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공항을 밟아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해림은 높다란 천장과 활기찬 주변을 둘레둘레 돌아보다가 주신도의 손에 붙들려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저와 주신도 외에 두어 명의 덩치가 붙었는데, 멀찍이 거리를 유지하고 서서 가드처럼 지켜보기만 할 뿐 다행히 부담스럽게 바짝 붙어 쫓아다니지는 않았다.
「도련님, 오랜만에 콧바람 좀 쐰다고 혼자 산책하고 돌아다니면 안 돼. 눈 떠도 코 베어 가는 세상인데, 우리 도련님이 산책하다가 납치당하거나 어디라도 다치면 어떡해.」
말끝을 부드럽게 끌며 주신도가 도망가지 말라는 경고를 한 바퀴 빙 에둘러 했다. 해림도 도망칠 생각은 이제 없었다. 할 수 있다면 당장 아무나 붙들고 경찰에 신고해 달라거나, 무장한 가드들에게 달려가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으나, 뒤에 붙은 덩치들을 보아하니 주신도가 참 잘도 절 놔주겠다 싶었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주신도가 라운지 소파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 창밖을 보고 물었다. 해외 여행객이 부쩍 줄었다더니, 뉴스와 달리 북적거리는 인파가 면세점과 긴 통로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해림이 고개를 저었다. 갖고 싶은 품목도 없을뿐더러 소지한 돈도 없었다.
“우리 도련님은 욕심도 없지. 그래도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이야기해. 기왕 나온 거, 선물 하나는 해 줄게.”
주신도가 선심 쓰듯 권했다. 선물, 하니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해림이 주신도의 옆얼굴을 흘금 바라보고는 잡지로 시선을 돌렸다.
“몇 시 비행기예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어. 왜.”
“그냥 궁금해서요.”
주신도는 해림에게 목적지만 말해 줬을 뿐, 왜 가는지, 가서 무얼 하는지 어디에서 머물 건지, 언제까지 있을 건지 세부 사항은 단 하나도 알려 주지 않았다. 계획을 말해 주면 해림이 그 틈을 파고들어 탈출이라도 시도할 거라 믿는 것처럼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알아서 갔다가 알아서 올 거야. 도련님은 그냥 내 옆에 계속 붙어만 있어. 그럼 돼.”
“……예.”
해림이 고개를 대충 주억이고는 잡지를 넘겼다. 글자는 사실상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뭐라도 하는 척하고 있지 않으면 주신도를 계속 흘끔댈까 봐 손에 닿는 아무거나 집어 들은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여행 잡지였고, 첫 장에 홍콩의 화려한 야경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었다.
“도련님, 기다리는 거 힘들어?”
막 기사를 읽으려다가 주신도의 질문을 듣고는 해림이 멈칫했다. 공항에서 노숙하는 것도 아니고, 라운지에서 편하게 앉아 시간을 죽이는 게 뭐가 힘들까. 그런데도 주신도는 검지와 엄지로 제 턱을 가만가만히 문지르며 해림이 곧이라도 픽 쓰러질 듯 바라봤다.
“도련님 체력이 약하다는 걸 깜박했어. 다음에는 전용기 타고 갈까?”
“전용기도 있어요?”
“아니, 아직. 근데 이번에 살까 하고.”
축적한 부가 대체 얼마나 되는지 해림이 놀라워할 무렵, 주신도가 에이, 됐다 하며 공약을 철회했다.
“여행 많이 가지도 않는 데 돈 낭비하지 말자. 나중에, 혹시 도련님 가고 싶은 곳이 많이 생기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고.”
저가 여행 가고 싶은 곳과 주신도가 무슨 상관일까. 깊게 파고들지 않으려고 다시금 잡지로 시선을 내렸다. 별생각 없이 뱉은 말이겠지, 그리 여기려고 해도 괜스레 입술이 말랐다. 해림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맞물며 첫 장의 글자를 눈에 담았다.
심포니 오브 라이트.
기사는 또 읽지 못했다. 주신도가 해림 쪽으로 다리를 길게 뻗었다. 해림의 벌어진 다리 사이로 한 발, 오른쪽 다리 옆으로 한 발이 들어왔다. 바짓단 아래로 드러난 복사뼈에 주신도의 발목이 스쳤다.
“재미없게 잡지만 읽고 그래.”
“……홍콩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요.”
해림이 다리를 뒤로 뺐다. 주신도가 소파에서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오며 방만한 자세로 다리를 더욱 길게 내뻗었다 또다시 살갗이 닿았다. 뜨거운 건 부딪친 곳인데, 귓바퀴가 붉게 익었다.
“시간 나면 그거 보러 갈까.”
주신도가 잡지를 흘긋 쳐다보고 제안했다. ‘수많은 마천루가 노래에 맞춰 빛의 향연을 연다’가 기사의 첫 문장이었다. 까만 강가를 배경으로 하늘에 닿을 듯한 빌딩이 휘황찬란한 빛줄기를 뿜어 내는 사진이 잡지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어쩌다 가도 관광지를 돌아보기보다는 조용한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잡지에 실린 사진이 제법 멋져서인지, 아니면 그 아래 미사여구를 붙인 묘사 때문인지, 그 장소가 묘하게 끌렸다.
해림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리자 주신도가 쭉 뻗은 다리에서 발끝만 까닥였다. 발목이 슬근슬근 느리게 쓸려서 해림이 재빨리 발을 옆으로 치웠다. 주신도의 다리만 의자 아래 달랑 남았다.
“저는 왜 데려가는 거예요?”
한 소리 퍼부으려는 듯 이맛살을 구기기에 해림이 다급하게 질문을 던지며 주신도의 입을 막았다. 주신도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불만이 어리다 못해 폭발할 성싶은 눈초리로 해림을 쳐다봤다.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지그시 누르고서는, 해림을 어떻게 요리해 먹을지 고심하듯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도련님 영어 좀 한다며. 걔네들이 영어로 지껄이면 도련님이 옆에서 통역하라고.”
다행히 심통 부리지 않고 착하게 대답해 줬다. 해림이 손에 든 잡지를 허벅지 위에 내려놨다.
“걔네들이 누구예요?”
“앞으로 같이 거래할 수도 있는 애들. 홍콩 애들은 그게 귀찮아. 영어 쓰는 거. 내가 중국어는 좀 알아듣겠는데 영어는 도통 모르겠더라고. 혀는 왜 그렇게 꼬아 대는지, 씨발.”
버터만 처먹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주신도가 농담처럼 덧붙이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두 팔을 위로 쭉 뻗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서 주신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도련님. 슬슬 시간 됐다.”
해림이 잡지를 원래 자리에 꽂아 놓고 주신도를 따라 일어났다. 주신도는 해림이 제 옆에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다가, 언제나 그렇듯이 어깨에 팔을 걸치고 휘적휘적 라운지를 빠져나갔다.
공항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가장 시끄러운 소리로 형님, 형님 불러대며 팔을 높이 들고 휘저어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었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끄럽게 형님을 찾던 남자가, 주신도 뒤에 있는 해림을 보고 입술 끝을 모호하게 끌어 내렸다.
“형님, 혹 달고 오셨네요? 저건 왜 데려왔어요. 귀찮게.”
“통역시키게. 도련님이 영어를 좀 잘하거든.”
주신도가 제 새끼 뽐내듯 어깨를 으쓱이며 자랑했다. 해림은 뒤에서 머쓱하게 서 있었다.
“저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아는데.”
인오가 입맛을 쩝 다시며 앞장섰다. 저번에 이형과의 일이 있은 후로 코빼기도 안 보이기에 마음 놓고 있었더니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웬만하면 다시 보지 않길 바랐는데.
인오가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 반가운 개처럼 주신도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해림은 둘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둘의 재회에 저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인오의 조잘거리는 말에 간간이 고개를 주억이는 주신도의 뒤통수를 보며 길을 잃지 않게 적정한 속도로 따라갔다.
앞서가던 주신도가 문득 걸음을 세웠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반쯤 뒤돌아섰다. 두 걸음 남짓 떨어진 해림을 발견하고는, 날카롭게 날 서 있던 눈매가 미세하게 누그러졌다.
“도련님, 이리 와.”
해죽거리며 주신도만 바라보던 인오가 입술을 뒤틀었다. 해림을 보는 눈빛도 곱지 않았다. 같잖고 고깝다고 온몸으로 표현했다.
해림도 눈치껏 피해 주고 싶었다. 주신도가 막았다. 해림의 팔뚝을 손아귀로 휘감고서 제 옆에 찰싹 붙였다. 한눈팔면 해림이 인파를 헤치고 냅다 줄행랑이라도 칠 듯이.
인오가 해림을 위아래로 쭉 훑고는 비틀어 내렸던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미소를 지었음에도 비열한 감은 얼굴 곳곳에 녹아 있었다. 가늘게 뜬 눈마저 야비한 인상을 부추겼다.
“그럼, 호텔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운전도 인오의 몫이었다. 해림이 떨떠름한 심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새카만 차가 유유하게 공항을 빠져나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이국적이라 비행기를 타고 물 건너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동안 봐 온 숲은 사라지고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작은 빌딩들과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건물들이 시야를 스쳐 갔다.
날씨가 그리 좋지 않았다. 하늘은 희끄무레하니 흐릿했고,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온 공기는 텁텁하니 습기가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날씨임에도 인오는 뭐가 그리 행복한지 라디오를 켜고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 노래였다.
정신 사나운 노래 속에서도 주신도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긴 다리를 겹쳐 앉고는 어느새 패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시선은 줄곧 화면에 꽂혀 있었다.
해림이 창밖만 보다가 슬쩍 주신도의 패드를 훔쳐봤다. 잡지에서 봤던 야경 사진이 화면 끝에 걸렸다가 주신도의 손가락에 밀려 위로 사라졌다.
설마.
가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고, 잡지에 나와 심심함을 죽일 겸 한 줄 읽은 것뿐이다. 주신도도 저처럼 별 의미 두지 않고 어쩌다 발견한 기사를 읽은 거겠지. 그리 여기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괜히 불안한 듯 쿵쾅거리며 뛰어서, 해림이 턱을 괴는 척 입가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오늘 약속, 저녁 일곱 시라고 했던가?”
“네. 그쪽에서 그렇게 잡았어요. 왜요, 형님?”
주신도는 대답하지 않고 눈동자만 해림 쪽으로 굴렸다가 창 쪽으로 옮겼다. 창에 비친 시선이 마주칠라, 해림이 재빨리 먼 곳을 바라봤다.
차는 도로 위를 매끄럽게 달려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외관이 깔끔한 곳이었다. 인오가 능숙하게 차를 세우고 옆에 대기한 직원에게 짐을 맡겼다.
