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딜러 줍는 힐러-1화 (1/130)

1화

꽃과 나무가 있는 광활한 필드 위. 살랑이는 바람에 꽃잎은 춤을 추고 나뭇잎은 서로의 몸을 비비며 흔들었다.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까지 더해지고 은은한 배경음까지 흐르면 이곳은 실제로 존재할 것만 같은 파라다이스로 변한다.

그러나 평화로운 풍경과 다르게 길 좌우엔 몬스터들의 사체가 즐비했다.

이곳은 0과 1로 만들어진 폴리곤 덩어리의 세계. 수많은 유저가 플레이하는 게임 속 필드였다.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사체 무리에는 획득할 아이템이 있음을 알려 주는 반짝이는 이펙트가 가득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튀어나온 하얀 고양이가 스쳐 지나가고 나면 모두 회색으로 변했다. 주변에 남는 것은 젤리 모양 발자국뿐이었다.

아이템을 루팅1)한 하얀 고양이는 당당하게 주인 곁으로 돌아왔다.

“드롭률2) 실화인가.”

강주하는 가방에 들어온 퀘스트 아이템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여섯 마리씩 모여 있는 몬스터 무리를 스물다섯 번이나 잡았는데, 고작 열두 개를 모았다. 만약 이곳에 다른 유저가 있었다면 지금보다 몇 배의 시간을 잡아먹을 테지. 상상만으로도 목구멍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역시 확팩은 선두로 달려야 해.”

라나탈은 4년 차 온라인 게임으로, 지금까지 PC방 게임 순위 전체 4위를 유지하고 있는 인기 게임이었다. 일정 주기로 대규모 패치를 진행하는 라나탈은 이번에 두 번째 패치를 진행했다.

새로운 대륙과 새로운 스토리, 신규 던전과 추가되는 아이템, 거기다 기존에는 없던 콘텐츠가 나오는 만큼 확장팩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서버가 오픈되고 다섯 시간이 지난 지금, 가장 선두에서 달리고 있는 이는 강주하, 즉 카젤이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한 카젤은 꽤 화려한 아바타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검은색 로브에 한쪽 어깨에 달린 붉은색 망토, 각종 금빛 액세서리가 장식된 이 옷은 이전 시즌 레이드에서 획득한 레어 아바타였다. 최종 보스를 잡아야만 얻을 수 있는 명예로운 전리품이랄까.

그런 카젤의 주변엔 단 한 명의 유저도 보이지 않았다. 홀로 사냥터를 독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다른 유저보다 진행 속도가 빠른 것뿐이었다. 덕분에 쾌적하게 퀘스트를 하고 있으니 주하가 느끼는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최악의 드롭률을 가진 퀘스트를 마무리하고 조금 여유가 생긴 그는 지역 채팅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콘텐츠를 모두 소모하고 할 일이 없었던 지난 시즌 말기 때와는 다르게 지역 채팅창은 폭발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정신이 없지?”

확장팩 열렸다고 신났나? 새카만 눈동자가 유저들의 대화를 쭉 훑었다. 그런데 광기에 물들어 있는 지역 채팅창은 예상과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지역] 크리넥스: 아 진짜!!!! 당근 대체 어디다 숨겨 둔 거야

[지역] 라이칸: 나도 찾고 있는데 혈압 올라서 숨질 거 가틈 ㅅㅂ

[지역] 씬: 당근 주황색 맞죠? 아무리 뒤져 봐도 주황색의 ㅈ도 안 보이는데? 썩은 당근인가?

[지역] S오션2: 당근 퀘가 뭔데?

“하…… 당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옅은 짜증이 묻어났다.

주하는 불만스레 모니터를 노려보다 습관적으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당근만 생각하면 눈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지역] 크리넥스: 당근 줍는 퀘임. 농장 전체에서 찾아야 하는데 존1나 넓어; 거기다 여기저기 짱박아 뒀는지 보이지도 않아;;

[지역] 라이칸: 아니 보물찾기냐고;;;

[지역] 아프니까아프리카: 혹시 토막 내서 숨겨 둔 거 아닐까?

