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2/21)

2.

이천운은 그저 그렇고 그런 기자 나부랭이였다. 연예인들의 지저분한 가십을 팔아먹거나 자극적인 기사를 투고해 돈을 벌었다. 그로 큰 벌이는 할 수 없어도 밥 빌어먹고 살 만큼은 들어왔다.

한연동에 오기 전에도 자극적인 소재를 하나 찾았다. 돈 좀 만질 만한 기삿거리였다. 얼굴 좀 반반한 이들이 돈 많은 어르신들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죽어 나간다는 사실 기반 기사였는데, 하필이면 ‘돈 많은 어르신’ 중 한 명이 아직 정식으로 실리지 않은 기사 초본을 발견했다. 당연히 받았던 선금도 빼앗기고 기사는 삼류 잡지 구석에도 실리지 않았다. 이름은 천운이거늘 천운은 딱히 따라 주지 않았다.

손가락만 쪽쪽 빨고 살다가 우연히 눈에 확 뜨이는 소재를 발견했다. 종종 들르는 클럽에서 약에 만취한 인간이 허세를 부리며 떠들던 소리였다. 클럽에서 마약 하는 거야, 하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사실이라 기삿감도 되지 않는다. 약의 출처가 흥미로웠다. 약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클럽과 돈 많은 양반들을 위한 비밀스러운 놀이터, 그 이상을 운영하는 주인이 있다고.

물고 타고 쫓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기자의 감이 이번 소재는 제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수도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감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었다. 배팅해서 죽을 만큼 손해 본 적은 적었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순진하게 살지도 않았고, 도덕성이 높은 편도 아니었다. 기분 좋게 몸 섞고 큰돈 버는 게 오히려 천직인가 싶을 정도로 잘 맞았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본업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 수수료로 떼어 주고 나서도 뒤로 찔러 주는 팁이 아주 쏠쏠했다.

이천운은 여기 와서 딱 두 번 놀랐다. 하나는 주신도란 인간 그 자체에 대해서였고, 두 번째는 고등학교 동창 정해림을 우연히 만나서였다.

정해림은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이천운은 하나하나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해림의 손짓, 몸짓, 시선, 눈빛, 입술, 콧잔등과 턱선, 목덜미, 더운 날 교복 셔츠 너머로 설핏 보이던 곧은 쇄골까지도. 지금도 본가 창고를 뒤져 보면 멀리서 해림을 몰래 찍었던 사진들이 무더기로 나올 것이었다.

아련한 추억의 인물은 기억 속에서 고대로 뽑아낸 듯이 변한 게 없었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 여름날 개울물처럼 차가울 하얗고 결 좋은 피부, 사람을 끌어당기는 눈동자와 언젠가 꼭 한 번 입 맞추고 싶었던 입술도. 감시 카메라가 신경 쓰여 이쪽을 보지 말라 했지만, 이천운은 유리에 비친 해림에게서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쩌다 이런 산지옥에 끌려왔는지는 다른 이의 입으로 들었다. 부친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남은 빚을 아들에게 넘겼다고. 사채업도 겸하는 주신도가 해림을 보고 그 얼굴이 상품 가치가 높다 여겼는지 몸 파는 곳에 홀라당 집어넣은 것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지금은 제 옆구리에 끼고 야금야금 파먹기는 하는데.

천운이 버릇처럼 흡연실을 기웃거리면서 안에 누가 있나 확인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온다지만, 해림을 우연히 본 후로는 시간이 나면 수시로 담배 핑계를 대고 흡연실을 찾았다. 그날은 정말 운이 좋았던 날이었는지 그 후로는 해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운이 한 번 더 따라 줬다. 유리문 너머에 해림이 앉아 있었다.

해림을 몰래 훔쳐보던 그 시절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괜히 머리를 정리하고 표정을 가다듬고는 문을 열었다. 돌아보는 해림의 눈가에 수심이 드리워 있었다. 혹자는 해림을 두고 잘 빚은 도자기 인형이라고, 언제나 같은 표정이라고 흉을 보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미미한 변화가 보였다. 조금 더 짙어진 눈동자 색깔이나, 아주 살짝 아래로 쳐진 눈썹 끝이나, 다른 때보다 얇게 다물린 입술 등이.

“오랜만이네.”

일부러 거리를 두고 앉았다. 가까이 앉으면 저도 모르게 바짝 붙어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살냄새에 취할지도 몰랐다.

해림이 응, 그러네, 짧게 대꾸하고 입술 새에 담배를 끼웠다. 담배 피우는 모습도 어쩜 저리 사람을 홀리게 만들까. 천운은 담배 끝에 불을 갖다 대면서도 유리에 비친 해림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반면 해림은 시선에 둔한 건지, 아니면 상념에 빠져 눈치를 못 채는 건지 멍하니 바깥 숲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해림과 친해 보이는 이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건 소문으로 들었다. 설마 그 탓일까. 하나 이곳에서 목숨을 끊으려고 칼 대는 거야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우울증은 이 바닥에서 감기만큼이나 흔했다.

“아니, 그냥.”

해림도 우울증 초기일지도 모른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속까지 멀쩡하랴. 우울한 원인으로 사장이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해림이 본인의 의지로 그 옆에 붙어 있을 리가. 빚을 지고 왔으니 싫어도 싫은 티 못 내고 억지로 수청 들고 있는 거겠지. 여기 있는 이들 대부분이 그랬다.

고등학교 때 해림은 웃음이 많거나 밝지는 않아도 종종 다른 이의 농담에 미소를 짓고는 했다. 해림의 미소를 발견한 날이면 네 잎 클로버라도 발견한 것처럼 그렇게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더란다.

세월이 흐른 지금, 눈앞의 해림은 햇살을 쏙 뺀 흐린 하늘 같았다. 보고 있노라니 물고 있는 담배 끝이 소태껍질처럼 썼다.

“우리 고등학교 2학년 때, 윤리 담당 기억나? 그 왜, 매일 개량 한복 입고 다니고.”

같은 반은 아니어도 윤리 교사는 같았다. 해림이 멀거니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구나, 천운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사람이 머리카락이 엄청 풍성했잖아. 애들도 막 그 나이에 저 정도 머리숱이면 아버지한테 절해야 한다고 그러고. 그 사람도 그게 나름 자부심이어서 매일 머리카락 깔끔하게 올리고 다니고 그랬거든.”

말주변이 없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공통된 과거는 흥미를 이끌어 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였다. 해림이 시선을 천운에게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운이 일부러 뜸을 들였다. 해림의 두 눈에 궁금증이 담길 때까지.

“우리 강당에서 조회하던 날이었나. 갑자기 강당에 벌이 들어온 거야. 장수말벌 알지. 손바닥만 한 거. 날개 흔들면 드릴 돌아가는 소리 나는 거 있잖아. 그게 두 마리나 날아와서 다들 뒤집어졌어. 으아악, 소리 지르고 슬리퍼 벗어서 휘두르고. 어떤 놈은 바닥에 엎드려서 벌벌 떨고.”

해림도 그 강당에 있었다. 천운이 대각선으로 서서 그 동그란 뒤통수를 몰래 훔쳐봤기에 알았다. 기억이 났는지 해림이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윤리가 다들 앉으라고 소리를 질러도 우왕좌왕하느라 아무도 말을 안 들었단 말이야. 근데 그 말벌이 나한테 날아오는 거야. 나는 안전지대에 있었는데! 쏘이면 진짜 죽겠더라고. 그래서 막 도망갔는데, 하필이면 벌이 내 뒤에 있는 윤리 머리 위에 앉더라. 지 아버지 양봉한다던 미친놈이 그거 잡겠다고 슬리퍼 들고 뛰어다니다가 벌을 보고 냅다 후려치는데!”

손으로 쾅 하며 테이블을 때렸다. 해림이 어깨를 움찔하며 눈을 아주 살짝 크게 떴다.

“잘못 후려쳐서 윤리 가발이 훌러덩 벗겨졌어.”

천운이 문장 사이사이에 오디오처럼 웃음소리를 넣었다. 말을 마치고는 웃겨서 못 견디겠다는 양 낄낄거리자 해림의 표정이 약간은 느슨하게 풀렸다. 대놓고 웃지는 않아도 분위기는 전보다 좋아졌다.

“그렇게 모발이 풍성하다고 자랑하며 다녔는데 알고 보니 대머리였던 거야. 그거 보고 다들 뒤집어졌잖아. 거기다가 벌은 또 반짝거리는 거 좋다고 그 위에 앉아 있지, 그날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

정말 엉망진창인 시간이었다. 소란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웃다가 쓰러지는 놈, 벌 잡는다고 난리 치는 놈, 가발을 허둥지둥 주워 쓰던 윤리까지 그런 코미디가 세상에 또 없었다.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천운이 푸하하 신나게 웃음을 터트렸다.

긴 우스갯소리가 끝나고 나서 해림이 풋 하고 작게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햇살이 창 안으로 스민 듯이 사방이 밝게 빛났다. 해림의 눈가에서 조금이라도 우울한 기운을 지우고 싶어 손짓, 발짓 과장을 보탠 보람이 있었다. 천운의 어깨가 뿌듯하게 벌어졌다.

천운은 그 뒤로 제 인생에서 웃겼던 에피소드를 닥닥 긁어모아 정신없이 풀어놨다. 해림이 작게 웃어 주기라도 하면, 주렴 뒤에 숨은 미인과 눈이 마주친 촌뜨기라도 되는 양 심장이 사방팔방으로 뛰었다. 입에서 침이 바짝 마르도록 수다를 떨다가 해림이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시간을 확인한 후에야 입을 다물었다.

“해림아.”

가명을 불러야 한다지만, 천운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감시 카메라로는 소리를 들을 수 없을 터였다. 저라도 이곳에서 해림의 본명을 불러 주고 싶었다.

“내 이름, 이천운이야. 가명은 다른 거 쓰는데 넌 그냥 천운이라고 불러. 아, 우리 동창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말고. 나 여기 들어올 때 반 이상 구라 쳤거든.”

제 배에 적극적으로 올라탔던 구 사장이 아니었다면 꿈에도 못 꿨을 잠입이었다. 주신도가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차피 단기로 있을 놈 굳이 관심 줄 필요 없어서인지 세세하게 파고들지 않았다. 그래도 들켜 봤자 좋을 일 없어 입술 위에 검지를 세웠다.

“그래.”

해림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눈가에 진하게 남았던 우울감이 눈곱만큼은 가셨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성과였다. 천운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다음에 더 재밌는 이야기 해 줄게.”

해림이 웃을 수 있다면, 잠시라도 이곳이 어딘지 잊을 수 있다면 천운은 언제든 제 주둥이를 놀릴 자신이 있었다.

해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운이 고개를 돌렸다. 까만 카메라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한연동 어딜 가든 따라붙는 시선이었다.

“…….”

천운이 다른 곳을 바라보며 중지로 뺨을 긁적였다. 카메라에 잘 비치게끔 손가락을 바짝 세웠다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소심하고 유치한 반항이었다.