차 안에서 중국 노래를 신나게 따라 부를 때 알아봤지만, 인오는 중국어에 능했다. 체크인까지 해결하고 인오가 키를 주신도에게 건넸다. 해림이 멀뚱히 인오를 쳐다봤다. 저에게 줄 키를 기다리고 있는데, 인오는 해림 쪽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럼 쉬고 계셔요. 이따가 약속 시간 맞춰서 모시러 올게요. 이쪽 인간들이 노는 걸 좋아해서 오늘 몇 시에 끝날지 모르니까. 속도 간단하게만 채우는 거 잊지 말고요. 여기 코스 긴 거 아시죠. 애들이 한 번 숟가락 잡으면 끝을 몰라.”
생각만 해도 골머리가 아픈지 주신도가 으, 하며 진저리를 쳤다. 인오가 실실거리며 뒷걸음질 치다가 몸을 훌쩍 돌려 로비를 빠져나갔다.
“사장님, 제 방은…….”
주신도가 해림을 흘낏 내려다보고 입술을 뒤틀었다. 바람 새는 소리도 설핏 흘러나왔다. 한쪽 입술 끝만 삐뚜름히 올라간 모양새가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고 해도 비웃음이었다.
“도련님, 돈 많아?”
돈이 있을 리가. 해림을 빈털터리로 만든 걸로 모자라 빚까지 얹은 장본인이 약 올리듯 덧붙였다.
“도련님 돈으로 하나 더 잡든가.”
결국 주신도와 같은 방을 써야 한다는 의미였다. 치사하다는 욕이 목구멍을 박차고 나가려 했다. 해림이 황급히 말꼬리를 붙들고 삼켰다. 주신도가 간간이 이런 모습을 보여 줄 때마다 저에게 빚 독촉하던 빚쟁이임을 다시금 상기하고 만다.
엘리베이터는 해림의 타는 속도 모르고 쭉쭉 올라가다가 멈춰 섰다. 주신도가 긴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해림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는 널찍한 등을 따라갔다.
주신도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서는 해림의 발걸음이 무겁기 짝이 없었다. 누가 안으로 들어가라고 억지로 등을 떠민 양 뭉그적거렸다.
해림을 아는 이라면 죽상이라고 칭했을 그 얼굴이, 방 안을 보고는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 눈썹이 위로 올라가고 눈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주신도가 주머니에 손을 푹 꽂아 넣고 마치 방을 소개하듯 몸을 옆으로 틀었다.
넓게 펼쳐진 창 너머로 흔들리는 물결과 빌딩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속이 탁 트이는 광경에 해림이 홀린 듯 창가로 다가갔다. 눈 아래 보이는 풍경이, 한연동이 아닌 다른 곳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케 했다.
“아무 데나 잡으라니까 이런 델 잡았더라고, 영수가.”
제가 잡은 방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주신도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폭신한 침대가 만들어 내는 소음에 해림이 고개를 틀었다. 주신도가 용케도 시선을 느끼고서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팔꿈치를 베개에 괴고, 손바닥 아래의 두툼한 둔덕으로 고개를 가누며 주신도가 씩 웃었다. 꿍꿍이가 가득한 미소였다.
“침대 두 개 있는 방으로 해 놓으라니까 그놈이…….”
“지금이라도 카운터에 전화해서 방 바꿔 달라고 할까요?”
안 그래도 침대가 하나라 소파에서 자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해림이 냅다 물으니 주신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도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됐어. 뭘 귀찮게 옮기고 그래. 어차피 오래 머물지도 않을 건데.”
주신도가 도로 침대에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이렇게 어색하게 둘이 한 방에 있느니 운동이나 하고 올까, 해림이 걸음을 틀려던 그 때, 주신도의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주신도가 베개에 얼굴을 반 이상 파묻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 짧은 새에 머리가 새집처럼 흐트러졌다.
어, 하고 짧게 대꾸하며 주신도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별반 표정의 변화가 없던 주신도가, 저쪽에서 말이 길어질수록 미간에 깊은 골을 그렸다. 하아, 하고 길게 한숨도 쉬고 욕도 뱉었다.
“그 씨발 새끼들은 왜 돈 준다고 해도 지랄들이야. 배가 부르다 못해 터졌지. 다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주신도를 달래듯 부드러운 소리가 이어졌다. 알았다며 주신도가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일이 잘 안 풀리는지 앞머리를 마구 헝클이고서는 담배 한 대가 급한 듯이 주머니를 뒤졌다. 담배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테이블에 올려놓은 데다가, 하필이면 끽연이 금지된 방이라 입에 물더라도 불을 붙일 수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듯 고개를 푹 수그렸던 주신도가 어느 순간 번쩍 머리를 들었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못된 계획을 세운 소년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도련님, 나가자.”
“예?”
“그 새끼들이 제멋대로 약속을 깨서 오늘 하루 비었거든. 배 안 고파? 기내식에 손도 안 댔잖아. 이 근처에 괜찮은 식당 있을 텐데.”
해림의 대답이 어쨌든 주신도는 나갈 생각인지 정장을 휙휙 벗어 던졌다. 순식간에 속옷만 입은 맨몸으로 캐리어를 열어 옷을 꺼냈다.
해림이 주신도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캐리어를 여느라 굽은 팔꿈치와 팔뚝에 선 매끈한 근육을, 넓은 등에서 꿈틀거리는 날개 뼈와 곧은 등골을, 속옷이 달라붙어 선이 선명하게 드러난 둔부와 곧이라도 터질 듯한 허벅지를. 주신도가 바지를 입고 상의에 머리를 꿰어 넣은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홱 돌렸다.
처음 본 나신도 아니고, 아무리 잘 빚어 놓은 조각 같더라도 같은 성별의 신체를 보고 넋을 잃다니. 해림이 열 오르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속으로 정신 차리자는 말을 열 번쯤 되뇌며 시선을 돌렸다.
눈에 들어온 우중충한 강과 그 위를 떠다니는 하얀 배들을, 빌딩 유리에 비친 도시 풍경과 도로 위를 굴러다니는 깨알 같은 차들을, 높이 날아가는 새와 이국적인 길가를.
“…….”
열심히 쳐다봐도 소용없었다. 눈앞에 방금 본 맨살이 어른거렸다. 찬물 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열기가 계속해서 뺨과 이마와 눈 아래 남아 있을 성싶었다.
해림이 괜히 창가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겹쳐 꼬며 계속해서 풍경을 눈에 담았다. 감탄이 나와야 할 전경도 이유 모를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옷을 다 갖춰 입은 주신도가 창에 얼핏 비쳤다. 그제야 해림이 안심하고 고개를 돌렸다. 집에서 봤던 편안한 차림과는 또 다른 사복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검은 반소매 피케 티셔츠, 옅은 베이지색 바지에 흰 운동화의 조화가 제법 잘 어울렸다.
앞머리가 내려온 탓일까, 아니면 정장을 벗어서일까. 주신도는 평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대학생이라고 주장해도 한쪽 눈감고서 믿어 줄 수 있을 만큼. 나가서 길을 걸어도 그 누구도 주신도가 주먹 휘두르는 깡패라고는 여기지 않을 터였다.
“왜 그러고 서 있어. 안 나가?”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말 안 듣는다고 사람을 패거나 지하로 보내던 무시무시한 포주가 이렇게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다니. 한연동을 벗어난 주신도는 그간 알던 주신도란 인물과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만약, 만에 하나 주신도를 한연동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주신도가 멍하니 서 있는 해림의 팔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해림이 가능성이 단 일 퍼센트도 없는 망상을 하다가 퍼뜩 깨어났다. 손목을 단단히 휘감은 주신도의 손아귀를 보고 눈동자를 도르르 굴려 구석을 쳐다봤다.
여행은 물론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취미도 없는데. 과거에 그랬듯 호텔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피트니스에서 운동을 하거나, 침대에 누워 낮잠을 청하는 게 어떨까 싶었다. 하나 손목을 잡아당기는 힘을 해림은 이길 수가 없었다.
언제는 주신도가 제 취향을 고려해 줬든. 해림이 곧 몸에서 힘을 뺐다. 어쩐지 신나 보이는 뒷모습을 따라 해림도 발을 옮겼다. 방에 들어왔을 때와 달리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웠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 빛깔로 찌뿌듯했다. 끈적거리는 습기가 목덜미에 들러붙었다. 온도가 낮고 바람이 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찜통더위에 길을 걷는 고생을 사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신도는 이미 몇 번 와 본 양 거리를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원래 목적지가 거기였던 듯이 사거리 코너에 있는 작은 카페 앞에서 멈춰 메뉴를 훑었다. 마침 목이 말랐던 터라 해림도 주신도 옆에 서서 메뉴를 올려다봤다. 영어라도 적혀 있으면 무슨 음료일지 알아볼 텐데, 죄다 중국어 일색이다.
“도련님은 커피지? 예전에 보니까 그것만 마시던데. 얼음 많이 넣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그런 건 언제 관찰했는지. 해림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신도가 능숙한 중국어로 주문을 넣었다. 주신도와 다른 언어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 해림은 낯선 사람 관찰하듯 그 얼굴을 몇 초간 멍청하니 바라봤다.
“뭘 그렇게 봐?”
정면을 쳐다보고 있으면서 시선을 예민하게 알아챈 주신도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해림이 아뇨, 하고 말을 틀고서 똑같이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료를 만드는 어린 학생이 주신도를 흘끔흘끔 훔쳐보다가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귓등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음료는 금방 나왔다. 주신도는 생망고를 갈아 넣은 주스를, 해림은 얼음이 가득 들어간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었다. 끈적거리는 날씨에 차가운 커피만큼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는 음료가 또 있으랴. 해림이 빨대를 입에 물고 얼음 사이사이가 비도록 시원스레 빨아 마셨다.
“그게 그렇게 맛있어? 쓰기만 하던데.”
목이 탔는지 단번에 컵의 반절을 비운 주신도가 해림이 손에 든 커피를 흘끔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주신도는 은근히 단 음식을 좋아했다. 주전부리도 잘 보면 짭짤한 것보다 달짝지근한 종류가 많았다. 매번 일을 마치고 입에 넣어 주던 젤리만 해도 떨어진 혈당을 단번에 끌어 올릴 만큼 달았다.
“줘 봐.”
이런 걸로 궁색하게 굴고 싶지 않아 해림이 흔쾌히 컵을 내밀었다. 제 손으로 받아먹지, 주신도는 고개만 길게 빼 해림의 빨대를 입술로 덥석 물었다.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모조리 마셔 놓고 주신도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도련님 입맛 정말 이상해. 시럽도 안 넣고 어떻게 이딴 걸 마셔?”
