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영화관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재경은 창가를 향해 돌아선 정우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바깥을 보는 거 같은데 꼭 그렇지도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 같은데 또 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재경이 팔꿈치로 정우를 찌르며 제게 신경을 돌렸다.
“무슨 생각해?”
“리얼리티라는 거 되게 좋은 거네.”
“갑자기?”
무표정한 얼굴 때문인지 그의 분위기가 꽤 무거웠었다. 오죽하면 카메라조차도 진지한 정우의 얼굴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랬는데 리얼리티가 좋은 거라고 대답하니 황당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재경과 카메라맨의 반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영화 진짜 오랜만에 봐.”
“얼마 만에 보는데?”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한 3년 전인가? 아니면 4년 전?”
“왜 안 봤어?”
“연습생 출석부 때문에. 보고 싶은 거 있으면 집에서 보거나 했지.”
재경은 정우의 성실한 모습에 더 물어볼 수 없었다. 연습생이라고 전부 원할 때 와서 연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관리가 들어가기에 제 마음대로 빠질 수 없었다. 그것을 관리하는 게 출석부와 일지.
얘가 꿈을 위해서 참 열심히 살았구나, 라고 생각하며 재경이 정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가서 재밌게 보자.”
정우를 위해 재밌는 걸 보여줘야지. 맛있는 팝콘도 사주고. 재경은 그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했다.
* * *
키오스크를 앞에 두고 재경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키오스크를 아예 안 써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도 몇 번 해봐야 익숙해진다고 오랜만에 영화관을 온 재경이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영화관 오랜만에 와?”
“어…… 그런 거 같아.”
보다 못한 정우의 물음에 재경의 고개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연습생일 땐 당연히 영화에 쓸 돈이 없어서 안 왔고 아이돌일 땐 너무 바빠서 못 왔다.
“아!”
재경이 뭔가 생각이 났는지 정우를 돌아보았다가 곧 시무룩해졌다. 정우가 찍어서 대박 난 영화를 보러 갈 때도 매니저가 미리 표를 구해와서 상영관으로 곧장 들어가기만 했다.
“나도 오랜만이야.”
심지어 정우보다 더 모르겠지. 영화관에 들어올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재경이 시무룩해졌다.
“차근차근히 해 보자.”
“그래.”
재경이 살짝 옆으로 물러서서 정우가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 정우가 웃으며 옆으로 들어갔다.
“뭐 볼지부터 정하면 되잖아.”
상영작이 뭐가 있는지 둘러보는 둘의 표정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그리고 몰래 둘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비쳤다. 그들은 재경과 정우가 영화관에 들어온 순간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을 따라 카메라가 따라오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어도 둘의 얼굴이 너무 튀었다.
게다가 이번에 화제성을 제대로 휘어잡은 오디션인 만큼 둘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람들 대부분이 두 사람이 무슨 촬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조용히 훔쳐보고 있었다. 동시에 그들의 손가락은 바쁘게 핸드폰을 두드려 댔지만.
그런 주변의 반응을 모른 채 재경과 정우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멜로 보자고 했잖아.”
“하나가 아닌데…….”
“뭐가 재밌는지 모르지?”
정우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또다시 고민에 빠진 둘은 어떤 걸 고를지 몰라 화면에 손가락만 배회했다. 그러다 재경이 뒤에 줄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정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먼저 하세요.”
정우도 뒤늦게 알아채고는 재경에게 이끌려 한곳에 섰다. 그에 뒤에 서 있던 젊은 여성이 어색하게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익숙하게 키오스크를 터치하다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제 옆에 선 두 남자를 힐끔거렸다.
그들의 시선이 키오스크와 제 손가락에 집중되어 있다는 걸 깨달은 여자가 잠깐 고민하더니 결연하게 결제 취소를 눌러 버렸다.
“제대로 선택했는지 모르겠네, 다시 해야지.”
여자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고 결제 취소의 이유까지 들먹이더니 상영작부터 차근차근 눌러 갔다. 아까보다 두 배는 느려진 속도로 하나씩 터치할 때마다 재경과 정우의 시선이 더욱 집요하게 손을 따라갔다.
마지막 결제까지 슬로우 버전으로 보여준 여자가 그들을 힐끔 보고는 돌아섰다. 처음부터 재경과 정우를 가까이서 보고자 충동적으로 줄을 섰던 자신을 칭찬하며.
여자가 빠진 빈자리로 들어간 재경과 정우는 아까처럼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여자가 선택했던 영화가 유명하지 않을까 싶어 재경과 정우는 단박에 그것으로 했다. 그런데 좌석에서 처음으로 둘의 의견이 갈렸다. 재경은 이왕 화면이 잘 보이는 중앙에 앉고 싶었는데 정우가 가장 끝의 구석진 자리를 누른 것이다.
“가운데 좌석이 잘 보이지 않아? ”
“여기 앉자.”
정우가 좌석을 톡톡 가리키며 하는 말에 재경이 조금 의아한 듯 보다가 곧 카메라의 존재를 떠올렸다. 가운데면 카메라맨이 자리 잡을 곳이 없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영수증 겸용이 된 티켓을 출력한 둘은 야무지게 팝콘과 콜라까지 사 들고 상영관으로 갔다. 가장 가까운 시간대를 골랐기에 오래 기다리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둘이 영화를 고르고 팝콘을 사는 내내 지켜본 사람들은 핸드폰의 배터리가 닳도록 손을 움직여 댔다.