아무렴 어떠랴. 해림을 진흙 구덩이에 빠트린 인간이었다. 이 정도 귀여운 욕은 하늘도 눈감아 줄 터였다.

* * *

주신도가 그어 놓은 선은 어디까지일까. 어디까지가 용납 가능하고 어느 선을 넘으면 안 되는지 기준이 모호했다. 주신도를 붙들고 객관적인 보기를 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고. 속이 갑갑하니 피우는 담배 개수만 늘었다.

주신도와 단둘이 있는 상황도 불편해졌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놈의 선이라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이라도 되는 듯이 거리감을 만들었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거나 타인처럼 대하면 그나마 좀 낫겠으나, 주신도를 보면 또 그렇게는 할 수가 없었다. 반면 주신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해림을 대했다. 예전처럼 똑같이 베개 취급을 하고, 허벅지에 인형처럼 앉혀 얼굴과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도련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도 변화는 없었다.

해림의 마음은 어수선한데, 주신도는 여전히 제멋대로였다. 선을 지키는 건 오로지 해림에게만 떨어진 과제라는 듯이.

“도련님, 팔.”

한참 목덜미를 새처럼 쪼던 주신도가 불만스레 말을 던졌다. 허벅지에 앉혀 놓은 걸로는 모자랐는지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고 몸을 바투 붙였다. 해림이 두 팔을 얌전히 주신도의 목에 걸었다. 잘했다는 칭찬처럼 입술에 뽀뽀가 떨어졌다.

입맞춤도 속을 뒤엉키게 하는 원인이다. 차라리 물건처럼 저를 아무 데나 던져 놓고 잊어버렸으면 싶었다. 무엇도 한 게 없는데 고된 하루를 보낸 듯이 팔다리가 묵직했다.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올게요.”

이런 속을 가라앉히기에 흡연만 한 게 없다. 해림이 꾸물꾸물 내려가려고 몸을 틀었다. 허리에 감긴 팔이 꿈틀하더니 뱀 똬리처럼 조여들었다. 흡, 하고 해림이 숨을 들이켰다.

“도련님, 요새 흡연실 자주 가더라.”

주신도가 저 있는 곳에서 해림의 흡연을 금하니 담배를 피울 곳은 한 곳뿐이었다. 그 외의 이유는 없건만, 주신도는 다른 이유라도 캘 듯이 고요하게 해림을 응시했다. 아래로 냉정하게 처져 있던 입꼬리가 해림과 눈이 마주치고는 매끄럽게 올라갔다.

“거기에 나 몰래 좋은 거라도 숨겨 놨어?”

장난기가 담긴 목소리. 귓가에 쪽쪽거리며 쏟아지는 입맞춤도 긴장을 풀라는 듯 가벼웠다. 해림이 귀와 어깨가 맞닿게끔 움츠렸다.

“아뇨.”

“근데 왜 계속 가려고 해.”

“그냥…….”

가끔 시간이 맞으면 천운을 만나기는 하나, 목적은 어디까지나 흡연이었다. 그래, 하고 주신도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귀찮게 뭐 거기까지 가. 그냥 여기서 피워.”

“사장님 앞에서 피우지 말라면서요.”

“우리 예쁜 도련님이 그렇게 피우고 싶다는데, 내가 또 봐줘야지 어쩔 거야. 줄이는 게 좀 힘들지. 나도 해 봐서 알아. 껌이니 패치니 다 소용없더라고. 짜증만 나고.”

주신도가 방긋 웃고는 서랍에서 담배를 꺼냈다. 해림의 입에 친절하게 물려 주고 불도 붙여 준다. 끝이 타들어 가는 담배를 물고도 해림은 마음껏 들이마시지 못했다. 담배를 찾게 하는 원흉이 코앞에서 지켜보는데 연기를 아무리 들이켠다 한들 속이 풀어질까.

“재 떨어진다.”

해림이 담배를 물고만 있자 주신도가 손수 거둬 재떨이에 재를 털어 줬다. 해림의 입술에 다시 물릴까 하더니, 방향을 바꿔 제 입에 문다. 볼이 훌쭉하게 들어가도록 빨아들이고는 고개를 틀어 흐릿한 연기를 뱉었다. 담배는 이렇게 피우는 거라고 어린애한테 알려 주듯이.

“우리 도련님은 전생에 다람쥐였나, 왜 이렇게 쏠쏠거리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나 몰라. 그러다 누가 주워 가면 어쩌려고.”

“…….”

“뭐든 적당히 해야지, 도련님. 담배도 적당히 피우고, 바람도 적당히 피우고.”

“바람이요?”

“허파에 바람 들어서 자꾸만 나돌아 다니잖아. 그게 바람난 거 아니면 뭐야.”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반박하려고 입을 여는데, 주신도가 담배를 끄고 양 검지로 해림의 입술 끝을 눌렀다. 볼이 옴폭 들어가며 입꼬리가 반강제로 위로 올라갔다. 입술만 웃는 그 얼굴을 보며 주신도가 히죽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참 착한 거 같아. 도련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해? 이 정도면 씨발, 상을 포대로 받아도 모자라.”

선행을 한 번이라도 베푼 사람들이 죽을병에 걸려 다 죽어 나가도 주신도는 홀로 꿋꿋하게 살아남을 터였다. 해림이 기가 차서 하, 하고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주신도가 대답 잘 들었다며 귓가에 대고 키득거렸다.

“도련님. 키스 좋아해?”

그 밤에 무심하게 던졌던 그 질문을 주신도가 뜬금없이 다시 꺼냈다. 그때도 대답을 내놓기 어려웠는데, 오늘은 한술 더 떠 양 입술에 바느질이라도 한 양 열리지 않았다. 혓바닥마저 무거웠다.

“대답해야지.”

이미 답을 알면서. 주신도가 해림의 목덜미에 뺨을 문지르며 어서, 하고 졸랐다. 늪처럼 속을 알 수 없는 검붉은 눈동자를 들어 시선을 맞추고 해림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걷어 넘겼다.

별것 아닌 작은 접촉에 해림의 귓바퀴 끝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사람을 둥실둥실 띄워 주다가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매정한 성격을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렸다. 말을 뱉고 싶어 입술이 근질거렸다.

“대답.”

흔들리는 마음만큼 망설임이 말꼬리를 잡았다. 두려움이었다. 그깟 말 한마디가 뭐라고 이렇게 입 밖으로 꺼내기 무서울까. 나진이 물었을 때는 의미를 몰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잘만 뱉었거늘. 주어가 사람도 아니고 한낱 입맞춤일 뿐인데.

아무 의미도 없다, 전과 같은 빈말이다, 그 말은 저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해림이 속으로 되뇌며 눈을 감았다. 주신도의 눈동자를 보면 간신히 끄집어낸 말이 도로 목구멍 속으로 도망칠 것이었다.

“……해요.”

“안 들려. 뭐라고?”

“좋아해요.”

속이 텅 비어야 할 말에 주신도의 입술이 흐느적 늘어졌다. 흡족한 미소가 햇살처럼 떠올랐다. 억세게 허리를 주물럭거리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아프게 쥐어짠 걸 사과라도 하듯이 느긋하게 쓸어내리며 그 아래로 내려갔다. 엉덩잇살이 담뿍 잡혔다. 해림이 어깨를 움찔 떨며 주신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잘했어, 착해. 강아지에게 건네는 칭찬이 귀밑에 닿았다.

“근데 도련님, 대답하라고 하면 뜸 들이지 말고 바로바로 해야지. 사람 애태우는 것도 아니고.”

무슨 심정으로 그 말을 뱉은 줄도 모르고. 눈가가 뜨끈했다. 해림이 표 내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도련님이 좋아하는 거 해 줄게. 알지, 나 착한 거. 고개 들어.”

머뭇거리자 주신도가 해림의 뒷머리를 잡고 억지로 어깨에서 떼어 냈다. 입술이 부딪치고 열리고 뒤섞였다. 다른 때보다 거칠어 깨물린 입술에서 핏물이 올라왔다. 아픔에 눈살이 구겨져도 그만하라는 말은 목구멍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밀치는 대신 해림이 주신도의 어깨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벗어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깨물린 입술에서 일어난 통증이 가슴으로 내려왔다. 욱신거리는 통증을 외면하듯 일부러 팔에 힘을 주고 주신도를 끌어당겼다.

이형이 조금은 나아졌는지 궁금했다. 두 발로 찾아가지는 못했다. 그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 그렇게 행복해하냐고, 제일 밉다던 그 말이 용기를 가지처럼 싹둑 잘랐다.

어쩌다 용기를 내어 가더라도 휴게실까지였다. 차마 이형의 방에 들를 수는 없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아 근처만 서성이다 돌아오길 몇 번이었다.

우연처럼 누구라도 만나면 물어볼 것을. 요새는 다들 바쁜지 코빼기도 보기 힘들었다. 휴게실에 가도 혼자 적적하게 음료수나 한 캔 마시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해림은 휴게실이나 흡연실에 들르는 발길을 끊지 않았다. 주신도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집에 가면 당연하게 들러붙어 있고, 사장실에서도 그 눈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어딜 가든 꽂히고야 마는 시선에 해림이 숨통을 트일 수 있는 공간은 흡연실이나 휴게실뿐이었다.

어쩌다 주신도가 자리를 비울 때 몰래 나오는 게 습관이 됐다. 오래 있지는 못했다. 들키면 주신도가 무슨 성깔을 부릴지 몰라 쉬는 시간은 보통 10분 안팎이었다. 그마저도 다 채우지 못하고 돌아갈 때가 많았다.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해림이 황급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느 날 주신도가 해림의 손목에 말없이 채운 시계였다. 척 봐도 억 소리 나는 비싼 물건이라 이게 뭐냐고, 영 찝찝해서 거부하려고 했더니.

「풀고 싶으면 말해. 영수가 이번에 손도끼 새 거 하나 사 놨더라. 날 잘 갈아 놨던데.」

하며 손목을 잘라 버리겠다고 에둘러 협박했다. 버리지도 못하고, 손목에 집 한 채 짊어진 무거운 마음으로 시계를 받았다.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주신도인 줄 알고 해림이 벌떡 일어났다. 아직 나온 지 5분밖에 안 된 거 같은데. 겉은 평연하되 속으로는 초조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해림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우와, 이게 누구야. 되게 오랜만이다.”

케이가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얼마나 명랑하게 인사하는지, 겉만 보면 둘 사이에 불쾌한 사건 같은 건 털끝만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사실 분노는 희미하게 퇴색되어 있었다. 해림은 감정을 격렬하게 일으키는 사람이 아닐뿐더러, 분노를 표출하기엔 시간이 이미 많이 흘렀다. 물론 케이가 저에게 저지른 짓이 잘못임은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의심도 안 하고 쫄래쫄래 따라간 제 탓도 역시 있음을 알았다.