혀에 남은 쓴맛을 털어 버리려는지 주신도가 제 망고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해림이 조금 시무룩한 눈길로 얼음만 남은 제 컵을 바라봤다. 아직 해갈도 다 못했는데 투명한 컵 속에 각얼음만 수북이 쌓여 있다.
“이거 마셔.”
해림의 아쉬움을 눈치챈 양 주신도가 눈앞에 불쑥 컵을 들이밀었다. 샛노란 망고 주스가 넘실대는 게 보기만 해도 혀가 아렸다. 이런 건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기보단 배가 되던데. 마실 때까지 들이밀고 있을 터라 해림이 마지못해 빨대에 입술을 댔다. 상큼한 향은 마음에 들어도 혀가 저리는 인공적인 단맛은 역시나 제 취향이 아니었다.
목울대를 꼴깍 넘기고서 빨대를 뱉어 내는데, 묘한 시선이 얼굴에 달라붙었다. 정확히는 입술이었다. 주신도가 입을 슬쩍 벌리고 어딘지 모르게 몽롱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제 커피를 홀딱 마셔 놓은 주제에 아직도 목이 바짝 타는 듯이.
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설탕 시럽이 적셔 놓은 입술 새로 살포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주신도의 목울대가 뭔가를 깊이 삼킨 듯이 위아래로 꿀렁였다.
“달아요.”
평가를 기다리는 성싶어 해림이 얼른 대답했다. 그냥 쳐다만 봐도 식은땀이 배어 나오게 하는 매서운 눈빛인데, 지금은 꼭 목이 마르다 못해 목덜미에 송곳니 박고 피를 빨아 먹을 기세로 바라본다.
해림이 제 목을 보호하듯 목덜미를 손으로 감쌌다. 시선이 손등에 꽂혔다가 다른 쪽으로 멀어졌다. 해림이 입술을 맞물고 눈동자만 흘긋 돌렸다. 주신도가 마른 목을 주스로 채울 것처럼 빨대에 입술을 댔다.
“뭐가 달아. 이게 정상이지.”
둥근 빨대를 감싸는 입술이, 울렁이는 목울대가 이상야릇했다. 좀 전에 본 주신도의 나신이 그 아래 겹쳐 보였다.
아무래도 피곤해서 눈이 이상해진 모양이지. 해림이 정신을 차리고자 한 발 성큼 앞서 나갔다. 주신도가 뒤에 서 있다가 버릇처럼 해림의 어깨에 제 팔을 걸쳤다. 해림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리게끔 몸무게를 실어서.
“무거워요.”
무겁기보다 뜨거웠다. 살갗에 닿은 팔뚝이 뜨뜻하게 익힌 돌덩이 같았다. 해림이 투덜거려도 주신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늘 숙소로 돌아가는 그 시간까지 제멋대로 굴 거라고 선언하듯 팔만 단단하게 조였다.
“어, 도련님. 저기 식당 있다. 사람 많은 거 보니까 맛있나 본데.”
도련님이라는 호칭만 빼면 친한 친구 대하듯이 군다. 거친 몸짓에 해림이 윽 소릴 내도 주신도는 인형 팔을 잡고 흔들어 대는 애처럼 해림을 끌어당겼다.
결국 긴 줄을 기다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이 좁은 가게 안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주신도가 이미 손님 한 명이 차지한 테이블에 넉살 좋게 합석하고 메뉴가 적힌 종이를 들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영어가 적혀 있어 고르기가 쉬웠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수에 간장 향이 밴 채소볶음, 딤섬 등이 줄줄이 테이블을 채웠다. 특유의 향이 익숙하지는 않으나 진한 고깃국물이 입맛에 거슬리지 않았다. 허기도 있던 차라 해림이 젓가락을 들고 국수를 입에 넣었다. 해림이 한 입 먹은 후에야 주신도도 젓가락을 들었다.
그릇이 조용히 비어져 가는데, 주신도는 저가 잔뜩 시켜 놓고 딤섬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해림이 곰곰이 과거를 되짚다가 에그 타르트는 괜찮아도 딤섬은 비려서 별로라던 발언을 상기했다.
제 입에 들어간 딤섬에서 큰 비린내는 느껴지지 않았다. 입맛의 차이라지만, 아무래도 맛있는 걸 저 혼자 독식하는 기분에 해림이 젓가락으로 조심스레 딤섬을 들었다.
“이건 별로 안 비려요.”
얇은 반죽이 터지지 않도록 신중히 주신도의 앞접시에 옮겨 담았다. 주신도가 채소볶음을 끼적이다가 해림을 흘긋 올려다봤다. 육즙이 터져 나오지 않은 딤섬을 보고는 피식 웃는다.
“저번에 딤섬, 비려서 싫다고.”
주신도가 아이도 아니고, 저가 원하면 알아서 주워 먹을 텐데 돌이켜보니 퍽 민망한 짓이다. 시선을 받는 게 머쓱해 해림이 고개를 숙이고 국수 가닥을 집어 먹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맛나더니, 주신도의 빤한 시선 탓인지 목구멍 너머로 넘기기가 어렵다.
긴 젓가락이 딤섬에 닿았다. 축 처진 주머니처럼 젓가락 끝에 대롱대롱 달려 흰 숟가락 위에 올라갔다. 육즙을 터트려야 입천장이 무사할 텐데, 귀찮은지 주신도가 한입에 딤섬을 삼켰다. 오물거리는 입술, 씰룩이는 볼, 입에 든 고기를 질근질근 깨물어 움직이는 아래턱. 해림이 제 입 안에 아무것도 안 들었으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나쁘지 않네.”
이딴 걸 왜 주냐고, 도련님이나 처먹으라고 욕을 한 바가지 퍼부을 줄 알았더니. 제 손으로 만든 음식도 아닌데도 공연히 뿌듯했다. 해림이 길쭉한 채소를 얼른 입가에 갔다 댔으나, 미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숨지지 못했다.
그 후로 별말 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간간이 이거 괜찮다며 먹어 보라는 권유만 오갔다. 둘 다 됐다는 거절 없이 그릇에 놓인 음식을 주워 먹었다. 어떤 음식이든 둘의 입에서 별로라는 평가는 나오지 않았다.
아는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어 어디로 가든 주신도의 손에 붙들려 쏘다녔다. 정장에 머리를 올리고 다녔을 때는 기사가 운전하는 차만 타고 다닐 성싶었는데, 자유분방한 차림새가 행동거지에도 영향을 주었는지 주신도가 아무렇지 않게 이층 버스에 훌쩍 뛰어올랐다.
“이것도 재밌다던데.”
2층으로 올라가 해림을 창가 쪽으로 밀어 넣고 주신도가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의자 사이에 폭이 좁아 무릎과 무릎이 맞닿았다. 해림이 재빨리 다리를 오므리며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활짝 열린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고 주신도 쪽으로 흘러갔다.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날려 눈앞을 가렸다. 해림이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시선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가는 빌딩 숲에 꽂혔다가 옆으로 슬쩍 돌아갔다. 해림의 코끝에 부딪히던 바람이 옆에 앉은 주신도의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해림의 어깨 너머로 도시 풍경을 구경하던 주신도가 시선을 알아채고는 눈을 돌렸다. 붉은빛을 띤 눈동자의 위아래가 설핏 가늘어진 눈매 사이에 묻혔다. 왜, 하고 주신도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가 벌렸다.
갑자기 목뒤가 뜨끈했다. 뺨도 그랬다. 걷잡을 수 없이 열이 올랐다.
이유를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바람을 더 쐬면 가라앉을까, 해림이 차창 가까이 얼굴을 디밀었다. 뺨에 스치는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데도 홧홧한 열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무래도 낯선 환경이 제 마음까지 낯설게 만드는 성싶었다. 해림이 물기 없는 손바닥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일부러 더 먼 곳을 응시하며 옆에 앉은 이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주신도가 바깥 풍경에 질린 듯 해림의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댔다. 해림이 움찔하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눌렀다. 누가 만졌으면 열병 아니냐고 놀랐을지도 모를 만큼 후끈거렸다. 아주 작은 접촉일 뿐인데, 그 탓에 열을 가라앉히려는 노력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갔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목이 마르면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서 잠시 쉬다가, 풍경을 구경할 만한 곳이 있으면 머물다가 하며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한연동이었다면 꿈도 못 꿨을 여유였다.
에그 타르트가 맛있다고 하더니 주신도는 지나가는 길에 기어이 에그 타르트를 사서 해림에게 먹였다. 노란 필링은 달큼하고 겹겹이 층을 이룬 페이스트리에서는 고소한 버터 향이 올라오는 게 예상보다 맛이 좋았다. 아마 주신도가 제가 준 딤섬을 먹을 때와 비슷한 감상이 아닐까 싶었다.
흐릿해도 햇볕이 구름 사이로 내리쬐던 낮이 저물고 어두컴컴한 남색이 하늘을 물들였다. 공기는 여전히 습했다. 비를 뿌릴까 말까 간을 보는 날씨였다.
주신도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강가였다. 해림은 이곳으로 향하는지도 몰랐다. 강 너머로 머리꼭지가 하늘에 닿을 듯한 빌딩들이 늘어서 있었다.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색의 빛이 강 표면 위에 일렁였다. 화려한 야경이었다.
“아직 시작하려면 시간 좀 남았는데. 그냥 보고 가. 어차피 오늘 아니면 시간 없어.”
무슨 소린가 곰곰이 따져 보다가, 그제야 해림이 여기가 잡지에 나온 장소임을 깨달았다. 어쩐지, 빌딩들이 눈에 익다 싶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도 여기가 관광지라고 알려 주는 일종의 표시판이었다.
차 타고 오는 길에 여길 찾아보는 것 같더라니. 해림이 손끝으로 귀 끝을 문질렀다. 생각지도 못한 배려가 어쩐지 부끄러워 귓바퀴가 뜨뜻하게 익었다.
주신도가 해림을 질질 끌고 가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고 자리로 돌아왔다. 주신도는 어딜 가든 혼자 가는 법이 없었다. 가까운 가게에 들어가더라도 해림을 옆구리에 붙이고서 데려갔다. 한눈판 사이에 해림이 길 잃을 미아라도 될까 걱정하는 사람인 양, 뻔뻔하게.
처음 보는 맥주를 홀짝이며 해림이 난간에 팔을 걸쳤다. 시원한 바람과 맥주의 조화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 내내 이유 모를 긴장과 열에 시달렸는데, 눈앞에 유유하게 떠가는 유람선과 잔잔한 강물을 보니 마음이 한가하게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되찾은 평온함이 해림의 기분을 위로 끌어 올렸다.
“중국어는 언제 배웠어요?”