* * *
영화가 시작되는 동시에 상영관의 빛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옆에 있는 사람의 실루엣만 겨우 비칠 정도로 어둑해지자 재경은 조금 안정감 있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충동적으로 영화를 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결정한 건데 그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 일단 오랜만에 영화관에 와서 좋기도 했고, 또 자신이 그동안 티켓 하나 제대로 못 뽑는 애라는 걸 알게 되어서 웃겼다. 자리를 찾아 앉는 것까지 왜 이렇게 재밌는지 몰랐다.
몸을 울려 대는 소리에 콜라를 쥐려던 재경의 손 위로 온기가 감돌았다.
‘음?’
정우도 콜라를 마시려다가 손이 겹쳤나 싶어 그를 보았다. 그런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정우는 재경의 손을 잡은 걸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재경이 정우와 콜라 사이에 있는 제 손을 빼려고 하자 정우의 손가락이 콜라를 쥐는 듯하면서 무심히 손가락을 엮었다가 빠져나갔다.
그제야 정우가 콜라를 잡는 척 제 손을 잡은 걸 알게 된 재경이 카메라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자신들이 제대로 찍힐지 모르겠지만 카메라의 불은 여전히 들어와 있었다.
재경은 아까 손이 겹친 게 찍혔을까 어색해하다가 카메라의 위치가 자신들의 얼굴을 향하는 걸 보고 살짝 안도했다. 그때 왼쪽 팔이 무겁게 정우가 기대어왔다. 그는 할 말이 있다는 듯 재경의 귓가에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그렇게 티 내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
정우의 웃음기가 느껴지는 숨소리에 재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일부러 그랬으면서 날 타박하는 거냐?”
손 하나 잡은 것뿐이지만 여긴 둘만 있는 집이 아니었다. 일은 먼저 쳐놓고 아무것도 안 한 척 굴고 있던 정우가 태연히 대답했다.
“어차피 어두워서 잘 안 보여.”
“그래도 지금 촬영 중이잖아.”
재경은 방금 심장이 크게 뛰었다는 것 자체가 억울했는지 정우에게 항의하듯 속삭였다. 그러나 정우는 오히려 아까보다 더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너, 촬영인데도 평소랑 다름없던데?”
“그거야 당연하지. 리얼한 모습을 찍는 거잖아.”
“그래서 나도 그런 건데.”
정우는 재경의 기가 찬 표정을 보면서도 뻔뻔한 태도를 물리지 않았다.
“우리 매일 손잡고 껴안는 게 리얼이잖아.”
“이정우.”
재경이 음산하게 그를 불렀다. 그러지 말라는 경고였지만 정우는 다정한 미소와 함께 재경의 입에 팝콘을 넣어주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진짜 데이트하는 거 같다.”
실제로 정우는 재경과 함께 나온 순간부터 어딘가 설렌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엇을 하든 다 재밌어하고 평소보다 웃음이 많아졌다. 솔직히 재경도 정우와 이렇게 나온 게 좋은데 그라고 싫을까.
“…말을 말자.”
재경은 정우의 신난 표정에 졌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입에 든 팝콘을 씹고 있으니 캐러멜의 달콤한 내음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아까 오리지널과 캐러멜, 반반으로 시킨 정우의 선택이 제법이었다.
재경이 입안에 든 캐러멜을 다 먹자마자 다시 입술 앞에 팝콘이 나타났다. 정우의 손을 보고 이걸 받아먹어도 되나 고민하던 재경이 슬쩍 입을 벌렸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캐러멜을 씹고 있으니 정우가 아예 재경에게 바짝 다가온 것도 모자라 아예 몸을 반쯤 틀었다.
“맛있지?”
“응. 너도 먹어.”
재경이 정우가 들고 있는 팝콘을 가리켰다.
“오리지널 먹을래? 아니면 캐러멜?”
재경의 손짓에 따라 정우는 아무거나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재경은 자신이 먹은 캐러멜을 살짝 집었다가 카메라를 의식해서 머뭇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서로 먹여주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재경은 저도 모르게 팝콘을 한 주먹 쥐고 말았다. 그대로 정우의 입가에 대니 그가 킥킥거리면서도 다 받아먹겠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덕분에 친구들끼리 장난치는 게 되어버리면서 재경은 정우에게 자기도 먹여달라는 듯 제 입을 가리켰다. 재경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은 정우는 의외로 그의 입에 하나만 넣어 주었다. 재경이 금세 사라진 팝콘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많이 먹지 마. 영화 보고 밥 먹어야지.”
“원래 카페 가려고 했는데?”
“그럼 밥 먹고 카페 가자.”
“아…….”
정우가 뭐가 문제냐는 듯 가볍게 받아쳤다. 그의 솔로몬적 해결 방법에 재경이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되겠다. 그런데 그래도 되나?
“근데 밥 먹고 카페 가는 것도 취미생활이야?”
“알아서 편집해주겠지.”
“…그러겠지?”
머리를 맞대고 뭐를 먹을지 고민하고 있으니 영화는 뒷전이었다. 그래도 카메라를 신경 쓰던 재경도 어느새 다 잊어버린 듯 둘만의 대화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