케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음료를 뽑아 해림의 앞에 털썩 앉았다. 빤히 올려다보다가 목 아프다며 앉으라고 손짓을 한다. 만나면 도의적인 입장에서 주먹으로 한 대 후려치려고 했는데,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제 시간을 내어 줄 사이도 아니라 해림이 몸을 틀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도망가. 주신도가 빨리 오래?”

그 입에서 자연스레 나온 이름에 해림의 고개가 돌아갔다. 케이가 턱을 괴고 음료수를 홀짝였다. 오래 앓은 병자처럼 뺨이 야위어 눈두덩 아래 광대뼈가 불거졌고, 소매 사이로 비치는 팔목도 거죽만 겨우 뼈 위에 붙어 있는 모양으로 가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지하 구경 잘했어. 주신도 하고 별 사이 아니라더니, 거짓말도 맹랑하게 잘하대.”

케이의 행방을 물었을 때 주신도가 뭐라고 그랬더라.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충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케이를 어디에 처박았을지 대충 짐작은 했는데, 몰골을 보니 고생이 이루 말할 정도가 아니었던 듯싶다.

“그래. 주신도한테는 예쁨 잘 받고 있고? 애들이 다 난리더라고. 주신도가 그쪽을 물고 빨고 장난 아니라면서. 좋아? 잘해 줘? 주신도가 좆질은 정말 잘한다던데. 하고 나면 애들이 다리가 후들거려서 걷지를 못한다더라. 나도 그거 한번 따먹고 싶어서, 씨발.”

이런 개소리를 듣자고 걸음을 멈춘 게 아니다. 쉬는 시간만 아깝게 날렸다. 해림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근데 그거 알아? 주신도가 예뻐하는 거, 한 철이면 끝나.”

해림이 멈칫했다. 머릿속 깊숙한 곳, 아주 깊은 곳에 묻어 둔 불안감을 케이가 건져 올렸다. 바로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해림의 경직된 등을 알아차린 양 케이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한 철이 뭐야. 일주일은 가나. 떡만 쳐도 며칠 뒤에는 다른 애들로 갈아치웠는데. 지금은 좋지. 그럴 거야. 얼마나 좋겠어. 몸을 팔아, 맞기를 해, 지하에 가길 해. 아무것도 안 하잖아. 주신도 옆에 딱 달라붙어 있기만 하면 세상에 무서울 거 없이 편하지. 안 그래?”

“…….”

“근데 그게 과연 얼마나 더 갈까. 한 달? 두 달? 주신도 그 새끼, 내가 그래도 너보다 오래 봐서 알아. 뭐든 빨리 질리는 잔인한 새끼야, 그거. 가지고 놀다 아니다 싶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지 장난감 목록에서 빼 버리지. 그런 애들 많이 봤어. 울고불고 매달리고. 결국 손목이나 긋고 목이나 매고.”

해림의 뺨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계속 들으면 안 된다. 그랬다간 불안이 기어이 심연을 비집고 나와 마음을 장악할 것이다. 그 전에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다리를 채근했으나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숨긴 게 이런 거 아니었느냐며, 케이가 소리를 높였다.

“애초에 사람을 사람 취급 안 하는 새끼인데 너라고 다를 거 같아? 곧 버림받을 거야, 너. 지하로 끌려가든 장기를 털리든, 돈 뽑아내고 버릴 거라고.”

이를 악물고 뱉는 소리가 저주에 가까웠다. 주신도가 그럴 리 없다고 부인하지는 못했다. 머릿속에 그려졌었다. 이형에게 보냈던 차가운 눈길을 저에게도 보낼 날이 올 거라고, 하루 매출을 따지고, 손님과 밤을 보내도 잘했다고 웃으며 칭찬하는 날이 결국 오고야 말 거라고.

“아니면 애초에 주신도는 널 남창 이상으로 안 봤던지.”

의자가 덜커덩거리며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케이가 성큼 다가와 해림의 손목을 낚아챘다. 묵직한 시계를 보고는 하, 하며 코웃음을 친다.

“이게 화대가 아니면 뭔데.”

해림이 손목을 뿌리쳤다.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가 케이의 멱살을 붙들었다. 가벼운 몸뚱이가 위로 훌렁 끌려 올라왔다. 발끝으로 바닥을 딛고서 케이가 해림의 손을 움켜잡았다. 안간힘을 쓰며 비틀어도 손등에 핏줄이 솟은 손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왜, 내가 정곡이라도 찔렀어?”

목이 눌려 캑캑거리면서도 케이가 히죽거렸다. 다친 동물을 나뭇가지로 쿡쿡 찔러대는 아이같이 비릿한 비웃음을 입가에 걸치고서.

흔들리는 눈동자를 케이가 즐겁게 쳐다봤다. 승리를 예감한 듯이 입가에서 미소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케이가 새처럼 이어서 재잘거렸다.

“널 대체할 애들은 널렸어. 언젠가 너도 다른 애들처럼 복도에 서서 그 꼴을 네 눈으로 지켜볼 거야. 내가 그랬듯이. 주신도가 너 아닌 다른 애를 예뻐하는 모습을, 네 눈으로 직접.”

한 장면, 한 장면 머릿속에 그려지도록 케이가 한 문장, 한 문장 떼어 강조했다. 멱살을 쥐지 않은 해림의 다른 손에도 힘이 불끈 들어갔다. 주먹이 올라오려다가 말았다. 침묵이 가라앉은 둘 사이를 틱, 하고 초침이 흘러가는 소리가 메웠다.

이윽고 해림이 손을 풀었다. 케이가 허억, 숨을 들이켰다. 똑바로 서 있는 것도 힘에 부치는지 비틀거리다가 테이블을 짚고 몸을 수그렸다.

“……그러고 보니.”

그런 케이를 빤히 보다가 해림이 입을 열었다. 잘게 떨리던 눈동자는 어느새 원래 위치를 되찾았다. 시선을 내려 시간을 확인하고 해림이 테이블에 놓인 캔을 손에 쥐었다. 음료가 반쯤 남아 캔 안에서 찰랑거렸다.

해림이 아직도 숨을 고르는 케이의 뒤통수를 휘어잡고 테이블에 내려찍었다. 쾅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케이가 신음과 욕을 뱉었다. 무슨 짓이냐고 반항하는 걸 힘으로 내리누르고 망설임 없이 케이의 정수리 위에서 캔을 뒤집었다. 기포 어린 까만 액체가 해림의 손등과 케이의 머리 위로 콸콸 쏟아졌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고는 해림이 캔을 내려놨다.

“저번에 고맙다는 말을 깜박해서. 덕분에 지하 구경 잘했어. 고마워.”

엎어져서 씩씩거리는 케이의 목덜미에 해림이 젖은 손을 문질러 닦았다. 케이가 온갖 욕을 뱉으며 해림을 노려봤다. 달려들어도 승산이 없음을 아는지 섣불리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충동에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속이 시원하지는 않았다. 손에 끈적하게 묻은 액체만큼이나 마음에도 찝찝함이 남았다.

지치지도 않는지 아직도 씨근덕대며 죽여 버릴 거라고 욕하는 케이를 두고 해림이 돌아섰다. 통쾌함도 뭣도 없었다. 케이가 화대라고 꼬리표를 달아 준 시계는 손목을 몸에서 떨어트릴 듯이 무겁고, 사장실로 향하는 발걸음 역시 목까지 차오른 물살을 헤치듯 더뎠다.

하나 갈 곳이 없다. 해림이 자꾸만 쳐지는 발을 질질 끌었다. 기다리는 이도, 가야 할 곳도 하나뿐이었다.

* * *

최근 해림과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 천운이 휘파람을 불며 흡연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유리문 너머로 흐릿한 인영이 비쳤다. 흡연실이라고 해 봤자 이용하는 이는 저나 해림, 그 외엔 소수뿐이라 천운이 헤벌쭉거리며 문을 열었다.

“해……!”

그러고는 얼음처럼 굳었다. 담배를 막 입에 문 주신도가 천운을 돌아봤다. 천운이 입을 합 다물었다.

“뭐 해, 안 들어오고.”

낮고, 싸늘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사람을 멋대로 조종하는 목소리였다. 주신도를 처음 만난 날을 상기시키는 저음이었다.

얼마나 강렬했는지, 천운은 그날을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베일에 감춰진 인물을 드디어 만났다는 흥분은 뒤로 젖혀 두고, 주신도란 사람 자체가 그저 놀라웠다. 잘생긴 외양을 떠나 첫인상은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었다. 송곳니와 발톱과 날 것 같은 근육을 인피(人皮)와 정장으로 애써 감추고 사람 행세를 하는, 속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담배 냄새와 향수로도 감출 수 없는.

천운이 가까스로 웃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인형처럼 입술 끝만 삐죽 올린 어색한 미소였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떠올라서.”

“에이, 아직 출근 시간도 안 됐는데 급한 일은 무슨. 이리 와. 여기까지 왔는데 한 대 피우고 가.”

상사의 담배 권유를 거부할 권리 따위 제게 있을 리가. 천운이 삐걱대며 걸어갔다. 주신도가 제 옆자리에 앉으라며 의자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 있더라도 대각선으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고 싶건만.

천운이 주신도가 권해 준 자리에 앉아 힘겹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 불이 안 켜져 한참을 헛손질했다. 다른 이들이 주변에 있으면 그래도 적당히 허세를 부릴 수가 있는데, 단둘이 있자니 자꾸만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되는 인간이었다.

“여기.”

주신도가 지포 라이터 뚜껑을 툭 열고 불을 붙여 줬다. 천운이 머뭇거리다가 길게 솟은 불길에 담배 끝을 지졌다. 민무늬에 은색 지포 라이터. 흔한 모양이나 오른쪽 아랫부분에 흠집이 깊게 난 게 예전에 해림이 가져왔던 그 라이터와 똑같았다.

“감사합니다.”

얼뜨기처럼 말을 더듬을 뻔했다.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떨리는 심정을 내리눌렀다. 처음 대면하는 것도 아니고, 몇 번 마주치기까지 했건만 무슨 일인지 머리끝이 쭈뼛쭈뼛 섰다.

반면 주신도는 천하태평이었다. 정말 담배 한 대가 목적인 양 편하게 연기를 들이마셨다. 단단한 광대뼈가 뺨 위로 설핏 드러났다가 사라지고, 입술 새로 가느다란 연기를 느릿느릿 내뱉는 모습이 한 폭의 명화가 따로 없었다.

다시 봐도 기가 막힌 외모였다. 지금까지 제 인생에서 실물을 보고 감탄한 사람은 정해림과 유백영 단둘이었건만, 거기에 주신도가 추가됐다.

주신도는 다른 점을 다 떼어 놓고 외모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홀렸다. 구미호에 버금가는 실력이었다. 특히 붉은색이 감도는 눈동자가 남녀노소 막론하고 시선을 빼앗는데, 거기에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언행이 섞이면 이건 뭐, 답도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늪처럼 빠져 허우적거릴 터였다.

다행히 천운은 주신도에게 기자로서의 호기심 외에 다른 관심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제 인생을 늪에 던져 버리는 어리석은 일도 사서 할 리 없었다.