그래서인지 질문이 쉽게 튀어 나갔다. 난간에 등을 기대고 해림과 반대편을 바라보던 주신도가 흘긋 시선을 내렸다.
“틈틈이 배웠지. 이 새끼들이 한 입으로 두말할 때가 많거든. 통역사 끼고 해도 영 시원찮아서 그냥.”
“안 어려웠어요?”
“별로.”
남의 언어를 배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닐진대, 주신도는 덧셈 뺄셈이 어려웠냐는 질문을 들은 것처럼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 말고 도련님 이야기나 해 봐. 유학은 언제 갔어?”
“대학교 2학년 때요.”
“왜?”
이유가 뭐였더라. 해림이 맥주 캔에 어린 물방울을 손가락 끝으로 훑으며 과거를 더듬었다. 남들이 다 한 번쯤은 나간다고 해서 휩쓸려 나갔던가, 아니면 확고한 목적이 있었던가. 당시 저를 둘러싼 상황이 그다지 희망적이지는 않았다는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따져 보면 그리 먼 과거가 아닌데도 한 몇 년은 지난 듯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때는 이렇게 될 줄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 해림이 쓴 입맛을 맥주로 달랬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도련님은 참 숨기는 게 많아. 의뭉스러워 가지고.”
“제가요?”
나진이 속을 알 수 없어 답답하단 말을 몇 번 하기는 했어도. 주신도가 맥주를 입에 대며 삐뚜름하게 비틀린 입가를 가렸다.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뭘 괜찮아하고 질색하는지 그런 걸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잖아. 행동도 그래. 다른 새끼들은 눈에 보이기라도 하지. 도련님은 꽁꽁 숨겨.”
주신도가 미친 짓거리를 제 몸에 저지르려고 할 때마다 싫다는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 외엔 딱히 좋다 싫다 표현한 적이 없으니 주신도가 제 세세한 취향은 모를 만했다. ????
“숨긴 적 없어요.”
말수가 적고 반응이 남들보다 무딜 뿐이다. 해림도 인간은 인간인지라 희노애락애오욕은 존재했다. 다른 이들보다 바깥으로 내비치는 횟수나 정도가 덜하다고 호불호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나진이 떠나기 전 폭우처럼 퍼붓고 갔던 말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물 같다던,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던 그 말이. 흘긋 본 주신도의 옆얼굴 위로 나진의 비난이 겹쳐졌다.
언젠가, 주신도도 같은 이유로…….
“영화 좋아해?”
주신도가 지금부터라도 해림의 취향을 파악하려는 듯 캐물었다. 해림이 선선히 대답했다.
“가끔 봐요.”
“술은?”
“종종 마셔요.”
“운동은?”
“달리기 위주로.”
“쇼핑은?”
“딱히.”
“독서는?”
“좋아하는 편.”
“섹스는?”
“…….”
성심성의껏 답을 주다가 마지막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맥주를 마시며 못 들은 척 넘겼다. 주신도도 되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물은 척 똑같이 맥주를 들이켰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난간 쪽으로 몰려들었다. 강 건너편에 늘어선 빌딩들이 번쩍거리는 빛을 쏟아 냈다. 화려한 빛줄기가 회색 구름 사이를 뚫고 올라갈 듯 높이도 솟았다.
쿵쿵거리는 음악이 땅을 잘게 흔들었다. 잡지에서 보았던 빛의 향연이 이제야 시작이었다. 해림이 마지막 질문을 피할 합리적인 변명거리를 찾았다 싶어 얼른 시선을 멀리 던졌다.
주위에선 핸드폰을 들고 동영상이다 사진이다 촬영하느라 난리였다. 해림은 멀거니 난간에 기대서서 빛이 산란하는 야경을 두 눈에만 담았다.
자꾸만 목이 말랐다. 아무리 맥주로 입을 축여도 갈증은 찝찝하게 목구멍을 맴돌았다. 옆에 닿을 듯 말 듯 종이 한 장 간격을 두고 떨어진 주신도의 팔이, 거기서 뿜어지는 열기가 해림의 팔에도 불꽃처럼 옮겨붙어서 그랬다. 멀찍이 떨어지면 그만일 텐데, 발바닥은 주인 속도 모르고 땅에 쩍 눌어붙은 듯이 움직이질 않는다.
“도련님.”
음악이 시끄러웠다. 빌딩에서 쏘아 대는 빛줄기는 요란하고 주변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시장 한복판을 방불케 했다. 그런데도 주신도의 목소리가 해림의 귓속에 정확하게 꽂혔다.
아무리 축여도 도로 마르는 입술을 맞물며 해림이 고개를 돌렸다. 난간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주신도가, 캔을 입술에 댔다가 살짝 떼었다. 저와 달리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유월 앵두처럼 붉게 잘 익은 빛깔만 보였다.
“키스는?”
대답 못 할 질문만 골라 했다. 이번에도 못 들은 척해야 하나. 해림이 입술을 조개처럼 꾹 다물었다가 슬쩍 벌리며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지 궁리했다.
“―!”
생각과 사고, 방법을 찾으려고 굴러가던 뇌가 일순간 멈췄다. 눈앞이 깜깜해지며 언젠가 주신도가 먹여 줬던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뜨겁고 촉촉한. 가늘게 새어 나온 숨결이 입술 위를 맴돌다가 아쉬울 만큼 빠르게 떨어졌다. 멀어지지는 않았다. 언제라도 도로 붙을 듯이 해림의 코끝에 날렵하고 둥근 코끝이 닿았다.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고 눈에 띄어 손가락질받을 수도 있는데. 당장 주신도를 밀쳐 내야 한다고 머리는 말하건만,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만큼 가슴이 뛰었다. 주변의 소음이 찰나에 사라지고 멍한 귓가에 두근거리며 맥이 요동치는 소리만 가득했다.
“도련님, 키스는?”
“…….”
“좋아, 싫어?”
주신도가 대답을 졸랐다. 피할 수가 없었다. 둘 중 하나는 내놓아야 했다.
주신도의 눈동자가 해림의 눈동자를, 콧잔등과 그 아래 도톰한 입술에 도장을 찍고 도로 올라왔다. 마주친 시선에 세상이 뒤흔들렸다. 이마에 툭, 하고 차가운 빗방울이 닿은 것도 뒤늦게 깨달을 만큼 커다랗게.
해림의 머리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눈썹을 가로지르며 속눈썹 위에 맺혔다. 눈을 깜박이자 뺨을 타고 아래로 굴러떨어져 맞붙을 듯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입술 사이를 가로질렀다.
누군가 해림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은 듯했다. 그 누구도 해림의 등 뒤에 자리 잡지 않았음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 머리를 눌렀다. 해림이 반항도 못 하고 그대로 끌려갔다. 고개가 앞으로 아주 조금, 눈곱만큼 밀려갔다. 거기에 공교롭게도 입술이 있었다. ㄴㄴㅇ
깃털보다 가벼운 접촉이었다. 어린애들 장난처럼 그렇게 무게가 없었다. 하나 해림의 머리를 누른 인력은, 중력은 세상에 있는 기계로는 잴 수 없을 무게였다. 무거워서 도무지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짓누르고 떨어졌다. 사이는 여전히 종이 한 장 거리였다. 입술을 벌리고 달려들면 그대로 잡아먹힐 만큼 가까웠다. 해림이 나직하게 뱉은 숨을 상대가 먹었는지 주위가 진공 상태가 된 듯 귀도 머리도 먹먹했다.
시선이 부딪쳤다. 안 그래도 불그스름한 눈동자가 불이 붙은 듯 붉었다. 그 사람에게 홀리지 말라던 유리의 경고가 알람처럼 시끄럽게 머릿속을 울렸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빗물이 후드득 떨어지며 강가를 두드렸다. 화려한 조명에 눈이 팔린 사람들은 이쪽을 보지 않았다. 해림의 눈에도 더는 야경이 보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저를 바라보는 눈빛만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신도가 손목을 잡았다. 멍멍하던 귓가에 열리며 온갖 소음이 들렸다. 주신도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해림을 잡아끌었다. 이번엔 해림도 망설이거나 머뭇대지 않았다. 주신도의 보폭에 맞춰 뛰듯이 강가를 벗어났다.
화려한 야경을 뒤로하고 택시를 잡아타고, 비가 땅을 무너뜨릴 기세로 쏟아지는 창밖을 봤다. 택시라는 좁은 공간에서는 서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손끝조차 부딪치게 하지 않았다. 닿기라도 하면 그 사이에서 불꽃이라도 튀길까 무서운 사람들처럼.
호텔에 도착해 로비를 통과하고,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남았을 때도 시선조차 교환하지 않았다. 생판 남처럼 서로 다른 곳을 보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복도를 지나는 데도, 방문을 여는 데도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어색한 공기가 둘 사이를 떠돌았다.
그 긴 과정이 방 안에 들어서며 한계치 이상으로 부푼 풍선처럼 한순간 뻥 터졌다. 주신도가 먼저 달려들었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 해림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린 짐승처럼 득달같이 해림의 뒷머리를 손아귀에 한가득 쥐었다.
아, 라고 신음할 새도 주지 않았다. 입술에 입술이 닿았다. 빗줄기에 듬성듬성 젖은 몸이 바짝 붙었다.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몸보다 뜨겁게 젖은 혓바닥이 입술을 낮은 언덕처럼 타고 넘었다. 그간의 갈증을 해소해 줄듯이 입 안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혀끝에 혀끝이 닿고, 여린 입천장에도 혓바닥이 닿았다. 아랫입술이 깨물리고 윗입술도 빨려 들어갔다. 혀가 입술 바깥으로 빠져나가면, 주신도가 깨물어 먹고 싶다는 듯 들러붙어 제 혀로 휘감아 쪽쪽 빨아 댔다.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숨을 내쉬기도 벅찼다. 입맞춤이라기보단 상대를 잡아먹고 싶어 하는 몸짓이었다. 해림이 숨을 고르려고 어깨를 밀면, 그 잠시를 못 참아서 주신도가 고개를 틀며 해림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잠깐, 하, 읍.”
해림이 고개를 틀려 해도 주신도가 단단히 잡아 고정시켰다. 이러다가 입술과 혀를 뜯어 먹지는 않을까. 해림이 말도 안 되는 무섬증에 주신도의 두 뺨에 제 손바닥을 갖다 댔다.
힘을 주어 밀어내려 했는데, 그 전에 주신도가 멈칫하며 떨어졌다. 씩씩거리며 내뱉는 숨결이 입술 위에서 흩어졌다. 당장 도로 씹어 먹고 싶다는 듯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물어지고, 붉어진 혀끝이 마찬가지로 발개진 입술 위를 적셨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창밖에서 불빛이 들어와 주신도의 얼굴 위에 드리웠다. 갈급한 표정이었다. 언젠가 손가락을 빨다가 얼핏 훔쳐본 그 눈빛이, 붉은빛을 받은 눈동자 속에 스몄다.
