다.

[파티] 카젤: 마음껏 굴려 주세요;;

[파티] 멜로디: 그 말 잊지 마요

뭘 얼마나 굴리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몸으로 때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주하는 한숨을 쉬며 안도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등줄기가 아직도 빳빳하게 서 있었다.

[파티] 멜로디: 일단 일퀘부터 하고 던전 가죠. 저쪽 팀은 던전 세 개째 돌다가 이제 자러 갔어요.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음

[파티] 카젤: 어? 생각보다 느리네요

[파티] 멜로디: 우리가 비정상적으로 빠른 거죠

[파티] 카젤: 오...

[파티] 멜로디: 그래도 네 시간은 좀? 누구는 푹 자고 왔는데 누구는 하염없이 기다렸네?ㅋ

[파티] 카젤: ㅈㅅ;

[파티] 개인주의: ㅋㅋㅋㅋㅋㅋ

[파티] 일시불: ㅋㅋ 카젤 형님 큰일 나따!!

그래. 굴려라, 굴려. 맘껏 굴리고 제자리에만 둬.

포기 상태로 돌입한 주하는 고개를 저으며 대도시인 일로리아로 귀환했다. 안 그래도 네 명이 기다리고 있는데 뭉그적거릴 시간은 없었다.

대장장이 NPC를 찾아 수리를 마치고 가방을 열어 보니 두 칸 남겨 두고 꽉 차 있었다. 정리도 안 하고 그대로 쓰러졌더니 아주 난장판이다. 평소 가방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쓰던 주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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