“일은 할 만하고?”

흘끔거리며 훔쳐보다가 주신도가 말을 걸어 천운이 뒤로 넘어갈 듯이 놀랐다. 손에 건 담배 끝에 길게 늘어져 있던 재가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주신도가 혀를 쯧쯧 차며 천운의 허벅지를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었다. 제 허벅지도 가는 편은 아닌데 주신도의 큼지막한 손바닥에 비하면 한 줌 거리였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런데도 천운은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짐승의 굵고 날카로운 손톱 끝이 허벅지에 스친 양 온몸의 근육이 일순 단단하게 굳었다.

“예. 할 만합니다.”

간신히 혀끝을 움직여 대답했다. 주신도가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테이블에 내려놨다. 천운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응. 예약률 늘었더라. 잘하고 있던데.”

덤덤한 칭찬. 이미 다른 이들에게 들은 바 있었다. 사장이 칭찬하면 그게 그렇게나 기분이 좋다고. 천운은 칭찬도 귓등으로 넘겼다. 주신도가 하는 말에 휩쓸리면 저 역시 그 맹목적인 집단에 발을 걸칠지도 몰랐다.

“감사합니다.”

“감사까지야.”

대화가 잠시 끊겼다. 차라리 빨리 피우고 가자고 천운이 담배 연기를 뻑뻑 들이마셨다. 한데 항상 피우던 담배가 오늘따라 더디게 타들어 간다.

“그쪽, 정하하고는 많이 친한가 봐. 둘이 이야기도 많이 나누는 거 같더라.”

주신도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날씨 묻듯이 여상한 말투였다. 천운은 올 게 왔구나 싶었다. 사장이 끼고도는 남창, 사장의 새로운 장난감. 해림을 가리키는 수식어는 그다지 곱지 않았다. 해림이 언제 팽당할지 내기를 거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예. 여기서 종종 만나서.”

흐음, 하고 주신도가 담배를 쥔 손 엄지로 이마를 긁적였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천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먹을 꾹 쥐고 천운이 고개를 들었다. 주신도는 여전히 무섭지만, 이상한 용기가 가슴을 뛰게 했다. 분노와 색이 닮은 감정이었다.

“만나면 무슨 이야기 해? 우리 정하가 얼굴은 참 예쁜데 말주변이 별로 없어서.”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요.”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

동창이라는 사실은 밝힐 수 없었다. 머리를 굴리며 해림도 저도 무사히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다. 평소에는 잘만 짜내던 변명이 주신도 앞에서는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주신도가 대답을 기다리며 천운의 눈을 응시했다. 천운이 눈알을 다른 쪽으로 도르르 굴렸다.

“여기 식당 샌드위치가 맛있다더라고요, 정하가.”

“정하가 그걸 잘 먹기는 하지. 외국에서 오래 있어서 그런가 빵을 그렇게 좋아해. 잼 발라 줘도 잘 먹고.”

주신도는 해림을 줄곧 정하라 칭했다. 실수로라도 한 번쯤 본명을 부를 만한데. 정말 잠깐 가지고 노는 남창 취급하는 걸까. 남들이 떠들던 대로 얼마 못 가 관심을 끄고 다른 이들처럼 하수구에 던져 버릴까.

화가 울컥 솟았다. 해림은 그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천운에게 해림은, 주신도의 노리개로 전락할 사람이 아닌, 누구보다 소중하고 귀하게 대접받아야 할 이였다.

“저도 귀가 달려 있어서 소문은 들었습니다. 사장님이야말로 정하하고 많이 친하시다면서요. 예뻐하신다고.”

“그럼. 많이 친하지. 그건 갑자기 왜.”

“얼마나 친하십니까?”

“신입이 별걸 다 궁금해하네.”

“저도 내기 좀 걸어 보려고요. 정하가 사장님 곁에 얼마나 오래 붙어 있을지. 저한테만 살짝 알려 주십쇼. 큰돈 벌어서 선금 바로 갚겠습니다.”

젖 먹던 용기까지 다 끌어모아 천운이 떠들었다. 주신도가 엄청 웃긴 이야기를 들은 듯이 와하하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 속에 교묘하게 섞은 진담을 못 알아들은 애처럼 낄낄거리고 웃던 주신도가 와, 하며 웃음을 거둬들였다. 입가에 미미하게 미소가 남아 천운도 모르는 척 입술 끝만 방긋 끌어 올렸다.

“인기 많은 이유가 있네. 입을 참 잘 털어.”

천운이 하하, 웃었다. 진심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었다. 사람들이 해림을 내기 거리 삼는다고 알려 줘도 웃어넘기다니.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근데 관심이 조금 지나쳐. 내가 우리 정하를 버릴지 말지 그쪽이 무슨 상관일까. 왜. 내가 버리면 그쪽이 데려갈 거라? 우리 정하 비싼데. 좀 많이 비싸.”

“얼만데요?”

천운의 말끝이 뾰족하게 날이 섰다. 저도 몸 파는 입장이니 주신도가 남에게 값을 매기든 말든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데, 해림은 다른 사람에게 그랬듯 넘길 수가 없었다.

“글쎄. 얼마 받을까.”

주신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담배가 짧게 타들어 갔다. 마지막으로 연기를 머금고 담배 끝을 테이블 위에 짓눌렀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창밖으로 꽁초를 툭 던지고서 주신도가 돌아봤다. 가소롭다는 눈빛을 하고 실실 웃는다.

털이 삐쭉삐쭉 서면서 눈앞에 있는 걸 더는 건들지 말라고 위험 신호를 보냈다. 웬만하면 본능을 따르는 게 좋았다. 한데 무슨 오기가 생겼는지, 천운이 눈을 똑바로 뜨고 시선을 맞받아쳤다. 주신도가 해림을 마치 제 손으로 주물럭거리는 찰흙 한 덩이 취급하는 게 무척이나 불쾌했다.

“사장님. 정하, 얼마 주면 풀어 줍니까.”

“왜. 그쪽이 사게?”

“한번 돈이나 모아 보려고요. 얼마입니까.”

“당돌하네. 우리 정하가 예쁘긴 하지. 반하기라도 했어?”

반했다. 사실은 처음 우연히 본 그날부터. 주신도가 해림을 발견하기 훨씬 이전부터. 정의와 도덕을 부르짖는 사람은 아니나 해림이 이런 더러운 바닥에서 구르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설령 아주 미미하더라도 돕고 싶었다. 범죄나 일삼는 범죄자 나부랭이가 해림을 가지고 노는 게 아니꼽고 싫었다.

“예.”

그래서 천운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머릿속에 경고음이 요란했지만 말은 이미 입 밖으로 나갔다.

“해림이, 제 첫사랑이라서요.”

문장에 점이 찍히기 무섭게 왼쪽 손등에 불이 붙었다. 화끈한 통증이 손등을 관통해 허벅지까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천운이 길게 비명을 질렀다. 큰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이 얼추 잦아들고 나서야 손을 뗐다. 언제 꺼냈는지, 나이프를 쥔 손은 그대로 천운의 손등에 붙어 있었다. 손과 허벅지를 꼬치처럼 나이프로 꿰고서, 주신도가 허리를 수그렸다.

“아이고, 손이 잘못 나갔네. 괜찮아? 내가 일이 일이다 보니까 가끔 이렇게 손이 제멋대로 나가고 그래.”

천운이 손목을 잡고 벌벌 떨었다. 주신도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칼날을 뽑았다. 천운의 어깨가 크게 흔들리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왼손 한가운데서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검은 바지로 가려진 허벅지에도 짙은 핏물이 배어 나왔다.

“그래도 그쪽이 구 사장한테 예쁨받아서 왼손으로 봐준 거잖아. 여기……, 아닌 게 어디야.”

목덜미와 목선에 입김이 닿았다. 입술도 닿을 듯 말 듯 야릇했다. 하나 천운은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 솜털이 곤두서는 소름이 긴장과 공포와 고통을 밑거름 삼아 일어났다. 주신도가 짐승처럼 주둥이를 쩍 벌리고 날 선 송곳니를 목덜미에 박을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망상이 현실처럼 느껴졌다.

“너무 겁먹지는 말고. 내 것만 안 건들면 돼.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에요.”

손등이 타들어 가는 통증에 천운은 어떤 대답도 못 했다. 주신도가 피가 철철 나는 상처에 바람이라도 호호 불어 줄 듯 쳐다보다가 눈가를 찌푸렸다.

“어휴, 많이 아프겠다. 닥터한테 가 봐. 흉터 덜 남게 치료 잘해 줄 거야.”

저가 더 아프다는 얼굴이 가증스러웠다. 한술 더 떠 테이블에 올려놓은 손수건으로 손등의 상처를 꾹 눌렀다. 지혈보다는 고통을 더하려는 듯이 손아귀 힘이 억셌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천운을 두고 주신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 묻은 나이프를 푹 수그린 천운의 목뒤에 슥슥 문질러 닦고 날을 접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것처럼 잠깐 걸음을 세웠다. 아직도 웅크린 채 떠는 천운을 보며 주신도가 휘파람 불 듯 경쾌하게 떠들었다.

“그러게,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여기서는 본명 부르는 거 아니라고.”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주신도가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흡연실을 나갔다. 천운의 앓는 신음만 간간이 터져 나와 공간을 떠돌았다.

이내 천운이 이를 악물고 코로만 들숨 날숨을 거칠게 뽑아냈다. 이로써 제 안위를 위해 미뤘던 결정과 다짐이 더욱 확고해졌다. 눈앞에 주신도가 앉아 있는 양 천운이 도전적으로 시선을 들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희뜩한 빛이 눈동자를 스쳐 지나갔다.

* * *

땀이 전신에서 줄줄 흐를 정도로 레일을 달려도, 머리를 비우려고 단순한 운동을 반복해도 먹구름은 개이지 않았다. 잡념이 물레에서 끊임없이 뽑히는 실처럼 머리 위로 올라왔다. 주신도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어도 제 눈앞에는 주신도가 서 있었다. 정해림, 이름을 부르며 배슬배슬 웃다가 매정하게 돌아서는 상상이 눈을 가로막으면, 해림은 뛰다가도 멍하니 레일 위에 멈춰 섰다.

담배 연기를 한숨처럼 내뱉고서 숲을 바라봤다. 여기 올 때만 해도 울창했던 숲엔 이제 잎이 뾰족한 침엽수와 헐벗은 갈색 나뭇가지만 남았다. 하늘은 흐렸고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눈발을 흩날릴 듯이 싸늘했다.

“해림아.”

주신도가 저렇게 부를 리가 없는데. 해림이 퍼뜩 놀라 돌아봤다. 천운이 유리문 사이로 고개만 쭉 빼고 안을 보다가 해림과 눈이 마주치고는 이를 씩 드러내며 웃었다. 해림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이형마저 등 돌린 이곳에서 해림이 그나마 마주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요새 안 와서 걱정했어. 별일 없지?”

별일이야 없었다. 마음만 뒤숭숭할 뿐 몸은 여전히 편했다. 그 간극이 불안감을 부추겼다.