해림의 머리카락을 굳세게 잡았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목뒤와 날개뼈 사이와, 등골을 타고 숨이 막힐 만큼 느리게 내려와 엉덩이를 와락 움켜쥐었다.
“―아!”
손등에 힘줄을 세우며 바짝 끌어당겨 다리와 다리가 얽혔다. 성이 난 아랫도리가 주신도의 허벅지에서 제 위용을 과시했다. 해림이 뒤로 물러나려고 해도 언제 잡았는지, 다른 손도 해림의 엉덩잇살을 터트릴 듯 감싸 쥐고 있어 도망칠 수 없었다.
벌어진 입술에 주신도가 다시 입을 맞췄다. 깊고 진했다. 통통한 혀가 아닌, 굵직한 성기라도 해림의 입 안에 쑤셔 넣는 듯이 깊숙한 곳을 헤집었다가 혀끝으로 간질였다.
입맞춤이든 정사든 주신도는 상대의 목줄을 조르는 무지막지한 뱀처럼 굴었다. 해림의 얼굴이 점차 빨갛게 달아올랐다. 열도 열이거니와, 이러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몰랐다.
해림이 제 살길 궁리하겠다며 고개를 틀었다. 뒤꿈치를 바짝 들고 주신도의 뺨을 쥔 채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느리터분하게 문질렀다. 단단한 몸뚱이에서 유일하게 부드럽고 몰랑몰랑한 부위였다. 입술을 벌리고 그 안으로 혀를 미끄러트려 흡사 푸딩이라도 맛보듯 유영했다.
주신도가 얌전히 입맞춤을 받았다. 뺨이 움칫하며 경직되거나 뭉글뭉글 풀리는 움직임이 손바닥 끝에 적나라하게 닿았다. 그 감촉이, 단맛이 느껴지는 혓바닥과 엉킨 혀끝이 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발끝마저 찌릿했다.
수줍은 입맞춤은 거기까지였다. 주신도가 다시 주도권을 잡고 입술을 먹었다. 크게 베어 물 듯 입을 쩍 벌리고 해림의 볼이 홀쭉해질 때까지 빨아들였다가 두꺼운 손을 상의 아래로 밀어 넣었다. 헐렁한 티셔츠가 위로 훅 올라갔다.
해림이 두 팔을 위로 뻗자 옷이 훌러덩 벗겨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옷이 얼굴을 가린 그 짧은 찰나도 아쉬운지 주신도가 해림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잡아당겼다. 해림도 입술을 헤벌리고 주신도의 옷자락을 잡았다. 듬성듬성 젖은 옷가지가 주신도의 머리카락을 쓸고서 해림의 옷가지 위로 떨어졌다.
“아, 잠깐. 씻어야.”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짓씹으며 뱉은 발음이 입술 위에서 부서졌다. 주신도가 쪽쪽거리며 애타게 해림의 입술 주변에 입맞춤을 퍼붓고는 침대로 끌고 가려 했다.
“그래도.”
주신도가 해림의 바지도 마저 벗기려고 잡았다가 쯧, 하며 혀를 찼다. 그러더니 해림의 엉덩이 밑에 아래팔을 대고 번쩍 안아 들었다. 몸이 위로 훌쩍 들려 해림이 버둥거리다가 주신도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려는데 주신도가 고개를 비틀며 해림의 입술을 찾았다.
“하여튼 도련님, 앙탈 하나는 알아줘야 해.”
짧은 문장 사이에 쪽쪽거리는 소리가 몇 번이나 들어갔는지 모른다. 해림도 주신도를 밀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입술이 닿으면 입을 벌리고 혀가 섞이면 주신도의 뒷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틀었다. 입맞춤이 깊어져 숨이 막히면 잠시 얼굴을 떼었다가도 주신도에게 붙들려 금세 입술이 도로 붙었다.
욕실까지 가는 길이 험난했다. 해림의 등을 벽에 밀어붙이고 입술을 깨물다가, 소파에 한 발을 올려놓고 해림을 애처럼 추켜올리고, 해림과 시선을 마주하다가 앞에 놓인 테이블을 못 보고 부딪쳐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이리 쿵, 저리 쿵 부딪치다가 가까스로 욕실에 도착했다. 그제야 주신도가 해림을 놔줬다. 바닥에 발을 붙이기 무섭게 머리 위에서 소낙비처럼 물이 쏟아졌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처럼 기세가 거세 바지와 그 안에 입은 속옷까지 흠뻑 젖었다.
살갗에 들러붙은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벗겨졌다. 해림의 나신이 먼저 드러났다. 차갑던 물의 온도가 미적지근하게 올라갔다. 주신도의 시야 아래 놓인 헐벗은 몸뚱이도 발긋발긋하게 익었다.
해림의 시야를 가리듯 주신도가 입술을 들이밀었다. 혀와 혓바닥이 엉키는 질척한 소음이 물 떨어지는 소리에 묻혔다.
“벌써 이렇게 됐어?”
“사장님도, 으응……. 읏.”
해림이 말 한 마디 못 뱉게 입술을 막고서 주신도가 손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젖은 옆구리를 쓸다가 더 아래로. 터럭 하나 없는 매끈한 아랫배를 건드렸다가 바짝 선 기둥을 움켜잡았다. 해림이 입술이 틀어 막힌 채 어깨를 움칠했다. 기둥을 감싼 손바닥이 떨어지는 물보다 뜨거웠다.
느리게 시작을 끊었던 손길이 점차 속도를 붙였다. 해림이 주신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려고 해도 입술이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도리질을 치려 하면 아래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협박하듯 몰아붙였다.
간간이 아랫도리가 부딪치면, 끄트머리가 비벼지면, 커다란 한 손에 두 개가 같이 잡혀 흔들리면 해림은 머리가 다 아득해졌다. 바깥으로 빠져나온 혀와 얽힌 다른 혓바닥도, 깨물려서 통통하게 부은 입술도 절정을 재촉했다. 해림을 욕실 벽에 새겨 넣을 듯 주신도가 그 커다란 몸으로 밀어붙이고는 손목에 핏줄이 솟게끔 흔들었다.
해림이 다급하게 주신도의 등을 껴안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거친 손짓에 아랫도리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빳빳하게 고개를 세웠다. 아, 하고 해림이 가늘게 소릴 뱉었다. 엉덩이가 젖은 벽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그 사이에 주신도가 손을 넣어 살집을 뗄 듯이 쥐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주신도의 날갯죽지 근처를 헤매던 해림의 손가락에 바짝 힘이 들어가며 손톱이 물기 어린 피부 위를 긁었다.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해림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아랫배에 흰 물이 후드득 튀었다.
“하…….”
물방울이 맺힌 속눈썹이 버르르 떨렸다. 해림이 참았던 숨을 내쉬며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목덜미에 무수한 입맞춤이 닿았다. 다정하게 쪽쪽거리다가도 한입에 삼킬 듯이 입술을 벌려 물고, 가볍게 이를 세웠다가도 혓바닥으로 목을 축일 듯이 핥았다.
“침대로? 아님 여기서.”
친절하게 선택권도 준다. 주신도가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묻는 게 놀라워 해림이 희미하게 웃었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고 눈꼬리가 느른하게 굽었을 뿐인데 주신도가 생전 처음 보는 생명체 보듯이 해림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아래턱에 금이 가도록 이를 질끈 깨물고서 해림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뒤에 있는 유리에 얼핏 주신도의 목덜미와 턱선이 비추었다. 귀 아래로 이어지는 턱선이 길어졌다가, 입을 벌린 주신도가 해림의 목덜미를 거세게 물었다. 해림의 입에서 통증 어린 신음이 튀어나오도록. 입술이 떨어진 곳에 벌겋게 잇자국이 남았다.
“여기서.”
질문도 대답도 본인이 했다. 해림을 돌려 벽을 짚게 하고서는 성급하게 손가락으로 둔덕을 갈랐다. 허리 곡선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벌어진 둔덕과 주신도의 손가락을 타고 흐르다가 해림의 허벅지 안쪽과 둥글어진 음낭을 덧그리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으.”
오밀조밀한 주름을 문지르던 손가락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해림의 엉덩이가 봉긋하게 솟았다. 다른 손으로 해림의 목울대 쪽을 움켜잡았다가, 손가락이 목선을 타고 올라가 턱을 잡고 뒤로 돌렸다. 힘없이 젖혀진 해림의 얼굴에 주신도의 입술이 도장을 찍었다. 이마와 콧잔등에, 그리고 코끝과 인중에. 입술에 닿아서는 종착지를 찾은 것처럼 깊게도 들어갔다.
아래를 헤집는 불쾌감을 입맞춤이 녹였다. 비음이 참을 새 없이 흘러나왔다. 처음처럼 몰아치지 않고 사람을 녹일 듯이 주신도가 입을 맞췄다.
손가락이 두 개로 늘었다. 물기 어린 손가락으로 점막 이곳저곳을 꾹꾹 눌렀다. 속살이 손가락을 빠듯하게 물어 검지와 중지가 사이를 벌릴 때는, 해림의 무릎이 휘청 꺾였다. 주신도의 아래팔이 배를 감싸 꼴사납게 넘어지지는 않았다.
해림이 벽에 이마를 댔다. 미지근한 물이 적시고 간 타일은 이마를 식히지 못했다. 오히려 벽의 열기가 옮은 듯 몸이 후끈거렸다. 잔뜩 벌어지고 눌린 구멍 안쪽도 뜨거웠다. 엉덩이를 옴찔대며 해림이 팔을 뒤로 돌려 주신도의 손목을 잡았다. 힘줄이 솟았다가 가라앉는 적나라한 반응에 해림의 귓불이 더는 벌게질 수 없을 만큼 붉어졌다.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다른 게 들어오겠다는 예고였다. 뒤에서 한 손으로 엉덩이를 그러쥐자 살집 속에 숨었던 구멍 위로 물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축축한 주름에 선단이 닿았다. 다물려는 구멍을 억지로 비집으며 선단이 모습을 감췄다.
손가락 두 개만 간신히 받을 만큼 풀린 구멍으로는 어림도 없는 크기였다. 지끈한 통증에 해림의 미간에 주름이 아로새겨졌다. 불긋하게 익은 하얀 목에도 푸른 핏대가 섰다.
“흐……, 읏. 흡.”
