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배경 분위기를 느끼며 한 발자국 걸음을 내딛는데, 갑자기 화면 중앙에 붉은 글씨로 메시지가 나타났다.
<???의 귓속말: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구나…….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 너는 나의 어둠 안에서 절망과 좌절을 맛보게 될 것이니. 어디 애원하고 발악해 보려무나.>
최종 보스로 추정되는 누군가의 저주와 같은 말이었다. 이 지역 자체가 적의 소굴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는 대사였다. 그래서 이렇게 분위기가 다른 거구나.
맵을 열어 보니 지금껏 지나왔던 지역보다 압도적으로 넓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스토리의 시작이었다. 그동안 떡밥으로 풀어 놨던 것을 회수할 마지막 격전지.
이곳은 샤하스모르라는 지역이었다.
“그나저나 시야가 이상한데…….”
주하는 모니터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눈을 크게 떠보았다. 이렇게 하면 안 보이는 곳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하지만 안 보이는 건 안 보이는 거였다. 주하의 얼굴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일반적인 맵에선 유저들이 시야에 닿는 모든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샤하스모르 지역은 캐릭터를 중심으로 일정 거리만 밝혀져 있고, 외곽은 모두 어둡게 처리되어 있었다.
시점을 당기고 늘려 봐도 허락된 만큼의 공간만 보였다. 혹시 몰라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랜턴을 켜 보았다. 역시 별 소용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어두운 곳을 조심조심 돌아다니며 퀘스트를 진행했다. 한정된 시야 때문에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만의 재미가 있었다.
한 시간쯤 퀘스트를 따라가다 보니 저 멀리 완료 NPC가 보였다. 사선 읽기로 대충 훑어본 퀘스트 내용에서는 이곳이 조금 특별한 구역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조금은 기대되는 마음으로 다가가는데, 좁은 시야 안에 커다란 탑이 불쑥 나타났다.
“오.”
패치 내용에 있던 새로운 콘텐츠, 죄악의 탑이었다.
꽤 섬뜩하게 만들어진 타워는 높이가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쭉 뻗어 있었다. 마치 어느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어둠의 탑을 게임 속에 구현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엄청 스산하네.”
뾰족뾰족한 첨탑은 구름에 가려져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날아다니는 까마귀 떼의 울음소리가 스산한 적막을 일깨울 뿐이었다.
잠시 멈칫한 주하는 이내 패치 내용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죄악의 탑이 추가되었다는 안내와 유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 그 이외의 추가적인 정보는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금은 불친절한 공지였다.
다만 어느 정도 예측은 할 수 있었는데, 다른 온라인 게임에서 흔하게 나오는 콘텐츠가 바로 타워였기 때문이다.
타워는 한 층 한 층 오를수록 강한 몬스터가 나오고 그것을 깼을 때 상당한 보상을 주는 콘텐츠였다. 대개 1인용으로 진행되고, 랭킹이 측정되기도 했다. 온라인 게임만 해 왔던 그에게는 익숙한 콘텐츠였다.
주하는 퀘스트를 받고 곧바로 타워에 다가갔다. 초반은 딱히 어려울 게 없으니 퀘스트만 빨리 끝내고 나중에 차근차근 오르는 게 나았다.
그렇게 일렁이는 타워 포탈에 들어서는데.
“어?”
예상했던 로딩 화면이 아닌 시스템 알람이 나타났다.
<죄악의 탑에 입장하기 위해선 2인 또는 5인 파티를 맺어야 합니다.>
“뭐라고?”
2인 또는 5인?
타워 콘텐츠가 1인이 아니라 파티라고? 주하는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흔들리는 동공만이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 했다. 타워에서 튕겨 나온 카젤 캐릭터도 주인과 다를 바 없었다.
죄악의 탑은 메인 퀘스트이기 때문에 무조건 지나가야 하는 콘텐츠다. 그런데 여기서 파티로 진행해야 한다고? 주하는 믿을 수 없어서 다시 타워에 진입해 보았다. 하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카젤 캐릭터는 튕겨 나왔다.
뒤늦게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자 파티로 진행해야 한다는 사항이 적혀 있었다.
“……정말로?”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현재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제게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 퀘스트로 넘어갈 수 없다니. 여기서 누군가를 기다렸다가 같이 퀘스트를 해야 한다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타워 콘텐츠를 1인이 아닌 파티 콘텐츠로 만들었는지, 왜 메인 퀘스트에 집어넣었는지 말이다. 이런 콘텐츠가 있다는 정도만 알려 주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면 튜토리얼로 가볍게 방법만 알려 주든가.
당근 퀘스트 때부터 싸하다 싶었는데, 대체 뭐에 꽂혔기에 남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다르게 해석해 내놓는 거지? 주하의 눈가가 미미하게 경련했다.
“아……. 돌겠네.”
의자에 풀썩 쓰러진 주하는 몰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거칠게 문질렀다. 갑작스러운 파티 퀘스트에 발목이 잡혀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라니.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허탈함에 헛웃음을 뱉어내기를 여러 번. 비척비척 몸을 세운 그는 현재 지역에 누가 있는지 검색해 보았다.
[/누구 샤하스모르]
그러자 검색창이 팝업되었다. 결과 검색은 한 명. 자신뿐이었다.