「여기서 어딜 돌아다니든 도련님 마음이지. 다른 곳으로 튀지만 않으면. 근데 적당히. 알지? 도련님이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어.」

잠깐 나가서 운동 좀 하고 와도 되냐고 묻자 주신도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집에 운동 기구 다 있는데 뭐하러 나가느냐고 타박 주던 예전과 달랐다. 허락도 받았겠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오면 될진대, 마운음은 어쩐 일인지 술렁이고 찝찝했다.

천운이 총총 걸어와 해림의 옆자리에 앉았다.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켜는 왼손에 흰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바람에 불이 꺼지지 않게 막는 작은 행동도 고통을 자아내는지 눈살이 왕창 구겨졌다. 왼손가락도 바람 맞은 잔가지처럼 가늘게 떨렸다.

“으……. 아파.”

“괜찮아? 어쩌다가 다쳤어.”

주먹을 쥐락펴락하는 것도 제대로 못 했다. 해림이 묻자 천운이 아픈 기색을 애써 숨기고 해죽 웃었다.

“아, 이거?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닌 상처치고는 통증이 상당한지 손끝이 어디 닿기만 해도 파르르 떨었다. 밝히고 싶지 않은 성싶어 해림도 캐묻지 않았다. 손님을 상대하다가 다쳤나 보지. 손님의 존재를 상기하자 담배 연기가 한숨처럼 밀려 들어왔다.

천운이 해림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해림아, 하고 소리 내어 불렀다. 해림이 천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 여기서 나갈래?”

처음 동창이라고 밝혔을 때도 천운은 저를 도와주겠다 했다. 한연동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아무 의심 없이 호의를 받아들였겠으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왜’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해림이 담배를 손가락에 걸고 천운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왜 날 도와주려고 해?”

“그건―”

천운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귀와 뺨이 시뻘겋게 익었다. 담배를 뻑뻑 피우다가 손으로 앞머리를 쥐어뜯다시피 잡았다가, 식은땀이 잔뜩 난 듯이 손바닥을 허벅지에 박박 문질렀다. 이내 못 참겠다는 듯이 푸우 긴 숨을 뱉었다.

“원래는 이거까지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네가 나 못 믿는 거 같아서 말할게. 너 내 첫사랑이야. 첫눈에 반했는데, 그때는 말도 못 걸었어. 근데 여기서 널 봐서……, 넌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되니까…….”

천운이 고개를 푹 숙이고 속사포처럼 고백을 쏟아 냈다. 해림의 입이 헤벌어졌다. 이름도 몰랐던 동창이 갑작스레 터트린 고백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천운이 저를 좋아했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 도와주려고 한 거야. 넌 여기 계속 남아 있으면 안 돼.”

예상치 못한 고백보다, 천운이 뒤에 붙인 말이 해림의 귀에 박혔다.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경고가 입을 바짝 마르게 했다. 해림이 담배를 물고 창밖을 쳐다봤다. 혼란과 갈등이 내리깐 눈동자 속에 숨었다.

“왜 망설여. 설마……, 사장이 좋아서 그래?”

천운이 눈을 끔벅였다.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해림의 안색이 창백하게 식었다. 담배를 입에서 거두는 손도 아주 잠깐 가늘게 떨렸다. 남들은 미처 못 보고 지나갔을 미미한 행동을 천운은 쏙쏙 잡아냈다. 답이 명백한 반응이었다.

하……, 하고 천운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주신도가 사람 꾀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건 익히 알았지만 해림까지 홀렸을 줄이야. 그렇다고 기껏 세운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진흙탕과 오물 더미에 첫사랑이 구르는 걸 그냥 방치해서야 어디 체면이 서나. 천운이 결심한 듯 눈 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해림을 봤다.

“해림아. 그거 그냥 스톡홀름 신드롬이야. 범죄자한테 감정 전이되는 거 알지. 네가 여기 오래 잡혀 있었고 사장이 널 옆구리에 끼고 다녀서 그런 마음이 드는 거뿐이야. 그거 진짜 좋아하는 거 아니야. 여기서 벗어나면 그런 마음은 눈곱만큼도 안 들걸.”

정말 그럴까. 지금도 해림은 저쪽에서 주신도가 저를 지켜보는 착각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불쑥 나타나 도련님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고, 목덜미를 팔로 감싸고 장난처럼 머리에 입술을 비비적거릴 것만 같았다.

주신도에게는 의미 없을 접촉이, 저에게는.

“정해림, 이거 봐. 이 상처, 이거 사장이 만든 거야.”

천운이 멍한 해림의 눈앞에 왼손을 불쑥 들었다. 꼭꼭 싸맨 붕대를 풀자 손등과 손바닥을 관통한 상처가 보였다. 벌건 상처 주변에 검붉은 피멍이 잔디밭처럼 넓게도 깔렸다.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참혹했다.

“그 새끼는 네가 빚을 다 갚기 전엔 여기서 내보낼 생각이 아예 없어. 내가 널 구하려고 얼마냐고 물어봤더니 이렇게 날 찌르더라. 처음부터 끝까지 널 씨발스럽게 정하라고 부르고!”

천운이 격앙되어 외쳤다. 아픈 왼손으로 주먹을 쥐더니 테이블을 쾅 내려치기도 한다. 고통에 이를 악물고 손을 떨지언정 해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사장은 널 가지고 노는 거야, 해림아. 네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을 거고 설령 안다고 해도 받아 주지도 않을 거야. 그 인간은 너를 그냥, 너를 그냥 빚 갚아야 할 남창이라고 생각해.”

듣고 싶지 않았다. 어렴풋이 그려 온 것과 남의 입으로 직접 듣는 건 받아들이는 깊이가 달랐다. 해림이 담배를 도로 입에 물었다. 입술을 누르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딴 포주 새끼한테 마음 주지 마. 그 인간을 결국 널 팔 거야. 너를 한 번 쓰고 버리는 장난감 취급할 거고. 난 그게 좆같아. 너는……, 너는 그런 취급받을 사람이 아니야.”

담뱃재가 길게 늘어졌다. 톡 치기만 해도 부러질 듯이. 저러다가 뜨거운 재가 살갗에 떨어질라 천운이 손을 뻗어 담배를 잡았다. 그러다가 시선이 문득 해림의 손목에 족쇄처럼 걸린 시계에 닿았다. 해림도 천운이 뭘 발견했는지 알아차렸다.

해림의 눈썹이 난감한 듯 일그러졌다. 담배를 대충 테이블에 비벼 끄고 손목을 뒤로 숨기려 했다. 천운이 재빨리 손목을 잡아당겼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시계를 보고 하, 헛웃음을 뱉었다.

“이게 그 증거야, 해림아. 내가 알기론 여기 사장 절대 돈 허투루 안 써. 푼돈도 이유 붙여서 쓰는 인간이 너한테 이걸 준 이유가 뭐겠어. 널 좋아해서? 설마, 그런 새끼가 널 정하라고 불렀겠어.”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왜 시계를 줬는지 그 이유는 해림도 몰랐다. 케이나 천운이 짐작한 대로 지금까지 몸 잘 섞었다며 준 화대인지, 아니면 그 외에 다른 의미가 있는지. 다른 의미라면 대체 무언지.

손목이 아팠다. 시계가 살과 그 아래 뼈까지 무겁게 짓눌렀다.

“해림아, 제발.”

천운이 허리를 수그리며 해림의 손등에 이마를 댔다. 간절히 부탁하듯 꽉 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발 여기서 떠나자.”

한연동은 사람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해림의 눈으로 사례도 많이 봤다. 천운은 지금 해림에게 다시 모든 걸 이전으로 돌이킬 기회를 주고 있었다. 그간 여기를 탈출하고 싶어 선택했던 시도들보다 조금 더 안정적이고 가능성이 높을 기회를. 의심은 끝도 없이 꼬리를 물었으나 해림은 천운의 눈에서 진심을 엿봤다. 적어도 해림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사실이리라.

알았다고, 말이 나오지 않으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되는데 그마저도 목이 빳빳해 굽어지지 않았다. 해림은 석고처럼 굳어 천운의 정수리만 내려다봤다. 빚, 암울할 미래, 언제 내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올라간 천칭 옆에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 석 자가 올라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천운이 손등에서 이마를 뗐다. 유리가 천운을 보고는 흡연실 문을 활짝 열었다.

“이봐요. 한참 찾았잖아요. 오늘 예약 있다고 말했는데 왜 이런 곳에서 죽치고 있어요. 빨리 준비하고 가요. 괜히 늦었다가 손님 기분 잡치게 하지 말고.”

온갖 곳을 찾아 헤맸는지 유리의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씩씩거리며 외쳐도 천운은 그 자리에서 굼벵이처럼 뭉그적거렸다. 유리가 이를 으득거리며 다가와 천운의 등을 떠다밀었다. 천운이 아쉬움이 남은 눈으로 해림을 거푸 돌아보다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흡연실을 나갔다.

유리가 해림을 돌아봤다. 미처 감추지 못한 손목에서 시계를 보고는 한참 시선을 준다. 해림이 손을 뒤로 돌리려다가 아예 시계를 풀어 테이블에 내려놨다. 이제야 손목이 가벼워졌다. 반대로 마음은 무거웠다.

“정하 씨도 사장이 찾기 전에 얼른 돌아가요. 어서. 들키기 전에.”

“사장님께 허락받고 나왔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유리가 말을 하다 말고 땅이 꺼져라 짙은 한숨을 뱉었다. 이마를 짚고 내가 뭔 오지랖이냐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해림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곧 표정을 고치고 고개를 들었다. 어깨를 곧게 펴고서 천운에게 그랬듯이 해림의 등을 떠다밀었다.

“그냥 가요, 좀.”

지금 주신도와 마주치기는 싫어 해림이 머뭇거리자 유리가 손에 힘을 실었다. 하는 수 없이 해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이 영 떨어지지가 않았다. 유리가 끙끙대며 밀어서 지는 척 바깥으로 나왔다.

“정하 씨가 알려나 모르겠는데, 나 오지랖 부리는 거 정말 싫어해요. 그런데 정하 씨한테는 조금 부리고 싶어.”

유리가 해림의 옆에서 터벅터벅 걸어가며 말을 붙였다.

해림이 느릿느릿 걷자 유리가 한 발 앞서 나갔다. 긴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유리가 덧붙였다.

“사장 심기 거스르지 마요. 정하 씨가 있는 그 자리, 다른 애들은 갖고 싶어도 못 가져서 안달 난 자리에요.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마. 흘러가는 대로 놔둬요. 언젠가 사장이 정하 씨 버리더라도 지하에서 구를 일 없게.”

어여쁠 때는 먹던 복숭아를 줘도 예쁜 법이다. 애정이 사라지면 먹던 복숭아는 바닥에 버려야 할 오물일 뿐.

해림의 걸음이 멎었다. 유리가 몇 발 가다가 뒤돌아봤다. 복도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해림을 보고는 눈썹 사이를 좁혔다. 주름진 미간에 얼핏 안쓰럽다는 감상이 실렸다.