얼굴 위에서 입맞춤이 끊이질 않았다. 위로하듯 쪽쪽대다가, 신음을 막을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양 입술을 앙 물었다. 목과 엉덩이를 쥐었던 손은 어느새 해림의 골반을 잡았다. 단단히 잡고서, 주신도가 해림을 바짝 끌어당겼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깊숙이 박자 해림의 발꿈치가 깜짝 놀란 듯이 일어섰다. 터져 나와야 할 비명은 주신도의 입 속으로 사그라지고, 단번에 꿰뚫린 충격에 온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해림이 다급히 주신도의 손목을 쥐고 손톱을 세워도 결합은 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려는 듯 주신도가 해림을 벽에 짓눌렀다. 벌어진 둔덕 사이로 주신도의 아랫배가 닿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꺼끌꺼끌한 거웃이 문질렀다.
“……아!”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해림이 신음을 뱉었다. 입술은 다시 먹히고, 한 몸처럼 들러붙은 아랫도리가 약간의 틈을 주었다가 도로 맞붙었다. 둥글고 매끈한 엉덩이가 주신도의 아랫배에 눌려 납작하게 짜부라졌다.
해림이 물이 흐르는 벽에 이마를 대고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한꺼번에 받아들인 둔통과 정수리에 달린 머리카락까지 쭈뼛 서는 아찔함이 같이 찾아왔다. 물이 흐르는 벽에 이마를 대고 가늘게 숨을 내쉬어도 감각은 잦아들지 않았다.
“잠깐만요, 잠시만, 조금만…….”
적어도 적응하는 시간은 줘야 할 텐데 주신도에게 그런 아리따운 양심이 살아 있을 리가. 관찰하듯 빤히 내려다보다가 주신도가 불시에 해림의 머리칼을 쥐고 잡아당겼다.
목이 아프도록 고개가 돌아갔다. 상체가 비틀어지며 자연스레 엉덩이도 살이 둥글게 솟게끔 힘이 들어갔다. 들어찬 기둥을 뜨뜻하고 굴곡 있는 점막이 쥐어짜자 주신도가 잇새로 나지막하게 신음을 뱉고서 해림의 입술을 야금야금 먹었다.
“아, 좀, 잠, 읏, 사장, 님……!”
“그럴 시간 없댔잖아.”
입술은 입술대로 먹히고 아랫도리에도 기둥이 처박혔다. 부딪칠 때마다 철벅철벅 물기 어린 소리가 터졌다. 소리라도 마음껏 내지르면 괜찮을 텐데, 주신도의 입술이 틀어막고 있어서 숨을 내쉬는 일조차 버거웠다.
구멍이 벌어지고 핏줄이 어지럽게 돋은 기둥이 밀고 들어오고, 조금 느리면 숨이라도 쉬지 시간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할 셈인지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안을 쿵쿵 짓찧을 때마다 해림의 입이 쩍쩍 벌어졌다. 살려고, 숨 쉬려고 벌린 입술 안으로 주신도가 새 둥지 틀 듯 혀를 밀어 넣고, 해림이 숨이 막혀 버둥거리면 벌주듯이 밑에서 속살을 쑤시고 들어왔다.
“허, 읍, 흐……, 아아, 윽, 읍…….”
남의 입에 들어와 제멋대로 날뛰는 혓바닥만큼이나 아랫도리도 버릇이 없었다. 구멍이 불쌍하리만치 벌어지게 박혀서, 더는 들어갈 곳 없이 막힌 점막까지 밀고 올라왔다. 해림이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감싸며 다른 손으로 주신도의 팔을 잡았다. 갓 자른 나무통 같은 아래팔이 해림이 고개를 틀지 못하게 목 부근을 단단히 조이고 있었다.
“제발요, 살살.”
해림이 애원했다. 신음에 울음도 섞였다. 몸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머리도 몽롱했다. 숨이 막혀서인지 속살을 죄다 으깰 듯이 들락이는 기둥 때문인지 이유를 몰랐다. 한 가지만 확실했다. 이러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아팠다. 숨도 쉬기 어려웠다. 쿵, 하고 들이받으면 아파서 비명이 터졌다가 다시 한번 들어오면 고통과 통증이 홀딱 몸을 뒤집어 쾌감이 됐다. 배가 움찔거리고 오금이 조여들며 신경이 타들어 가듯이 오싹했다. 아까 봤던 화려한 조명이 눈앞에서 번쩍번쩍 터지고, 손에 잡힌 살이 안으로 움푹 들어가게 힘을 줬다가 손톱으로 긁어내렸다.
물컹물컹 힘을 잃었던 아랫도리는 다시 딱딱하게 선 지 오래였다. 천장에 달린 샤워기에서 물이 주르륵주르륵 떨어지는데, 그 물방울인지 아니면 제 몸에서 나온 건지 투명한 물방울이 통통한 선단에 동글동글 매달렸다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좀 전에 시원하게 한 발 뱉어 놓고도 뭐가 모자라다고.
힘들어서 눈이 팽팽 돌아가건만 아래서 쑤석거리는 몸짓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한 번 푹 찌를 때마다 해림의 몸이 벽과 하나가 될 듯이 붙었다. 해림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이러다가 죽겠다고 호소하듯 올려다봐도 주신도는 양심이 쥐뿔도 없었다. 해림의 입술과 혓바닥을 우물우물 씹고 아래로는 몸속을 꿰뚫느라 바빴다.
“도련님. 아까 대답 안 했어. 지금 해.”
“뭘, 아, 뭘요. 흑, 읏, 거기 만지지 마.”
“어디. 여기? 배꼽? 젖꼭지?”
“―아!”
목을 감싼 팔을 내리고서 주신도가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떼어 낼 듯이 검지와 엄지로 으깨듯 눌렀다가 잡아당기고, 조물조물 비볐다가 살집 안으로 숨게 꾹 눌렀다. 손톱으로 긁다가 손가락을 떼자 입술만큼이나 벌겋게 부푼 젖꼭지가 유륜 위로 통 튀어나왔다.
“대답을 해야지. 왜 남의 질문 멋대로 씹어.”
“내가, 언, 제. 흑. 아, 아!”
“도련님 머리가 이렇게 나빴어? 키스 좋아하냐고 물었잖아, 아까.”
언제 한 질문인데. 말은 못 해도 주신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들이민 걸로 얼추 대답이 된 줄 알았더니. 해림이 입을 꾹 다물자 허리 아래를 단단히 쥐고서 주신도가 칼집에 칼을 박듯 몸을 들이받았다. 해림이 아악, 에 가까운 신음을 터트리고는 벽을 손으로 짚었다. 오그라든 손가락이 버들버들 떨리고 있었다.
“빨리.”
주신도가 해림의 등에 제 몸을 붙였다. 무게를 실어 누르며 아랫도리를 깊은 곳까지 밀어 올렸다. 해림의 뒤꿈치가 자연스레 위로 따라 올라갔다. 발끝으로 미끄러운 바닥을 딛고 해림이 도리질을 쳤다. 더 들어오면 뱃가죽이 뻥 터질지도 모르는 압박감이 아랫배에 넘실거렸다.
“안 돼요, 더는, 아, 들어오지 마, 읏…….”
“대답부터.”
“싫…….”
위로 아무리 뒤꿈치를 들어도 도망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벽과 주신도 사이에 끼인 채 해림이 숨을 할딱였다. 더는 파고들지 못하게 주신도의 옆구리를 밀어도 얌전히 비켜줄 측은지심이 있을 리가. 오히려 해림을 압사시킬 듯 몰아붙였다.
“제발…….”
애달픈 목소리에도 주신도는 꿈쩍하지 않았다. 해림의 고개를 돌려 그 입술 위를 새처럼 쪼기 바빴다. 비유하자면 분명 맹금류이리라. 해림의 입술이 붉은 살점이라도 된다는 듯이 날카롭게 쪼아 대는 게.
“대답.”
해림이 아랫배를 움찔거리며 속살을 죄면 이를 질근 깨물고 참으면서 주신도가 대답을 독촉했다. 해림도 입술을 꾹 물고 반항했다. 몸을 자근자근 밟는 감각을 이겨 내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입을 열면 혀가 뭉텅 넘어오고, 젖은 입 안을 훑다가 목구멍 속으로 넘어가려고 미끈둥하게 움직였다.
이래 놓고 대답을 하라니.
안에 자리 잡은 기둥은 아예 속살을 제집 삼을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그게 더 이상했다. 차라리 전처럼 마구잡이로 헤집어 대면 언젠가 끝이 나겠다 희망이라도 품겠는데, 기둥이 영원히 안에서 나가지 않을 듯 움직이지 않았다.
속살이 움찔거리며 옥죌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신음이 터지는 건 해림 쪽이었다. 배 속이 간질거리고 답답했다. 아까부터 성이 나서 손길을 바라는 아랫도리도 참을성이 바닥을 보인 듯 가늘게 바르르 떨렸다.
해림이 본능적으로 손을 아래로 빼자 주신도가 재빨리 잡아챘다. 그 탓에 엉덩이가 뒤로 빠졌고, 주신도의 몸과 한결 깊숙이 붙었다.
“어딜 감히. 안 돼. 대답부터.”
“읏, 진짜…….”
사람 미치게 만들려고 작정을 했다. 대답해 주기 전까지는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거라는 듯 주신도가 해림을 껴안았다. 가슴과 배를 굵은 팔로 조이고서 입을 크게 벌려 벌게진 뺨을 물고 쪽쪽 빨았다.
정말 못됐다. 원래도 이기적이고 나쁜 인간이지만 정사 중에도 이렇게 사람을 달달 볶을 줄은 몰랐다. 배에 힘이 들어가 아랫배에 어렴풋이 윤곽이 비칠 만큼 뱃가죽이 안으로 훅 들어가면 저도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고 이를 질끈 깨무는 주제에. 밀려오는 쾌락을 참듯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해림의 입술을 와락 깨물면서도 주신도는 물러나지 않았다. 끈질기게 해림의 백기를 기다렸다.
나름 참을성이 많다고 여겼건만 주신도 앞에선 굼벵이 앞에서 주름 잡는 수준이었다. 해림이 속살을 조여도 입술을 깨물고 늘어질지언정 봐주지는 않았다.
뒤꿈치를 들었다가 내려놔도, 어떻게든 슬쩍슬쩍 움직여도 감질만 났다. 거칠게 뒤흔드는 행위가 필요했다. 눈앞이 하얘졌다가 빨개지는, 까맣게 물들었다가 벼락처럼 쾌락이 내려치는. 이런 정적인 결합은 주신도와 해 본 적 없었다. 몸이 익숙함을 갈구했다.
“어서.”
그깟 대답이 뭐라고.
“정해림.”
