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밥을 해 먹으라고?’
재경은 미션이라는 게 의외로 평범해서 놀랐다. 정말로 별거 없는 일상을 찍으려는 듯했다. 정말로 대본이 없는 것도 그렇고 자신들에게 어떻게 찍으라고 조언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매니저는 알아서 찾아가라는 말만 하고는 일절 도움이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이 모든 게 그들에게 최고로 자연스러운 모습을 이끌어내기 위한 PD의 안배인 걸 모르고 그냥 신기한 마음이었다.
“재료는 냉장고에 있나요?”
하준의 물음에 카메라맨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소운이 쪼르르 달려가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그러고는 상체를 숙여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터덜터덜 돌아왔다.
“생수랑 이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소운이 냉장고 안에 들어있었다며 하얀 봉투를 가지고 왔다. 하준이 그것을 받아들여 안을 펼쳐 보았다.
“돈인데?”
“아무래도 그걸로 알아서 사 와서 요리하라는 거 같은데요?”
태연이 심각한 눈으로 현금을 보다가 비나인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지금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먼저 따져봐야 할 게 있었다.
“요리할 줄 아시는 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재경은 굳이 따지면 요리라기보단 그냥 자기 먹을 거 조금 만드는 수준이라 가만히 있었다.
“레시피를 보면 되지 않을까?”
건후의 제안에 하준이 그것도 괜찮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장을 보는 팀이랑 요리할 팀을 나누자. 어때?”
어차피 아홉 명 모두가 주방에서 조리를 할 순 없었다. 하준의 주도하에 장 봐 오는 건 하준, 건후, 소운, 태연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명이 주방에 서기로 했다.
그들은 어떤 요리를 할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장을 봐오는 팀을 촬영하러 카메라맨들까지 나가지 아까의 북적거림이 한결 덜었다.
가만히 있다가 얼떨결에 요리 쪽을 맡게 된 재경은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다 정우를 가볍게 건드렸다. 정우가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니 재경이 그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눈짓했다.
일단 주방으로 들어온 재경은 자신을 따라온 정우와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해?”
“뭐가?”
“나 가만히 있어도 되나?”
주방에 카메라가 있어서 재경이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재경은 리얼이라도 크게 나서고 싶지 않았다. 많이 나아졌다 할지라도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었다. 그런 재경의 부담을 읽은 정우가 그의 머리를 토닥였다.
“재경이 넌 옆에서 재료만 씻어 줄래, 그러면?”
“그렇게만 해도 돼?”
물론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정우는 굳이 재경에게 부정적인 대답 대신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재경은 슬쩍 주변을 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하나의 메시지를 보내고는 태연히 주머니에 넣었다. 주방을 나온 재경이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굳은 어깨를 돌렸다.
작은 방은 카메라가 없다는 걸 아까 우연히 들었던 터다. 모든 장소에 카메라를 달면 보다 리얼한 장면을 찍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숨통이 트일만한 공간을 두는 것 역시 PD의 배려였다.
카메라가 있다는 것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몸이 굳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재경이 고개마저 돌리고 있으니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정우가 들어왔다.
정우는 그대로 재경에게 다가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아까 재경이 작은방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보내고는 저 혼자 가 버린 걸 가지고 잘게 몸을 떨며 웃었다.
“왜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하지?”
“그냥 첫 녹화라고 하니까 계속 떨려서.”
재경은 정우의 어깨 부근에 고개를 묻고 깊게 호흡했다. 그나마 정우가 있으니 다행이지 혼자였다면 얼마나 심란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이제 앨범 준비도 시작하면 이렇게 둘만 있을 시간이 더 줄어들겠지?”
지금은 소속사에서 최대한 그들의 컨디션을 위해 배려해 주고 있었다. 오디션의 여파가 얼마나 큰지 밖으로 나가면 재경과 정우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화제성이 계속 1위를 달리는 마당에 재경은 매일 같이 실검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빠르게 앨범을 내겠다고 말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소속사가 꽤 괜찮은 곳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서 재경은 앨범 준비가 시작되면 열심히 할 생각이었다. 그건 정우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니 열심히 하겠다는 것과 별개로 정우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가는 게 아쉽기만 했다. 정우는 그런 재경의 애정이 듬뿍 담긴 말에 기분이 좋은지 그를 꼭 끌어안았다.
“이렇게 틈틈이 안아주면 되지.”
정우가 재경의 머리에 입술을 꾹꾹 누르며 말해왔다. 예전엔 그렇게 까칠하던 아기고양이였는데 연애를 하는 지금은 왜 이렇게 사랑스럽게 바뀌었는지 모른다.
재경은 그런 정우의 웃음소리에 기분이 좋은 듯 따라 웃었다. 아이돌 활동을 시작하면서 둘의 비밀 연애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평화로운 한때였다.
* * *
장을 보는 팀이 돌아오면서 곧바로 요리하는 팀이 움직였다. 다시 소파로 돌아왔던 재경은 느지막히 일어나 뒤따라갔다. 적당히 보조를 맞추면 된다고 생각했다. 방금 정우도 옆에서 재료만 씻어주면 된다고 했고.