“먼저 가 볼게요. 정하 씨도 어디로 새지 말고 바로 돌아가요.”

어쩌면 연민보다 괜히 말했다는 후회였을지도 모르겠다. 유리가 도망가듯 황급히 멀어졌다. 혼자 남은 해림은 유리를 쫓아가지도, 도로 돌아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한참을 서 있었다.

본인이 옳다고 여기더라도, 사방에서 그게 아니라고 외치면 어느 순간 의심을 품게 된다. 제 생각이 과연 옳은가. 설마 틀린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닌가.

해림은 컴컴한 거실에 멀거니 앉아 있었다. 주신도가 사장실로 돌아오지 않아 퇴근 시간까지 기다리다가 집에 온 참이었다. 씻고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푹신푹신한 침대는 가시를 빼곡하게 박아 놓은 바닥 같고, 사방은 산소를 최소한으로 줄인 창 없는 감옥 같았다.

답답해 죽을 지경이지만 이 시간에 어딜 나가 돌아다닐 수도 없어 해림은 그나마 넓은 거실을 택했다. TV 소리도 시끄러워 전원을 껐다. 머릿속에서 수십 명이 한꺼번에 제 의견을 들으라고 고함을 쳐 대서 다른 소리를 들을 여력이 없었다.

마른 얼굴을 문지르며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연거푸 쏟아 내도 마음도 머리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며칠째 똑같은 고민거리가 폭풍우를 뿌릴 먹구름처럼 짙게도 끼어 있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초반에는 분명 그랬다. 언제부터 이곳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고 착각을 했더라. 자세한 계기는 몰랐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곳에 머무는 게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

이형이 손목을 그어 제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주신도가 선을 지키라며 경고하지 않았다면, 케이가 앞으로 저가 겪을지도 모르는 일을 말해 주지 않았다면, 천운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면, 유리가 너 역시 남들처럼 될 거라 하지 않았다면.

그럼 고뇌하지 않고 이곳에 발을 붙였을까. 해림이 한발 물러서 제 상황을 살폈다. 다른 이들보다 현저하게 낫다고 생각한 제 현실이 살얼음 위에 지어진 모래성 같았다. 바람이 불면 깨지고 허물어질. 밑바닥에는 얼마나 쌓여 있는지 모르는 빚과 그 빚을 갚기 위해 상대해야 할 수많은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덧없는 총애였다.

“아…….”

깨닫고 싶지 않았다. 깨달은 이상 돌이킬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아니라고, 그래도 조금은 특별할지도 모른다고 애써 자위했었다. 모름지기 자위란 게 일방적인 것처럼 감정도 그러했다. 언젠가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보다 해림을 괴롭히는 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림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가 숙였던 허리를 폈다. 하필이면 아직 표정이 제대로 돌아오지도 않은 지금. 모른 척 방에 들어간다 한들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해림이 차갑게 식은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렀다. 주신도 앞에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지켜야 할 선을 생각했다.

“잘 줄 알았는데.”

잠이 오지 않았노라고 평소처럼 대답하면 된다. 해림은 목소리를 잃은 사람처럼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닫았다. 뒤집어쓸 가면을 찾기가 어려웠다. 표정을 지우는 일도, 손끝이 간간이 떨리는 것도 감출 수가 없었다. 해림이 손깍지를 꼈다. 잘못을 저지르고 숨기질 못해 전전긍긍하는 아이처럼 시선을 내리깔았다.

주신도는 다른 때처럼 소파를 건너와 해림을 껴안거나 턱을 잡고 입 맞추지 않았다.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서 해림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목덜미가 따끔했다. 입 안이 말랐다. 늦게 들어오셨네요, 피곤하지 않아요, 등등. 침묵을 환기할 일반적인 인사말조차 혀끝에만 맴돌았다. 하고 싶은 질문은 온통 다른 것들이었다. 빚은 얼마이며, 어떻게 갚아야 하며, 당신의 옆자리에 머물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에 대해. 그 후를 대비하려면 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주신도가 해림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평소라면 허벅지를 베고 떠들어도 한참을 떠들었을 텐데 오늘은 묘하게 조용했다. 등받이에 등을 느슨하게 기대고 해림과 마찬가지로 정면을 봤다.

“도련님. 오늘은 뭐 했어.”

평범한, 평소와 같은. 해림이 속에서 헤엄치는 대답 중에 가장 평범한 대답을 골랐다.

“그냥, 운동하고 왔어요.”

“운동만?”

“흡연실도 들렀다가…….”

“혼자?”

취조하는 분위기였다. 천운을 만나긴 했으나 담배를 누구와 사이좋게 같이 피우러 간 건 아니었다. 해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하고 주신도가 머리를 기울이며 엄지에 관자놀이를 괴었다. 검지로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선을 문지르며 히죽 웃었다.

“도련님. 내가 되게 착하다 그랬잖아. 근데 같은 짓을 두 번 저지르는 건 좀 용서가 안 되네. 우리 도련님이 아직 날 모르나 싶기도 하고. 내가 선 지키랬는데 왜 자꾸 넘어갈라 그럴까.”

제 대답 중에 거짓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억울했다. 저는 오히려 선을 지킨답시고 원하는 말도 제대로 토해 내지 않았다. 해림이 고개를 들고 주신도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실실 웃느라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둑한 거실에서도 눈빛만은 선명했다.

“저, 거짓말한 거 없어요.”

“거짓말은 안 했지.”

빈정거리는 말투에 그간 억눌렀던 감정이 울컥 솟았다. 주신도의 멱살을 쥐어 올리고픈 심정이야 간간이 느꼈다지만 지금만큼 강한 적은 없었다. 화가 났다. 뭐가 저를 이토록 분노케 하는지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저 웃는 입꼬리도 보고 싶지 않았고, 떠보고 비웃는 말투도 듣고 싶지 않았다.

해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공간에 있는 게 숨이 막히도록 힘들었다. 나가지 못하면 침실에 처박혀 문이라도 닫고 있으리라. 감정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어딜 가.”

턱, 하고 주신도가 해림의 손목을 잡았다. 해림이 뿌리치려 했다. 턱도 없었다. 손아귀 힘이 뼈를 으스러트릴 듯이 강했다. 아, 하고 통증이 섞인 신음을 해림이 흘려도 손아귀는 그대로 붙어 있었다. 시선도 손목에 꽂혔다. 해림의 손바닥이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얗게 질렸다.

“시계, 어디다 뒀어.”

그제야 해림도 손목을 봤다. 시계가 없었다. 흡연실에서 유리의 눈길을 받기 싫어 풀었던 기억이 났다. 거기에 두고 왔다.

“흡연실에 두고 왔어요.”

“왜.”

“너무 무거워서, 잠깐 풀어 놓는다는 게…….”

“고작 시계가 뭐가 무거워.”

남들이 시계에 부여한 의미가 무거웠다. 해림이 손목을 잡아 빼려고 했다. 꿈쩍도 안 했다.

“내가 봐주는 건 한 번이라고 했잖아. 솔직하게 말해. 왜 시계를 풀었는지, 누굴 만나고 왔는지. 도련님이 사실대로 말하면 죽이는 건 고려해 볼게.”

“……누굴 죽여요?”

여기가 죽음과 고문이 공존하는 곳임을 안다. 주신도가 살인을 저지르는 걸 간접적으로 본 적도 있다. 새로울 것 없는 범죄인데, 불길한 예감이 잡힌 손목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누구긴 누구야. 그 새끼지. 우리 도련님하고 요새 아주 친해진 호모 새끼.”

“―안 돼요.”

생각하기 이전에 말이 튀어나왔다. 말 한 번 섞어 본 적 없는 남이 죽어도 눈을 감고 보지 못할 판에, 저에게 호의를 베풀고 어떻게든 도와주려 했던 이가 죽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해림이 주신도의 옷자락을 잡았다. 주신도의 입꼬리가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천운이는 안 돼요.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세요. 죽이면…….”

“왜?”

동창이라고 밝히지 말아 달란 부탁이 있었다. 해림이 눈을 굴렸다.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사실을 밝히고 납죽 엎드려 부탁하는 게 나을까.

“천운이는―”

큰 손이 얼굴 전체를 다 가릴 것처럼 불시에 다가왔다. 해림의 입을 틀어막고서 주신도가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입가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우리 도련님은 붕어 대가리가 맞아. 내가 저번에 이야기했잖아. 여기서 본명 부르지 말라고. 그 씨발 새끼도 그렇고 도련님도 그렇고 왜 이렇게 둘 다 좆같이 굴어.”

해림이 주신도의 손목을 붙들고 고개를 흔들었다. 손가락이 뺨을 짓눌렀다. 머리카락도 틀어 잡혔다. 송곳니가 뚜렷하게 보일 만큼 주신도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둘이 연애라도 해? 여기서 연애는 안 된다고 알려 주지 않았나. 씨발 것들이 배 붙어먹으면 주제도 모르고 손님한테 못 대 준다고 지랄들을 떤다고.”

해림이 움칫했다. 그런 적 없다고 변명하고 싶건만 입과 코를 막은 손은 떨어지질 않았다. 목을 조르듯이 주신도가 해림의 입을 눌렀다. 숨이 막혀 손 위로 드러난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그러니까 도련님, 마지막이야. 잘 생각해서 말해. 우리 예쁜 도련님이 그 새끼한테 다리 벌리고 돈을 받았는지, 아니면 씨발 알콩달콩 연애를 하는지. 대답 여하에 따라서 그 새끼를 어떻게 할지 결정할게.”

주신도가 해림의 입에서 손을 떼며 소파 위로 떠밀었다. 해림이 쿨럭거리며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신도가 벽처럼 버티고 서서 손가락을 접었다. 숨을 고르는 동안 손가락 두 개가 접혔다.

해림은 천운의 가명이 무언지 몰랐다. 연애를 한 적도, 몸을 판 적도 없다고 대답하면 그만인데 서러움이 왈칵 터져 목이 멨다. 말문이 막혀 손가락 네 개가 접혔는데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섯, 하고 숫자가 올라갔다.

“내가 인내심이 그리 길지가 않아, 도련님. 저번에 참아 준 걸로 끝났어. 일곱.”

이제 셋 남았다. 해림이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 되지 못했다. 이 상황이 몸서리 칠만큼 싫었다. 윽박지르고 협박하고, 남의 죽음을 지나가는 개미 죽음만큼도 취급 안 하는 주신도 앞에서 꼼짝도 못 하는 이 상태가.

해림이 눈을 들었다. 새끼손가락 하나 남았다. 분노가 눈가를 익혔다. 천운과 저가 무슨 사이인 게 왜 주신도에게 문제가 될까. 대답은 이미 나왔다. 남들이 줄기차게 말했다. 제 속에서 확성기를 들고 외쳐도 그간 듣지 않으려 노력했던 소리가 혀뿌리까지 올라왔다.