귓가에 입술이 닿았다. 주신도가 동그란 귓불을 잇새로 물고 잡아당겼다. 돌아 버릴 것 같은 간질거림이 목뒤를 타고 뇌에 직격했다. 주신도의 입술 새로 새어 나온 제 이름이 거기에 불을 붙였다. 심지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좋 ……아해요.”
“못 들었어. 다시.”
개미 소리처럼 작아도 발음은 정확했다. 기둥을 문 속살이 제멋대로 조여들었다가 풀렸다가 다시 삼킬 듯이 오그라들며 해림의 인내심 끄트머리를 시커멓게 태웠다. 해림이 울먹였다.
“좋, 아, ……아!”
싫다, 좋다, 두 가지 선택권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싫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진심이 아니었다. 거짓이라도 쉽게 내뱉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다. 주신도가 해림의 골반을 움켜쥐었다. 손등에 힘줄과 핏줄이 두꺼운 가죽 위로 불거지게끔 힘을 쥐고서 뒤꿈치를 들고 발발 떠는 해림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해림이 눈이 홉떠졌다. 얌전히 머물러 있을 때보다 몸집을 두툼하게 부풀린 기둥이 해림의 속살을 뒤집어 놨다. 안의 굴곡을 반질반질하게 펴기라도 할 듯이 빠져나갔다가 안으로 쑥 치고 들어오는데, 엉덩이를 매섭게 얻어맞은 것처럼 철썩 소리가 다 났다.
“아, 아읍, 흐……, 아!”
해림이 이마를 벽에 문질렀다. 젖은 욕실에 신음이 메아리로 돌아왔다. 소리가 색을 가진 듯이 해림의 귓바퀴를 붉게 물들였다. 먹음직스러운 살코기라도 본 것처럼 주신도가 날카로운 송곳니로 귓바퀴 위쪽을 깨물었다. 해림이 어깨가 단박에 움츠러들었다.
퍽, 퍽 박아 대는 몸뚱이가 해림을 벽에 처박을 듯 사납다. 통증이 몸을 저릿하게 물들이다가 1초도 안 되어 야릇하게 아랫배를 울렸다. 배꼽 쪽으로 바짝 달라붙은 아랫도리가 손 한 번 안 대고도 질질 싸려고 맹물을 줄줄 흘려 댔다.
“도련님이 하도 소릴 질러대서 대답 잘 못 들었는데. 다시 말해. 얼른. 더. 더 말해 봐.”
거짓말. 그렇게 소릴 낸 적도 없거니와 아무리 물이 폭우처럼 쏟아져도 한 몸처럼 붙어 있으면서 못 들었을 리가 없다. 공연히 심술이었다. 해림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목이 잡혔다. 두 팔이 다 잡혀서 뒤로 당겨졌다. 주신도가 뒤에서 턱, 턱 들이받을 때마다 신음이 물처럼 쏟아졌다.
“빨리.”
해림을 쥐어 짜낼 듯 주신도가 박아 댔다. 해림의 발가락이 타일을 긁으며 오므라들었다가 펴졌다. 뇌는 이미 뽑혀서 바닥을 나뒹구는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핏줄이 얼기설기 얽힌 기둥이 닫히려는 속살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 꾹 누르면, 해림의 눈시울이 벌게졌다가 물방울과 눈물이 섞여서 떨어졌다.
이성이 졌다. 쾌락만 남았다. 해림이 도리질을 쳤다. 입이 제멋대로 열렸다. 혀뿌리가 나가지 말라고 잡고 있던 말이 마구잡이로 튀어 나갔다.
“흐, 읍……, 좋, 아요. 좋……, 좋아. 윽, 아……!”
억센 손이 뒷머리를 휘어 감고 잡아당겼다. 상이라도 주듯 주신도가 입을 맞췄다. 엉키는 혀에 눈앞이 하얘졌다. 속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기둥이 부풀었다. 사방을 에워싼 점막 구석구석을 푹푹 찔러가며 걸쭉하고 난잡하게 정액을 뿌려 댔다.
해림의 목울대가 입 안에 가득 고인 침을 삼키며 꿀렁였다. 입술이 열기를 못 이기고 버들버들 떨리고, 곧추선 기둥에서도 흰 물이 울컥울컥 터져 나왔다. 예상치도 못한 절정에 해림이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두 번이나 연속으로, 게다가 한 번은 손도 안 대고 사정하려니 온몸에서 힘이 쪽 빠졌다. 다리가 휘청거리며 무릎이 굽어졌다. 쓰러질 뻔한 해림을 주신도가 보듬어 안았다. 등을 제 몸에 기대게 하고 해림의 목울대와 목덜미와 입술을 이빨이 근지러운 강아지처럼 깨물었다.
해림이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간간이 움찔거렸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거푸 터져 나왔다.
“이제…….”
그만 몸을 씻고 나가서 쉬자고, 그리 권할 생각이었다. 넋이 반쯤은 나가서 거기까지 사고가 미친 것도 용했다.
주신도가 해림의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댔다. 이마에 닿은 입술이 웅얼거린 소리에, 나른하게 반쯤 감겨 있던 해림의 눈가가 휘둥그레 벌어졌다.
―이제 침대에서.
분명 그런 말이었다. 해명을 바라며 올려다보는 해림을 주신도가 질질 끌고 욕실을 나갔다. 욕실에서 그 난리를 치고서도 해림을 끌고 가는 팔뚝이 방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흔들림 없이 튼튼했다.
* * *
무거워서 들리지 않는 눈꺼풀을 간신히 열었다. 밖이 밝았음을 알리는 빛이 널찍한 침대 위에 듬성듬성 떨어져 있었다.
눈만 깜박이며 낯선 천장을 올려다봤다. 몸이 제 몸뚱이 같지가 않았다. 손가락을 들어도 팔뚝까지 이어지는 뼈와 근육과 관절이 삐거덕거렸다.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술을 진탕 마시기라도 했으면 필름이라도 끊어졌으련만, 하필이면 말짱한 제정신에 일을 치렀다. 마지막은 기억에서 삭제된 걸 보니 술 한 방울 없어도 다행히 적절한 때에 기절한 모양이었다.
죽음의 문턱을 밟고 돌아왔다, 라고 평해도 되는 밤이었다. 원래도 다른 사람 사정 눈곱만큼도 안 봐주는 인간이었지만 어제는 무슨 녹용을 사발로 들이켜고 왔는지 침대가 부서지라 미쳐 날뛰었다. 해림의 몸뚱이도 침대와 함께 유명을 달리할 뻔했다.
입술엔 또 얼마나 집착하는지. 굳이 손가락으로 만져 보지 않아도 퉁퉁 부은 게 눈에 보이는 성싶었다. 그뿐이랴. 고양잇과 짐승의 까끌까끌한 혓바닥으로 하루 종일 핥고 빨아 댄 것처럼 얼얼하고 쓰라렸다.
해림이 눈을 끔벅거리다가 물소리가 그친 욕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거대한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가무잡잡한 살색이 하얀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다가 옆에 걸린 샤워 가운을 걸치고 바깥으로 나왔다.
“일어났어? 난 도련님 죽은 줄 알았어. 아무리 흔들어도 깨질 않더라고.”
끈은 좀 매듭지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밤새 물고 빤 사이라도 눈 뜨자마자 남의 다리 사이를 구경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림이 외면하듯 아래팔로 눈을 가렸다. 시야가 깜깜해지니 마음이 아주 조금 편안해졌다.
머리맡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해림의 아래팔을 옆으로 치우고서 주신도가 내려다봤다. 시선이 마주치고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불그스름한 눈동자와 부딪치면, 해림은 종종 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잊어 먹었다. 언제인가부터 그랬다.
“도련님, 돌아가면 보약부터 먹자. 비실비실해서 손만 대도 픽 하면 쓰러지고. 이렇게 약해서 얻다 써먹어.”
이런 억울함, 예전에 똑같이 겪어 본 거 같은데. 유연성 없는 허리를 반으로 꺾어다가 위에서 내리꽂고, 더는 안 나오는 정액을 억지로 뽑아내려고 쥐고 흔들고, 아랫도리는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몰아붙였으면서 적반하장이었다. 주신도에겐 양심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가슴 깊이 깨달았다.
“일어나. 나갈 준비 해야지.”
“못…….”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해림이 큼큼 헛기침하자 주신도가 생수를 가져왔다. 약 올리듯 제 앞에서 뚜껑을 따 꼴깍꼴깍 마신다. 목이 바짝 말라 줄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더니, 주신도의 얼굴이 대뜸 아래로 내려왔다.
“음…….”
입술이 벌어지며 자연스레 물이 넘어왔다. 마른 혓바닥을 적시고 목구멍 너머로 흘러 들어갔다. 입 안을 가득 적신 물이 꿀 섞은 양 달았다. 저도 모르게 매달려서 마실 만큼.
“나갈 시간까지는 좀 남았는데, 한 번 더?”
주신도가 은근슬쩍 해림의 옆자리에 누웠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물기가 덜 마른 가슴이 얼핏 드러났다. 손가락으로 해림의 입술을 뭉근하게 누르며 주신도가 입맛을 다셨다. 얼굴이 조금만 더 가까워져도 도로 입술이 닿게 생겼다.
“아니요.”
해림이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는 힘을 다 끌어모아 상체를 일으켰다. 비록 두 손바닥으로 침대를 짚고, 허리가 우둑 소리를 내며 비틀렸다는 착각은 들었어도 주신도와 거리를 두는 데는 성공했다. 주신도가 베개를 끌어안고서 투덜거렸다.
“어젠 내 밑에서 좋아 죽겠다고 울었으면서 지금은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도련님, 왜 그렇게 냉정해. 같이 밤을 보냈으면 최소한 아침까지는 잘해 줘야지. 손님한테 이랬으면 도련님은 팁 한 푼도 못 받고 그 자리에서 바로 쫓겨나. 지금까지 대체 뭘 배웠어. 먼저 싸고, 먼저 기절하고, 매너도 없고.”
그놈의 손님 타령. 말하는 꼬락서니가 하도 얄미워 주둥이 한 대만 때렸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해림이 한숨으로 대신하고 두 발을 침대 아래로 내렸다. 허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는데,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자마자 무릎이 꺾여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시큰한 무릎을 둘째치고 뒤에서 시선이 느껴져 양 뺨에 열이 화끈하게 올랐다. 해림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테이블을 잡았다. 팔에도 힘이 안 들어갔다. 다리에 올무 걸린 사슴처럼 제자리에서 끙끙거리기만 했다.
푸핫, 하고 뒤에서 결국 웃음소리가 터졌다. 주신도가 낄낄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해림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는데, 침대로 끌고 가기 위함인지 돕기 위함인지 그 의도가 불분명했다. 해림이 팔뚝을 잡은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제가 알아서 일어날게요.”