재경이 가장 먼저 당근과 호박을 들어 싱크대에 가서 깨끗이 닦아서는 아일랜드 식탁에 올려놨다.
“이거 자르면 되지?”
권태하가 칼을 들고 당근과 호박을 가리켰다. 당근을 잘라보겠다고 칼을 가져다 대는 것도 모자라 칼등에까지 손을 댄 걸 보던 재경이 화들짝 놀라서 손을 뻗었다.
“잠깐.”
덕분에 권태하가 놀라서 고개를 들자 재경이 그의 손을 치워 버렸다. 그제야 상황을 알아챈 정우가 권태하에게 일러 주었다.
“칼이 뒤집어있어.”
“아…….”
권태하도 왜 재경이 다급하게 말리는지 알고 조용히 손을 뗐다. 그 칼은 고스란히 재경의 손에 들어갔다.
“내가 할게.”
재경이 단단한 당근을 힘들이지 않고 썰어댔다. 호박을 썰 땐 통통 도마를 울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양파를 썰 때는 맵지도 않은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칼질이 한두 번이 아닌 솜씨에 멤버들이 다른 것을 해보겠다고 관심을 돌렸다.
“그럼 내가 채소를 프라이팬에 볶을게. 나 이거 본 적 있어.”
한찬형이었다. 그는 일단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잔뜩 달궜다. 그리고는 재경이 씻어서 채에 넣어놨던 채소를 집었다.
“잠깐만.”
재경이 힐끗 그것을 바라보다가 기겁해서 달려왔다. 그러나 한찬형의 반응이 더 빨랐다. 물기가 완전히 빠지지 않은 채소를 프라이팬에 넣은 순간 물과 기름이 만나 유난스러운 소리와 함께 기름이 튀었다.
“으악.”
한찬형이 기겁해서 물러나자 그 자리를 메운 재경이 재빨리 뚜껑으로 닫았다. 여전히 기름이 튀고 있긴 하지만 그 소리가 뚜껑에 한 번 막힌 것만으로도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경은 가만히 기다렸다가 기름 튀는 소리가 줄어들자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채소가 타지 않게 웍질을 했다. 채소가 허공에 솟아올랐다가 도로 프라이팬으로 들어가는 기행에 태연이 소리 없는 박수를 쳤다.
이제 남은 사람도 얼마 없었다. 특히나 처음부터 어떤 요리를 맡을지 정했었기에 헤이스가 제 담당인 고기를 집었다.
“나는 그럼 이렇게 할래.”
라는 말과 함께 헤이스는 고기와 김치를 하나의 냄비에 다 넣었다. 이건 굳이 칼질을 할 필요도 없었고 기름이 튀지도 않았다. 원래 정한 요리에서 조금 변형하긴 했지만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고기 김치찌개.”
미국에서 살던 헤이스가 나름 김치찌개를 생각한 제 아이디어에 씩 웃었다. 그는 왠지 이걸 아직 안 친하지만 요리를 잘 아는 것 같은 재경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재경은 어쩐 일인지 냄비 안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바비큐 양념이 된 고기를…….”
김치와 같이 끓인다고 김치찌개의 맛이 날까. 차마 뒷말을 이어가지 못한 재경이 아예 못 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분명 구워 먹기로 한 걸 왜 갑자기 김치찌개로 바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헤이스가 프라이팬으로 고기를 구울 자신이 없어서 중간에 바꾼 줄 몰랐다.
“나 뭐 잘못했어?”
“이상한 혼종 요리를 만들 거면 그냥 하지 마.”
결국 이런 걸 예상한 정우는 조용히 제 할 일을 했다. 미지근한 물에 감자를 넣고 된장덩어리를 넣었다. 그리고 불을 켰다. 나머지는 불이 알아서 요리해주겠지.
“이정우!”
물의 양 조절 실패와 된장을 풀지 않고 넣은 것, 그리고 감자 말고 다른 걸 넣은 게 없다는 이유로 정우는 재경의 잔소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우도 집에 있는 반찬을 데우기만 하는 입장이라 요리를 못하긴 했다.
“하지 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요리팀으로 배정된 다섯 명 중 네 명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돌아본 재경이 뒤집개를 들고 위협하듯 말했다.
“요알못이면 적당히 샐러드나 쳐서 먹지 무슨 도전정신인데. 요리가 쉬워 보여?”
“요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 요알못.”
태연이 못 알아듣는 헤이스를 위해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요알못의 뜻을 설명해 줬다.
결국 재경은 장 봐온 것 중에서 그나마 익힌 채소를 다져서 오므라이스를 만들었다. 반찬은 김장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 온 볶음김치 하나였다.
아홉 명의 비나인은 전쟁과 같았던 시간을 떠올리며 오므라이스를 보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리 맛을 본 건후가 맛도 괜찮다고 덧붙인 덕에 다들 기대에 차 있었다.
재경은 잔뜩 지친 듯 제 앞의 오므라이스를 힘없이 떠먹었다. 어쨌든 멤버들의 요리 실력을 보았으니 아예 헛된 시간도 아니었다. 가만히 상황을 둘러보던 태연이 한 마디했다.
“이런 게 리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