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곧이라도 비를 뿌릴 듯이 흐린 날씨였다. 먼지인지 안개인지 모를 희뿌연 빛깔이 골목에 자욱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대낮인데도 골목 안은 빛이 잘 들지 않았다.
더 어둑한 골목 깊숙한 곳에서 한 소년이 튀어나왔다. 소년이 목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콘크리트 벽을 짚고 섰다. 허연 입김이 나오는 추운 날씨에도 소년은 반바지에 민소매 차림이었다. 드러난 팔과 다리는 어디 부딪히고 깨진 것처럼 얼룩덜룩하고, 심한 곳은 살갗이 까여 핏방울이 고여 있었다.
소년이 볼 안쪽을 혀로 훑다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멀건 침에 벌건 기가 섞여 바닥에 질퍽하게 들러붙었다. 볼 안쪽뿐만 아니라 입술도 찢어졌는지 입을 벌릴 때마다 면도칼로 긋는 듯이 뜨끔했다.
꼴사납게.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며 반항이라도 할걸. 멍청이처럼 웅크리고서 머리만이라도 보호하려고 팔로 막았다. 욕설과 발길질이 한 여름 장맛비처럼 쏟아지고, 광인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다가 이런 새끼는 복장을 찢어놔야 한다며 부엌으로 식칼을 가지러 가기에 그 틈을 타 뒤꽁무니를 보이며 도망쳤다.
씨발 소리 좀 했기로서니 애비란 인간이 아들을 칼로 후벼 파려고 하다니. 막장이 따로 없었다. 소년은 억울했다. 시작도 그 인간이 먼저이지 않았는가. 저가 쌀 파먹는 쥐새끼도 아니고, 그저 제 눈에 띄는 게 거슬린다고 발로 걷어찼더란다.
냅다 등 보이고 도망친 게 한심하기 짝이 없어도 별달리 수가 없었다. 어른을 상대하기에 소년의 몸은 아직 작았다. 주먹을 견뎌 내는 일조차 버거웠다. 어른이 방심한 틈을 타 집에서 도망쳐 나오는 게 지금 소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자 생존 방식이었다.
코를 타고 주르륵 흐르는 핏물을 손등으로 닦고는 소년이 벽에 등을 기댔다. 내리막길을 쉬지 않고 달린 탓에 다리에서 힘이 빠져 몸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세운 무릎에 팔을 괴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폭력이야 이골이 났지만 그렇다고 고통까지 이골이 나지는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배도 고팠다.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은 위장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허기가 벌레처럼 위장을 갉아 먹었다. 꾸르륵거리는 뱃가죽을 소년이 억세게 움켜쥐었다. 배고프다 한들 지금 당장 먹을거리를 찾아 집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괴물이 호시탐탐 저를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 제 발로 그 소굴에 돌아갈 수는 없음이다.
시간이 지나면 배고픔도 가라앉겠지. 통증도 허기도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소년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타박타박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 소년이 어깨를 움칫하고서 돌아봤다. 혹여 괴물이 쫓아왔을지도 몰라 아픈 다리에 힘을 주고 반쯤 일어섰다.
긴장한 채 고개를 돌렸다. 골목의 끝, 대로변과 이어진 곳에서 빛이 쏟아졌다. 소년이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쳐다봤다. 한 소년이 골목의 끝을 지나가다, 시선을 느낀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단정한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다. 곧은 어깨와 길쭉길쭉한 팔다리가 언젠가 TV에서 봤던 푸르스름한 도포 자락이 잘 어울릴 성싶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까맣고 결 좋은 머리카락도 지나가던 사람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게끔 잘생겼다.
도련님. 아이는 소년을 보고 문득 그런 단어를 떠올렸다.
“뭘 봐.”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소년은 그게 설령 저보다 나이가 많은 이더라도 존대를 쓰지 않았다. 이를 드러내고 시비조로 으르렁거리자 학생이 천천히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둥근 이마와 곧은 콧대, 도톰한 입술에 완만한 턱까지 이어진 곡선이 누가 영혼을 불어넣어 그린 듯이 우아하다.
제 협박에 깨깽 하고 그대로 꺼진 줄 알았거늘. 학생이 다시 골목 쪽으로 돌아왔다. 소년이 험악하게 욕을 해도 무시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귀먹었어? 꺼지라고!”
집에서 항상 듣는 현란한 욕을 뱉어도 학생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소년의 앞에 서서 배낭을 뒤적였다. 혹시라도 저를 후려칠 걸 꺼내나 싶어 소년이 바짝 긴장하며 뒤로 물러났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적의를 밥 먹듯이 받았던 소년이었다. 남이 손에 쥔 물건은 대부분이 저를 해칠 무기였다.
“이거 먹어.”
학생이 가방에서 꺼낸 걸 보고 소년의 목구멍에서 맴돌던 욕설이 안으로 쑥 꺼졌다. 학생이 얼음처럼 굳은 소년의 손을 잡아당겼다. 따뜻한 온기와 보드라운 살결에 소년이 움칫하며 손을 뒤로 빼려고 힘을 줬다.
학생이 피딱지가 따개비처럼 붙은 손을 쥐고 그 위에 빵과 우유를 놓았다. 손가락 길이의 작은 연고와 찌그러진 반창고 상자도 우유와 빵 사이에 끼어 있었다. 비쩍 마른 체구에 비해 손바닥은 학생의 얼굴을 죄다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랬다.
학생이 손을 떼고 볼일이 끝났다는 듯 후련하게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어깨 너머로 휙 지나가는 물체를 보고 걸음을 세웠다. 퍽, 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우유가 땅바닥에 부딪혀 담벼락에도 학생의 바짓단에도 하얗게 튀었다.
“비려, 씨발.”
학생의 뒤통수에 대고서 소년이 외쳤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들었음에도 학생은 뒷머리만 머쓱하니 긁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적선이었다.
앓는 듯 나지막한 숨소리에 처음에는 골목에 다친 짐승이 있는 줄 알았다. 사람일 줄이야. 마침 가방에 엊그제 모친이 챙겨준 약과 반창고, 먹지 않은 빵과 우유가 남아 있어서 소년에게 건넸을 뿐 큰 의미는 없었다. 며칠 후면 까맣게 잊을 아주 작은 해프닝이었다.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학생이 머리 위로 손을 드리우고 이내 보폭을 넓히며 뛰었다. 골목이 점차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