“저기까지 기어가게? 한 번 가 봐. 엉덩이 흔드는 거 보기 좋겠네.”
주신도가 비죽거리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해림의 엉덩이라도 구경할 듯 불량스레 고개를 옆으로 틀고 빤히 쳐다봤다.
시선이 어디에 꽂혔는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해림이 눈앞에 보이는 시트를 잡아당겼다. 주신도가 그 끝을 손으로 잡아 흰 시트가 주름 없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어차피 볼 거 다 본 사인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어서 가 봐. 빨리 가 보라니까.”
발끝으로 해림의 발목을 툭툭 차며 주신도가 재촉했다. 손길 한번 뿌리쳤다고 그 뒤끝이 상상을 초월했다. 해림이 시트를 포기하고 침대를 짚고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똑바로 세우는 데도 힘이 들었다.
“……읏.”
기어가는 꼴 보이기 싫어 가까스로 일어나기는 했는데,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나신인 데다, 설상가상으로 둔덕 사이로 미지근한 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엉덩이가 봉긋 솟도록 힘을 줘도 이미 흘러내린 게 멎지는 않았다. 그늘진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흐른 액이 무릎 옆에 둥글게 맺혔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기묘한 정적.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해림의 귓바퀴가 발개졌다. 목뒤도 같은 색이었다. 해림이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한 걸음 내디뎠다. 걸음마 하는 애처럼 뒤뚱거리지 않으려고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서.
침대 위에 흐트러진 시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 걸음 남짓 떨어져 있건만, 어느 순간 등 뒤에 열기가 바짝 붙었다. 샤워 가운이 가리고 있을 단단한 가슴이 해림의 어깻죽지에 닿았다. 해림의 고개가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졌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귓등에 입술이 닿았다.
“잘 봤어.”
뭘 잘 봤다는 건지. 해림이 저리 가라며 주신도를 밀치려고 몸을 반쯤 돌린 찰나, 오금에 팔이 쑥 들어왔다. 몸이 허공으로 훌쩍 떠올랐다. 화들짝 놀라서 커다랗게 움찔해도 주신도는 해림의 등까지 단단히 받치고 안아 들었다.
“다음 편은 욕실에서 보여 줘. 우리 도련님이 그렇게 보여 주고 싶다는데, 내가 또 봐 줘야지.”
상업 포르노 예고편이라도 본 양 다음을 기대하는 말투다. 해림이 버둥거렸다.
“이거 놓고, ……윽.”
팔다리를 휘젓다가 허리에 지끈한 통증이 스쳐 그대로 멈춘 채 입술을 사리물었다. 삐끗한 듯 허리가 징징 울었다. 꿈쩍도 못 하는 해림을 품에 껴안고서, 주신도가 사악하게 킬킬거리며 즐겁게 욕실로 향했다.
반나절은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주신도는 양심을 진작 팔아 버린 인간답게 욕실에서도 해림을 괴롭혔다. 한 번 더 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해림이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달고 호소한 게 천만다행으로 먹혀 끝까지 가지는 않았다. 물론, 뒤처리를 해 준다는 핑계로 손가락을 넣고서 부은 안쪽을 중구난방으로 문지르기는 했으나.
순수한 목적과 달리 야릇하게 지분거린 탓에 물렁물렁한 아랫도리가 버들버들 떨며 정액을 토해 냈고, 그제야 주신도가 만족한 듯이 해림을 정성스레 씻겨 욕실에서 내보냈다. 씻긴 건지 희롱을 당한 건지 경계가 흐릿한 채로 침대에 엎어졌다.
「우리 도련님이 약해 빠져서 내가 오늘은 좀 봐준다. 이따 저녁엔 데리고 갈 거니까 그때까지 푹 쉬어. 어디 산책 갈 생각 말고. 정 바람 쐬고 싶으면 호텔 안이나 돌아다니든가. 멀리 가지 마.」
어디 발가락 하나 까닥할 수 있어야 산책을 가든 도망을 치든 하지. 고개도 마음대로 못 가눌 만큼 지친 해림을 보고 주신도가 잘도 지껄였다. 어찌나 기가 막힌지 하, 하고 실소가 다 터졌다. 비웃음기가 역력한데도 주신도는 화를 내기는커녕 해림의 뒤통수에 입술을 비비적거렸다.
「다녀올게.」
다정한 인사. 주신도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말이었다.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흡사 자장가 같았다.
해림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그 인사를 곱씹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자는 척하느라 주신도가 어떤 얼굴로 그런 말을 했을지, 그 표정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아쉬움이라.
주신도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어색하고 낯설었다. 가슴이 멋대로 술렁거려 해림은 한참 동안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다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그리고 눈을 뜨니 바깥이 깜깜한 밤이었다. 한숨 푹 잤다고 몸은 한결 나아졌다. 아직 몇 대 얻어맞은 듯이 찌뿌듯하기는 했으나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해림이 기지개를 쭉 켜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끈거리는 허리를 노인네처럼 주먹으로 퉁퉁 두드리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냈다. 마른 목을 내키는 만큼 축이고서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저녁에는 데려간다고 했던 거 같은데. 졸리고 피곤한 와중에 지나가듯이 한 말이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 급하면 방으로 전화를 하든 누구를 보내든 하겠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몸을 씻고 나왔다.
상의 소매에 팔을 집어넣고 있을 무렵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신도면 키를 가지고 있을 테니 굳이 두드리지 않을 테고. 해림이 부랴부랴 옷을 입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문 열어. 형님이 보내서 왔으니까.”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양과 늑대 우화가 떠올랐다. 문 아래로 발이라도 집어넣어 보라고 해 볼까, 실없는 상상은 금세 접었다. 여기서 형님이라고 호칭이 붙을 인간은 주신도 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정장을 차려입은 덩치가 문밖에 서 있었다. 인오였다. 해림을 위아래로 쭉 훑고는 예의 그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다. 반지르르한 낯짝이나 해림은 불쾌감을 먼저 느꼈다.
“정장 입어. 갈 데 있으니까.”
“사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로비에.”
안 간다고 하면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갈 것처럼 인오가 해림을 내려다봤다.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음에도 온화함이나 순박함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틈을 보이면 바로 날카로운 칼끝으로 후벼 팔 듯 매서웠다.
해림이 문을 닫으려 했으나 인오가 턱 하니 손으로 막고 빨리 갈아입으라며 턱짓을 보냈다. 하는 수 없이 문을 연 채 방금 입은 옷을 다시 벗었다. 정장으로 갈아입는 내내 등허리나 허벅지에 시선이 닿았다. 끈질기고 질척이는 시선이 싫어 해림이 후다닥 옷을 갈아입었다.
차라리 주신도가 올라왔으면 나았을 것을. 해림이 찝찝한 기분을 떨치며 방을 나섰다. 옆에 선 인오가 능글맞게 히죽거렸다.
“하여튼 얼굴 하나는 존나 예뻐.”
해림이 먼저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인오가 휘파람을 불며 따라왔다. 끈덕진 시선이 등을 훑었다. 헐렁한 옷깃 사이에서 아직 물기가 덜 마른 살갗을 훑는 성싶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해림이 시선을 차단하듯 목뒤를 손아귀로 감쌌다.
“형님이 남자는 질색을 해서 케이 그 미친놈이 울며불며 생난리를 쳤는데. 너는 왜 옆구리에 끼고 있을까. 말 좀 해 봐.”
엘리베이터 구석에 기대어 인오가 말을 붙였다. 해림도 답을 모르는 질문이었다. 처음에는 분명 누가 좋아서 만지냐고 진저리를 치던 주신도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얼굴은 예쁜데 여자 같지는 않고. 혹시 잘 빨아?”
인오가 혀를 길게 빼고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아 입가에 대었다. 무얼 표현하는지 손짓이 적나라했다. 해림이 흘긋 보고서는 외면했다.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
“아님 속궁합이 존나 잘 맞아? 허리를 어떻게 돌려서 형님이 저 모양이야? 나한테도 알려 주라. 몸으로 알려 주면 더 좋고. 주소 줄 테니까 이따 올래? 형님 몰래.”
“…….”
“정 무서워서 그러면 내가 형님한테 잘 말할게. 형님이 지 물건 끔찍이 아껴도 나한테는 종종 빌려주거든. 내 입으로 말하긴 뭐 한데, 형님이 날 좀 많이 아껴.”
“…….”
“원래 형수님, 형수님 부르다가 구멍만 잘 맞으면 형님이랑 구멍 동서 되고 그러는 거잖아. 나 잘해. 그쪽 눈으로 이형이 보지 않았어? 좋아서 질질 싸는 거.”
저를 희롱하는 건 무시하면 그만이나 이형까지 들먹거리자 울컥 화가 솟았다. 해림이 가슴을 들썩이며 크게 한숨 짓는 걸로 분노를 내리눌렀다. 마침 로비를 알리며 엘리베이터가 멈춰서 망정이지, 제발 그 입 좀 닥치라고 저도 모르게 대놓고 말할 뻔했다.
주신도의 뒷모습이 보이자마자 인오가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우고서 통화를 이어 가던 주신도가 흘긋 고개를 돌렸다. 패드를 한 손에 들고 로비에 앉아 있는 모습이 출장 온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가 없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주신도가 패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형님, 불러왔어요. 어디 안 가고 방에 얌전히 잘 있던데요.”
중국어로 떠들어 전화기 너머 상대와 무슨 내용을 나누는지 몰랐다. 해림과 시선이 마주치고 주신도가 전화를 끊었다. 해림이 슬며시 제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잠들기 전, 머리카락 사이를 문질렀던 입술이 떠오른 탓이다.
“잠 좀 잤어? 몸은 좀 어때.”
주신도가 일어나 해림의 앞에 섰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이마 너머로 쓸어 넘겼다. 다정한 손길도 걱정이 담긴 말투도 어쩐 일인지 낯부끄러웠다.
“……잘 잤어요. 괜찮아요.”
해림이 고개를 슬쩍 틀며 주신도의 손을 피했다. 사방이 훤한 로비에서, 그것도 인오가 옆에서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데서 보일 모습은 아니었다.
주신도의 손이 허공에서 움칫하더니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아랫입술이 잇새로 빨려 들어갔다가 미끄러지듯 통 튀어나왔다.
“형님, 서두릅시다. 그쪽 기다리게 했다가 일 틀어지면 어떡해요. 우리가 먼저 가서 기다려야지.”
주신도가 별말 없이 인오를 뒤따랐다. 버릇처럼 해림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바짝 끌어안은 채. 손은 피했어도 어깨동무까지 거절하기는 은근히 미안해서, 해림이 피하지 않고 주신도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데스 오어 파라다이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