[지역] 크리넥스: 토막 당근이라니 개소름

[지역] 라이칸: 나 방금 드립 하나 생각났는데 말해도 돼?

[지역] 크리넥스: 하지 마

[지역] 라이칸: 아 왜!

[지역] 크리넥스: 당근 토막 살인 사건 ㅇㅈㄹ 하는 건 아니겠지?

[지역] 라이칸: ......ㅅㅂ

[지역] 크리넥스: 드립 공부 더 하고 와라ㅡㅡ

혼란스러운 지역 채팅창은 당근 줍는 퀘스트가 만든 결과물이었다.

유저들이 말하는 당근 퀘스트는 주하가 지금까지 해 왔던 수많은 퀘스트 중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퀘스트였다.

크리넥스의 말처럼 수색 범위가 상당함은 물론, 클릭해야 할 물체가 조막만 하기 때문이었다. 마우스가 조금만 삐끗해도 클릭이 되지 않으니 시점을 확 당겨서 봐야 했다. 거기다 나노 단위의 마우스 컨트롤까지.

확대경으로 수술하는 의사의 마음이 이럴까. 게임과 비교하는 게 어이없긴 하지만 그 정도로 정밀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물체가 작은 게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당근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은 당근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과거엔 당근의 모양을 하고 있던 그것’이라고 해야 옳았다.

주하는 헛웃음을 뱉어내며 지역 채팅창에 글을 썼다.

[지역] 카젤: 당근은 역시 토막도 내고 채도 치고 다지기도 해야지

[지역] 라이칸: ??????

[지역] 크리넥스: 먼 소리임??????

지역 채팅창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찼다. 무슨 소리냐 묻는 유저들에게 주하는 한 스푼 뺀 친절함을 보여 주었다.

[지역] 카젤: 12시 마구간 뒤쪽 지붕 사이 1개

[지역] 카젤: 3시 우물가 옆 돌과 돌 사이 1개

[지역] 카젤: 5시 큰 나무 아래 작은 동굴에 1개

[지역] 카젤: 7시 울타리 옆에 있는 벤치 아래 1개

[지역] 카젤: 마지막으로 농장 정중앙

[지역] 씬: 와 카젤님 감사합니다

[지역] 라이칸: 허억! 형님!!

[지역] 크리넥스: 슨생님! 복 받으실거야아아!

많은 인원이 그곳에서 막혀 있었던지 순식간에 엄청난 감사 인사가 쏟아졌다. 그러다 소중한 정보가 쭉쭉 밀려 올라간다는 것을 깨달은 유저들은 한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확장팩이 오픈되고 처음으로 조용해진 순간이었다.

그러나 당근을 찾으러 떠났던 유저들은 얼마 안 가 되돌아왔다. 잠깐의 고요는 거짓이었다는 듯 또다시 물음표가 퐁퐁 솟아났다.

[지역] 크리넥스: 뭐야 우물가 옆에 왔는데 왜 안 보여??

[지역] 라이칸: 울타리 옆에도 없는데???????

[지역] 씬: 마구간에도 없어요! 카젤님 이거 위치 맞아요??

[지역] 치킨은후라이드: 다르게 알려 준 거 아냐?

[지역] 아프니까아프리카: 뭐지? 이상한데???

족집게 선생님처럼 콕 집어 알려 줬음에도 불구하고 유저들은 당근을 찾지 못했다. 지역 채팅창은 불신과 물음표로 도배가 되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었으므로 주하는 고요히 웃었다.

[지역] 카젤: 시점 일인칭으로 쭉 당겨서 보면 됨. 러그 위에 있는 먼지 찾는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힌트까지 알려 주자 지역 채팅창은 또다시 물음표로 가득했다.

[지역] 치킨은후라이드: 러그 위에 먼지????

[지역] 아프니까아프리카: 비유 보소...?