새끼손가락이 접혔다. 고요했다. 해림의 거친 숨소리만 거실에 그득했다. 주신도가 몸을 돌렸다. 알려 주지 않아도 어딜 갈지 알았다.

며칠간 해림의 머리에 물음표를 자아내던 질문이 분노를 발판 삼아 튀어 나갔다. 주신도를 잡으려는 게 아니었다. 현 상황이 해림을 절벽으로 몰았다.

“시계, 화대였어요?”

주신도의 걸음이 뚝 멎었다. 서서히 돌아봤다. 해림과 시선을 마주하고 하, 하며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는다. 하하, 하고 웃음소리가 길어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와, 하고 웃음을 거둔 주신도가 입가에 가득 미소를 띠고서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왔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러고 보니 우리 도련님이 여기 와서 한 번도 몸을 팔아 본 적이 없구나. 그러니까 화대가 뭔지도 모르고 함부로 입에 올리지. 내가 그동안 우리 도련님을 참 많이 예뻐했나 봐. 그치? 이거 참, 기분도 개 같고 도련님도 개 같고 그러네. 예뻐만 했더니 주인 알기를 우습게 알고.”

싱글싱글 웃어 가며 주신도가 해림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달콤한 행동과 달리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였다. 해림이 바싹 굳었다. 저도 모르게 주신도의 손을 짝 소리가 터지도록 세게 내쳤다. 곧바로 머리카락을 휘어 잡혔다. 뿌리를 다 뽑아낼 듯이 손아귀가 거칠다.

“안 되겠다. 이참에 좀 배우자, 도련님. 몸 파는 게 어떤 건지.”

주신도가 이를 드러냈다. 이제는 손목에 없는 시계에서 초침이 움직인 듯 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끝을 향해 달려가는 소리였다.

* * *

정말 개 취급이라도 하려는지 주신도가 해림을 잡고 질질 끌고 가 침대에 처박았다. 지금까지 싫다, 그만하라고 사정은 했어도 진심으로 주신도를 거부한 적은 드물었다. 이번은 달랐다. 해림이 호텔방에 억지로 처박혔을 때처럼 이를 세웠다. 주신도가 한발 빨랐다. 해림의 입을 막고 베개 위에 머리를 처박았다. 푹신한 베개가 아니었으면 두개골이 아작 났을 힘으로.

“누가 함부로 이 세우래.”

해림이 주신도의 손목을 쥐고 씩씩거렸다. 발버둥 쳐도 힘의 차이가 현격했다. 주신도가 쯧, 혀를 차고 해림을 뒤집어엎었다. 귀찮아 죽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제 셔츠를 벗어 해림의 두 손목을 꽁꽁 묶었다. 해림이 발을 마구 구르며 몸부림을 치자 등 위에 가슴을 포개고서 귀에 입술을 갖다 댔다.

“네 애인 살리고 싶다며. 손가락 잘라서 네 후장에 넣을 거 아니면 가만있어.”

귓바퀴에 깨물렸다. 고통이 지끈해 해림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비명을 질렀다. 주신도가 가지가지 한다며 해림의 입에 손수건을 쑤셔 넣었다. 혀로 밀어낼 수 없게 깊숙이.

“내가 사내새끼 신음 듣기 좆같다 그랬잖아.”

이대로 주신도를 발로 차고 도망가고 싶지만, 간들 어딜 가며, 저가 이곳을 벗어나면 천운은 그야말로 산목숨이 아니었다. 한 발만 헛디뎌도 낭떠러지다. 해림이 눈을 질끈 감았다.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내려갔다. 등허리를 가렸던 상의도 날개뼈 위까지 말려 올라갔다. 짝, 하고 날카롭게 터진 소리에 해림이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주신도가 손에 가죽 벨트를 들고 반으로 접어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가죽이 맞부딪치며 다시 한번 공기를 찢는 소리를 터트렸다.

해림의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말라고 눈으로 호소했다. 주신도가 그 눈을 보며 허공으로 올라간 고리 모양의 벨트를 가차 없이 내려쳤다. 위협하던 소리만큼이나 커다란 소리가 터졌다. 해림의 몸도 크게 움찔하며 입에서 참지 못한 격음이 샜다. 새하얀 엉덩이에 새빨간 줄이 그어졌다.

“벌써 아파하면 어떡해. 겨우 한 댄데.”

손바닥이 아로새겨진 흔적을 어루만졌다. 열기가 홧홧하게 남은 자국에 손바닥도 뜨거워 화상이 남을 듯하다. 해림이 고통을 참듯이 등 뒤로 묶인 손을 마주 쥐었다. 손가락이 꼬물거리며 얽히기 무섭게 엉덩이를 한 대 더 얻어맞았다. 벨트가 곤장처럼 철썩 휘갈기고 살에 들러붙었다가 떨어졌다.

“내가 아까 열 셌잖아. 그러니까 열 대만 맞자.”

맞은 부위가 벌겋게 부풀었다. 주신도가 움찔거리는 등허리를 감상하며 다시금 내려쳤다. 벨트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끝을 움켜쥔 손에는 푸르스름한 핏줄이, 팔뚝에는 꽉 들어찬 근육과 힘줄이 뚜렷하게 일어났다. 해림의 둥그스름한 엉덩이뿐만 아니라 하얗게 잘 빠진 허벅지에도 밧줄로 살을 꽁꽁 묶었다 푼 자국이 올라왔다. 해림은 맞을 때마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움칫거리면서도 고통을 인내하듯 눈을 꾹 감고 있기만 했다.

“흐읍……!”

“누가 소리 내래.”

미처 참지 못한 소리가 새어 나가자 주신도가 지적했다. 후려치는 힘이 전보다 강했다. 일곱 번째엔 엉덩잇살이 터져나갈까 봐 무서워 위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다가 허리가 붙잡혀 도로 끌려왔다.

열 번째 채찍질을 끝내고 주신도가 벨트를 침대 아래로 집어 던졌다. 해림이 숨을 헐떡이고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불이 붙은 듯이 뜨거웠다. 만지지 않아도 벌겋게 부푼 흔적이 눈에 보이는 성싶었다.

“왜 누워?”

숨을 고르는 건 1분도 채 허용되지 않았다. 주신도가 옆으로 팔을 뻗었다. 담뱃갑을 손에 쥐고 여유롭게 꺼내 문다. 희끄무레한 연기가 해림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짙은 담배 냄새도.

“여기 손님이 돈을 얼마나 내는데 벌써 지치고 지랄이야. 엉덩이 들어.”

벨트 대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철썩 갈기고는 주신도가 해림의 옆구리를 쥐었다. 해림이 꾸물거리자 연기를 뱉고는 두 손으로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자세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건 준비도 안 됐고. 정하야, 너 같은 남창 팔면 우리 가게는 일주일 안에 망해. 소리 내지 말라면 이 악물고 참아야지. 그런 쉬운 것도 못 하면 어떡해.”

주신도가 입을 열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얻어맞은 부위보다 가슴께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분노와 체념과 이해할 수 없는 실망이 마구잡이로 섞여서 심장을 쾅쾅 두드렸다. 눈마저 뻑뻑하고 타들어 갈 듯 뜨거웠다.

젤이 엉덩이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둔덕 사이를 타고 음낭을 지나 허벅지로 미끄러졌다. 살집 사이에 단단하게 선 기둥이 닿았다. 기둥 전체에 젤을 펴 바르듯 느릿느릿 오가다가, 아직 입을 열지 않은 구멍에 선단을 댔다.

해림이 다급히 어깨로 시트를 밀며 고개를 들었다. 이건 아니었다. 정말 죽을지도 몰라 무릎걸음으로 나아갔다. 이미 벌건 엉덩이 위로 한 번 더 손자국이 벌겋게 남도록 철썩 맞았다. 안 된다는 말은 손수건에 막혀 읍읍거리는 목울음만 나갔다.

“네 애인 손 잘라 올까?”

시트를 밀며 도망치던 해림이 딱 멈췄다. 주신도가 엉덩이를 잡아당겼다. 입을 옴팡 다문 구멍이 억지로 열렸다. 해림이 침대에 얼굴을 박았다. 앓는 소리를 참으려고 입에 든 손수건을 어금니로 꽉 깨물었다.

“……―!”

“큿…….”

젤로 미끄럽게 적신 기둥이 한꺼번에 반이나 밀고 들어왔다. 크게 홉뜬 해림의 눈동자 아래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등이 죽은 사람처럼 경직되고 숨을 제대로 못 쉬어 벌겋게 익은 얼굴에도 창백한 색이 어렸다.

해림의 몸이 시체처럼 굳든 말든 기둥은 그 너머의 거웃이 닿을 만큼 깊게 다 들어왔다. 예고도 없는 침입에 점막이 기둥에 달라붙었다. 잘라먹을 기세로 오물거려 엉덩잇살을 담뿍 그러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해림의 눈가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조금만, 숨 쉴 수 있게 조금만 시간을 줘도 되련만. 주신도가 허리를 뒤로 쭉 뺐다. 속살이 바깥으로 딸려 나가는 감각에 비하면 후려 맞은 고통은 고통도 아니었다.

푹, 푹 찔러 대는 몸짓이 거칠었다. 힘으로 밀고 들어갔다가 힘으로 빠져나왔다. 버거운 크기를 삼킨 구멍이 기어이 종이 찢기듯이 찢겼다. 젤이 묻어 더욱 흉악해 보이는 기둥의 겉면에 붉은 기가 섞였다.

해림이 몸을 뒤틀었다. 내장이 뒤집히는 통증을 견디기 힘들었다. 시트에 얼굴을 문지르자 눈물 자국이 점점이 흩어졌다. 씨발, 하고 뒤에서 터지는 욕설도 해림에게는 닿지 않았다.

엉덩이를 잡고 놔주지 않을 성싶던 손이 허리를 둘러 아래로 내려왔다. 얌전히 누워 몸뚱이를 따라 흔덕이던 아랫도리를 잡자 해림이 움찔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통증만 있는 게 차라리 나았다.

안간힘을 쓰며 벗어나려고 해도 무지막지한 힘이 막아 실패했다. 풀 죽은 기둥이 뜨거운 손아귀에 말려들어 갔다. 성의 없이 주물럭거리는 손길에도 눈 끝이 물렁물렁 흐무러졌다. 입을 다물어도 턱턱 터지는 신음에 야릇한 기운이 섞였다.

박아 대는 기세는 처음과 같았다. 한데 몸뚱이가 그간 익숙해졌다고, 쾌감이 약간 섞였다고 금세 달아올랐다. 마음은 짓밟혔는데 몸은 반대로 열기에 휩싸였다.

“흐흡…… 읍. 흐…… 읏!”

“교육시킨 보람이 있네. 조금만 만져도 질질 싸고.”

젖은 기둥이 바깥으로 갔다가 누글누글해진 속살을 누르면, 해림의 아래가 바짝 서서 배꼽을 향해 붙었다. 목덜미를 덧칠한 붉은 기가 날개뼈까지 내려왔다. 담배를 손가락에 걸고 주신도가 해림의 허리를 잡았다. 구멍이 기둥을 아주 잘라먹으려는지 게걸스레 달려들었다.