조금만 천천히 할 걸 그랬나? 아니, 적어도 파티 퀘스트가 있다는 것만 알았어도 좋았을 텐데. 선두에 있는 유저랑 같이 달리면 되는 일인데 말이다.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꼼짝없이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주하는 이 상황을 이해해 줄 썩은물 친구에게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귓속말] 카젤: ...망했음
[귓속말] 벌꿀오소리: ㅇㅇ?
[귓속말] 카젤: 메인 퀘스트가... 파티퀘임 ㅠㅠ
[귓속말] 벌꿀오소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ㄹㅇ?
[귓속말] 카젤: ㅇㅇ;
[귓속말] 벌꿀오소리: 주변에 사람 없어요?
[귓속말] 카젤: 아싸라ㅠㅠ
[귓속말] 벌꿀오소리: 현실 대입하지 말고ㅋㅋ 찐으로 없음?
[귓속말] 카젤: /누구 샤하스모르
카젤이 명령어를 쳐 보라며 알려 주자 벌꿀오소리는 지역을 검색했다. 그의 말대로 샤하스모르에는 카젤 혼자만 덩그러니 있었다.
[귓속말] 벌꿀오소리: 미1친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없네ㅋㅋㅋㅋ 기다려요 금방 달려가겠음 ^^
[귓속말] 카젤: ㅅㅂ;;;
벌꿀오소리의 찐친 텐션에 주하는 좌절했다. 그는 정말 속도를 올리려고 하는지 길드 채팅창에서 천상검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길드] 벌꿀오소리: 천상님 빨리 좀 달려요! 느려!
[길드] 천상검: ??? 갑자기...?
[길드] 벌꿀오소리: ㅋㅋㅋㅋㅋㅋㅋ 빨리 달려야 댐^^
하…… 진짜.
만약 눈앞에 개발자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멱살 잡고 탈탈 흔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뿐이랴? 요즘 같은 시대에 신규 콘텐츠에 관한 정보를 누가 숨겨 두냐며 당장 공지 올리라고 윽박지를 수도 있었다.
웬만해선 좋게 좋게 넘기는 성향의 주하였지만, 이번만큼은 흑화해도 정상 참작이 될 만한 상황이었다. 주하 본인은 그렇게 믿었다. 어쩌면 조금 미쳐 가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어쨌든 누군가를 기다려야 한다면 최소 한 시간은 걸리겠지? 보석술사인 카젤이 이 지역에 들어와서 한 시간 있었으니 다른 유저들도 최소 비슷한 시간을 들여야 죄악의 탑까지 올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한 시간…… 한 시간이라…….”
주하는 뒤늦게 몰려오는 피곤함을 달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씻고 오는 게 낫겠다. 뭐라도 좀 먹고, 스트레칭도 하고.
인간임을 망각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터덜터덜 욕실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이 조금은 우울해 보였다.
***
컴퓨터 앞으로 돌아온 주하는 시간을 확인했다. 대충 보니 40분은 지난 것 같은데. 슬슬 다른 사람들도 이 지역으로 넘어오지 않았을까 싶어 지역에 누가 있는지 검색했다. 그러자 아까완 다르게 저 포함 여섯 명의 유저가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역시나. 썩은물들의 콘텐츠 소모 속도는 알아줘야 해.
PVP 지역이라 그런지 아이디와 길드는 보이지 않았지만, 5인 파티로 움직이는 것 같진 않았다. 5인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주하는 계속 기다려 보기로 했다.
30분쯤 지나자 좁은 시야 너머로 흐릿한 인영 하나가 보였다.
“……유저가 이렇게 반가울 일인가.”
기분이 묘했지만, 어찌 되었든 주하는 다가오는 이를 맞이할 생각으로 앞으로 뛰어나갔다. 어두운 안개 사이로 보이는 유저는 다행히도 한 명이었다. 그는 작게 안도하며 유저를 지켜보았다.
희게 일렁이는 인영을 보니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옷 때문에 그런지 제게 다가오는 유저가 마치 천사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 마른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이게 뭐라고 긴장하고 있는지 어이가 없었지만, 어쩌랴. 제 구세주임이 틀림없는데 말이다.
채팅창을 열어 둔 주하가 다정한 인사를 건네려 하던 그때였다. 드디어 흐릿했던 유저의 모습이 드러났다.
“……?”
그리고 그를 본 주하는 고장 난 기계처럼 우뚝 멈춰 버렸다.
‘안녕하세요’라고 입력창에 써 둔 글은 제 몫을 하지 못했다. 그는 주하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유저였다. 아니, 라나탈을 하는 유저라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네임드 유저였다.
리프 길드의 마스터이자 공대장, 정령사 랭킹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힐러, 멜로디였다.
그리고 지난 시즌에 제가 속한 자진신고 길드와 경쟁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고작 30분 차이로 퍼클을 빼앗겼던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제 구세주라니.
뒤늦게 정신 차린 주하는 침울하게 키보드에서 손을 내리곤 숨을 몰아쉬었다.
라나탈이 오픈한 이후 단 한 번도 레이드 랭킹 1위를 벗어난 적 없는 길드의 주인이 지금 제게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죄악의 탑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퍼클 전용 타이틀과 전용 아바타, 전용 탈것을 장착한 멜로디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주하는 결국 그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놔두었다. 묘하게 속이 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