[지역] 라이칸: 대체 얼마나 작길래? 오버 ㄴㄴ해

[지역] 크리넥스: 일단 찾아보기 ㄱㄱㄱ

[지역] 카젤: ㅋㅋㅋㅋㅋ

그렇게 유저들의 보물찾기를 가장한 당근 찾기가 시작되었다. 혼란과 의심의 시간이 얼마큼 흘렀을까.

[지역] 크리넥스: 이... 이... 이... ****들이

[지역] 라이칸: 뭐야 찾았어?

[지역] 씬: ...이게 당근이라고? 이게...?

[지역] 라이칸: 나만 못 찾아? 아 어딨는데!

드디어 당근을 찾은 유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필터링 된 욕설도 같이 올라왔다.

[지역] 크리넥스: *같은 놈들아! 당근이라며! 이게 무슨 당근인데! 말이 씹다가 뱉었냐? ㅈㄴ 흔적만 겨우 남은 적갈색 찌꺼기가 무슨 당근이야!!

[지역] 씬: 여긴 채 썬 당근이네요; 그것도 장인이 채 썰었는지 머리카락 같은 두께;;;;; 거의 반투명함;; ****들인가?

[지역] 아프니까아프리카: 여긴 흙 묻은 깍두기 당근. 근데 이게 흙이 묻은 당근인지 당근이 묻은 흙인지 모르겠음 마우스 막 움직이다가 얻어걸려서 찾음ㅡㅡ

[지역] Symphony: ㅁㅊ 모니터에 기어들어 갈 뻔;

[지역] 라이칸: 나도 알려 줘 ㅠㅠ

‘과거엔 당근의 모양을 하고 있던 그것’을 찾은 유저들은 분노했다. 발상의 전환은 이런 데다 쓰라고 나온 게 아닐 텐데. 극단적인 오용의 예라고 할 수 있었다.

퀘스트 설명 끝에 고작 ‘잘 찾아야 할 거야’라고만 써 놓고 힌트를 줬다고 할 수 있을까? 반투명한 채 친 당근, 잘게 다져진 당근, 흙더미에 묻혀 있는 당근이라니. 이 정도면 양심이 없는 게 확실하지 않나?

어쨌든, 퀘스트 하고 나서 한동안 눈알이 빠지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더니 당근의 ‘ㄷ’ 자도 보기 싫었다. 정말 역대급 최악의 퀘스트로 손꼽을 수 있었다. 주하는 언젠가 개발자들도 유저에게 당하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지역] 크리넥스: 까딱했다간 여기서 한 시간은 더 죽 쑤고 있었겠네 ㅅㅂ;;

[지역] 라이칸: 나도 알려 줘ㅠㅠ 대체 얼마나 작길래 그래?

[지역] 크리넥스: 뭐야 아직도 못 찾음? 혹시…… 틀이심?

[지역] 라이칸: 21살임;

[지역] 크리넥스: 노안이 일찍 왔네? 귓말해라 형이 조용히 알려 줄 테니까... 후우

[지역] 씬: 카젤님 감사합니다

[지역] 아프니까아프리카: 카젤님 ㄱㅅㄱㅅ

[지역] 크리넥스: 슨생님 감사!

[지역] 카젤: ㅇㅇㅋㅋ 수고요

꺼질 줄 모르고 활활 불타오르는 지역 채팅창을 뒤로하고 주하는 다시 퀘스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몇몇 유저가 지역 채팅창에서 카젤을 찾았지만, 이미 시선을 돌린 그에게는 닿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졌다.

반가운 알림창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길드원 벌꿀오소리 님이 접속했습니다.>

[길드] 벌꿀오소리: ㅎㅇ

혼자 쓸쓸히 길드를 지키고 있던 주하는 반갑게 벌꿀오소리를 맞이했다.

1) 게임에서 적을 쓰러뜨리고 나서 해당 적이 가지고 있던 물건, 혹은 적이 떨어뜨리는 물건을 가져가는 행위를 말한다.

2) 게임에서 적 몬스터를 처치했을 때 플레이어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확률. 또는 처치한 몬스터가 아이템을 떨어뜨릴 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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