해림은 죽을 거 같았다. 배 속이 뜨거웠다. 팔팔 끓는 유황 속에 누가 제 몸을 휙 집어 던진 거 같았다. 배꼽이 근지러운지 그 안에 내장이 간지러운지 하나도 몰랐다. 깊이 들어와 더는 들어갈 수 없는 벽을 문지르면, 어깨가 퍼뜩퍼뜩 뛰어오르고 입에서는 말간 침이 흘렀다.

“신음 내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존나 못 알아 처먹지.”

“흐, 아, 아!”

벌어진 입에서 젖은 손수건이 굴러떨어졌다. 엉덩이를 꽉 쥔 손가락 중에 엄지가 주름 없이 벌어진 구멍 주변을 슬쩍 만지작거렸다. 해림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엄지가 모르는 척 구멍을 긁다가 틈 없는 테두리를 기어이 비집고 안으로 눈곱만큼 들어왔다.

“안 돼. 좀, 제발……!”

“엄살은.”

한 마디가, 그리고 마디 끝까지 다 기어들어 왔다. 해림이 시트에 머리를 박고 부들부들 떨었다. 아프고 무서운데 아랫도리는 주인의 심정을 모르고 빳빳하게 서서 정액을 질질 흘렸다. 엄지가 안쪽 점막을 문지를 때마다 정액이 시트 위로 걸쭉하게 늘어졌다.

주신도가 손가락을 빼며 담배를 도로 물었다. 정신을 못 차리는 해림을 굳게 잡고서 부술 듯이 들이받았다. 해림이 신음을 내지 못하게 뒷머리를 잡아 침대에 처박고 제대로 올라탔다.

“아, 아, 읍, 흐으, 아파, 아프……. ……아악!”

더는 깊게 못 들어갈 만큼 기둥이 들어찼다. 배 속이 온통 기둥뿐이었다. 내장을 제자리에서 밀어내고 아예 제가 한 자리 차지할 것처럼 꽉 틀어박혔다. 선단이 막힌 벽을 성문 부수듯이 들이박다가 결국 그 안쪽을 헤집고 열었다.

해림의 눈에서 초점이 나갔다. 입을 벌렸지만 신음도 나지 않았다. 아랫도리에서 정액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빠져나갔다가, 까슬까슬한 거웃 너머의 살갗이 닿을 때까지 주신도가 밀어붙이자 뿌연 물이 참았던 소변처럼 해림의 뱃가죽을 긁으며 튀어나왔다. 판판했던 아랫배 위쪽이 커다란 뭔가를 집어삼킨 듯이 불룩 솟았다.

“흐…… 아. 아윽…….”

몸이 오한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마냥 떨렸다. 엉덩잇살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게끔 억세게 움켜쥔 주신도도 잇새로 참지 못한 숨소리를 뱉었다.

속살을 다 차지한 기둥이 부풀 대로 부풀어 사방을 압박했다. 한데 뭉쳐 있는 신경을 우악스러운 손길로 헤집는 듯 온몸의 근육이 바짝 오그라들었다. 아랫도리의 점 같은 구멍이 발씬거리더니, 아직 다 못 뱉은 투명한 물을 긴 소낙비처럼 주르륵, 주르륵 뿜었다.

“후…….”

주신도가 숨을 몰아쉬자 희끗한 연기가 해림의 등 위로 흩어졌다. 담배 끝에 매달린 재가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이 아슬아슬하다. 주신도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걸고 해림의 등 위에서 툭툭 털었다. 회색 재가 땀이 어려 매끈해진 등에 달라붙었다. 움칠대는 이유가 뜨거워서인지, 아니면 여운이 남아서인지는 해림만이 알 터였다.

“정신 차려, 정하야. 아직 쓰러지면 안 되지. 받을 만큼은 일해야 할 거 아니야. 일어나. 응?”

다정하게 달래며 주신도가 허연 등 위에 흩어진 재를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회색 재가 파르르 떨리는 등에 멍 같은 무늬를 남길 때까지 뭉개다가 해림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아직 정신이 안 들어온 듯 머리를 움켜쥐어도 어깨와 허리를 움칠거리기만 하고 별다른 반응이 없다. 주신도가 혀를 차며 해림의 목덜미에 입술을 꾹 눌렀다. 짭짤한 살결을 맛보다가 불시에 이를 세웠다. 송곳니가 발갛게 익은 살갗을 누르다 구멍을 뚫을 듯이 콰득 박혔다.

해림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눈빛이 돌아왔다. 그 안에 뭐가 서렸든 주신도는 개의치 않았다. 옴짝달싹하는 몸뚱이를 잡고서 도구처럼 마음껏 흔들었다.

깜박 정신을 놓았다. 그대로 기절했다 깨어나니 모든 게 악몽이었다, 하는 결말이었으면 안도했을 것을. 현실은 꿈보다 잔인했다. 목 아래는 제 몸이 아닌 듯이 감각이 둔했다. 간혹 찾아오는 통증이 모든 일이 꿈이 아니었다고 알려 주듯 생생했다.

희뿌연 연기가 공기 중에 자욱했다. 해림이 쿨럭거렸다. 가슴이 부풀었다 쪼그라들며 몸이 들썩거리자 통증이 엄습했다. 해림이 눈살을 찌푸리고 간신히 손을 들어 손목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통증은 참을 수 있었다. 익숙한 담배 냄새가 아픔보다 고역이었다.

“일어났어?”

아침에 눈을 뜨고 나눴던 인사처럼 담백한 어투다.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기억은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더욱 오래 머릿속에 남는다. 해림이 못 들은 척 눈꺼풀을 닫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돈 받아야지, 정하야.”

“…….”

“그냥 놓고 갈까 하다가, 그래도 보는 데서 정산하는 게 낫지 싶어서. 화대는 빚에서 까 줄 거고. 어디 보자……. 팁은 얼마나 줄까. 정하가 생각하기엔 어때. 팁 받을 만해?”

주신도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해림이 일어난 걸 빤히 아는 듯이 걸어와 머리맡에 앉았다. 태연하게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고는, 뺨에 남은 잇자국도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아무리 봐도 팁 받을 정도는 아니던데. 손님보다 먼저 싸고, 기절하고. 손님이 쓰러져도 넌 눈 뜨고 옷이라도 정리해 놨어야지. 손님이 싸가지 없는 남창이라고 욕하고 패면 어쩌려고. 이렇게 요령이 없어, 우리 정하가.”

평소와 같은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해림이 눈을 감은 채 몸을 옆으로 틀었다. 팔뚝이 잡혀서 다시 몸이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더는 자는 척할 수가 없었다. 눈을 뜨고 주신도를 바라봤다. 여유작작한 미소가 아직까지도 어린 그 얼굴을.

“나는 착하잖아. 우리 정하가 연애질한 것도 봐주는 관대한 사장이고.”

주신도가 테이블 위에서 지갑을 들었다. 두둑한 지갑에서 하얀 수표 뭉치를 한 움큼 집어다가 해림의 몸 위에서 손을 풀었다. 얇은 종이가 후드득 떨어져 해림의 흰 몸뚱이에 들러붙었다.

해림의 손끝이 시트를 갈퀴처럼 긁어모았다. 손아귀에 시트가 휘말려 들어갔다.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라. 기둥서방은 살려 줄게. 그래도 여기서 연애는 하면 안 되니까 얼른 정리해. 한 번 더 들키면 그때는 아무리 애교 떨어도 못 봐줘. 알겠지?”

주신도가 허리를 굽혀 해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해림이 크게 움찔했다. 이마에 닿은 입술 새로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무슨 뜻으로 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깨와 등에 돋은 소름을 진정시키느라 왜 웃는지 이유를 파악할 여력이 없었다.

잘 자라며 인사하고 주신도가 방에서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 해림이 몸을 웅크렸다.

찬기가 들어 이불을 덮고 싶은데, 몸 위에 떨어진 수표가 창처럼 제 몸을 찔러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모든 걸 손에서 놓고만 싶었다. 지쳤다. 생각도 문장에서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목이 아프고 말랐다. 돼지처럼 꿱꿱거리며 소리를 지르다가 시끄럽다며 머리카락이 휘어 잡힌 기억이 났다.

해림이 더욱 둥글게 몸을 말았다. 손으로 침대를 더듬거려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끌어당겼다. 하필이면 제 손목을 꽁꽁 묶었던 흰 셔츠였다. 이불을 찾아 덮을 힘도 없어 구김살 간 셔츠를 몸에 둘렀다.

몸 위에 들러붙은 종이가 옷에 밀려 눈앞에 팔랑팔랑 떨어졌다. 주신도가 준 화대였다. 화대가 뭔지 잘 모르는 거 같다며 손수 알려 주셨다.

잘 알았다. 아주 잘 알고 잘 배웠다. 몸 팔아서 돈 버는 게 얼마나 더러운 기분인지, 이형이 왜 손목을 긋고 다들 입 모아 지옥이라고 외쳤는지 관에 몸을 누이는 그 순간까지 잊지 않을 만큼 진저리나게 깨달았다.

동시에 주신도가 그동안 저를 얼마나 봐주었는지도 알았다. 쓸모없는 자각이었다. 해 봤자 결국 오늘 같은 미래가 닥칠 거라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그때는 주신도가 아닌, 다른 이가 제 머리맡에 서서 새로운 지폐를 뿌리겠지.

애정은 시간이 흐르며 퇴색되고, 영원할 거라 믿었던 감정과 관계도 볕을 오래 받은 흰 종이처럼 언젠가 변색되고 만다. 주신도가 주는 얕고 얇은 애정은 깊어지기보다 닳고 닳은 실처럼 어느 순간 끊기고 말리라. 실낱같은 흥미에 기대어 기고만장했던 과거가 부끄러웠다.

하나 그보다 더 해림을 매섭게 두들기는 건.

아, 하고 해림이 흐릿하게 신음하며 왼쪽 가슴을 움켜잡았다. 혹사당한 몸보다 손으로 감싼 가슴이 더 아팠다. 안에 유리가 들었던 듯이, 그 유리가 오늘을 기점으로 산산조각 나 몸속을 날카롭게 찌르는 듯이 고통스러웠다.

통증은 언제나 현실을 자각시킨다. 악몽에서조차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프지 않다면 차라리 나을 텐데. 그러면 꿈이었다고 착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아침을 맞이할 텐데.

관 뚜껑처럼 덮은 셔츠가 꼭 사람처럼 해림에게 달라붙었다. 해림이 셔츠를 잡아 바닥에 내던졌다. 침대에 흩어진 수표 몇 장도 셔츠에 휩쓸려 해림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땅은 갈렸고, 싹은 텄다. 씨를 날려 보낸 이도, 싹을 틔우게 한 것도 다른 이건만 노랗게 말려 죽이는 건 해림이 할 일이었다. 그날이 그리 멀지만은 않길 바랐다. 지금으로선 그게 유일한 바람이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