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121화 (121/125)

121화

“리얼리티라니…….”

재경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게 이 시기에는 리얼리티가 그렇게 활성화된 시기는 아니었다.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그 수가 적었다.

일단 리얼리티라는 상황 자체가 유도되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환경에서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 찍는다는 게 방송을 타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게 다가왔었기 때문이었다.

말 한마디 실수하는 날에는 힘겹게 쌓아 온 이미지가 추락할 수도 있기에 선뜻 그것을 찍겠다고 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인식이 바뀌어 갔다. 이미 알고 있던 틀에 박힌 이미지의 연예인이 색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게 화제가 되면서 비슷한 포맷의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재경이기에 알고 있는 거지,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는 낯선 포맷일 것이었다.

‘그때 비나인은 이런 거 안 했을 텐데……?’

재경은 PD가 어떻게 그것을 생각했는지 궁금하던 찰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막 연예계에 발을 들이는 여러분에게 리얼리티라니 조금 놀랐죠?”

PD는 오디션에서 진행하던 것과 같은 말투로 모두의 관심을 모았다.

“저도 처음부터 이걸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은 리얼리티라는 게 먹히려면 연예계에 오래 몸 담근 사람들이나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꼭 그러지 않아도 되겠더라고요?”

그와 눈이 마주치고 설명을 듣는 내내 재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PD도 몰랐던 걸 이번에 알아낸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정우는 재경과 다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마지막 미션이었던 라이브 방송에서 착안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과 재경의 모습을 찍은 방송이 이후로 조회 수가 상당히 나왔다는 것도 알기에 정우는 왜 PD가 다시금 자신들을 찾아왔는지 알았다.

“저…….”

그때 헤이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리얼리티라면 정말 대본이 없는 겁니까?”

“오디션을 할 때처럼 몇 가지 미션을 주겠지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녹화를 떠서 혹시 문제가 될만한 영상이 있다면 그건 지울 거고요.”

라이브 방송이 아니고 더불어 어떤 실수가 나올지 몰랐다. PD는 그것을 최대한 감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대신 그들 날 것의 모습을 찍기를 요구해왔다.

“앨범 준비하면서 틈틈이 촬영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요. 어차피 인원도 9명이라서 누가 어떻게 나올지도 몰라요.”

거기다 PD의 성격상 인기 많은 멤버에게 방송 시간을 몰아 줄 성격도 아니니 다 적당하게 분배되어 나갈 것이다. 가만히 PD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재경이 정우에게 슬쩍 상체를 기댔다.

“9명이라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네.”

이제 아이돌로 데뷔해서 활동하겠지만 여전히 방송에 많이 나오겠다는 욕심이 없는 재경의 소감이었다. 모두 나눠서 나오면 부담이 줄어들겠다. 그렇지?

재경의 동조를 구하는 속삭임에 정우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재경의 말대로만 되면 좋겠지만 그건 대본이 있는 방송일 것이다.

“그럼 촬영 날 봅시다.”

PD의 환한 미소를 끝으로 짧은 미팅이 끝났다.

*  *  *

촬영 당일, 아홉 명의 멤버는 어느 단독주택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혹시나 안에 누가 있을까 재경이 안으로 들어가며 인사를 건네보았다. 카메라를 든 스태프 몇 명 외에는 멤버가 대부분이었다.

“어서 와요.”

“다 왔어?”

재경이 시계를 보고 아직 20여 분 정도가 남은 걸 확인했다. 그러자 재경을 반겨준 태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하준이 형이랑 건후 형 안 왔어요.”

나머지는 왔다는 말에 재경이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아직 어색한 헤이스, 권태하와 목인사를 건네고 있자니 뒤에 서 있는 정우가 가볍게 등을 밀어왔다.

“앉자.”

“응.”

재경이 엉거주춤 소파에 가서 앉으니 아까보다 더 어색한 분위기가 돌았다. 멤버 전부가 친하지 못한 게 이유였다. 태연이나 하준같이 사교성이 있으면 모를까 자신은 그러질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재경은 제 옆에 앉은 정우에게 꼭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멤버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던 재경이 뒤늦게 뭔가를 알았는지 조용히 후드 모자를 썼다. 아예 끈까지 당겨서 여미고 있으니 그걸 본 정우가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하는 거야?”

“후드티는 이렇게 머리까지 싸매는 게 포인트잖아.”

“형, 그냥 민낯이라 부끄러웠다고 솔직히 말해요.”

태연이 굳이 핑계 댈 거 없다는 듯 정곡을 찔러오자 재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들 촬영이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 쓰고 온 것에 비해 재경은 내추럴한 모습 그대로 왔다. 재경과 함께 나타난 정우 역시 민낯인 건 같았다.

하지만 이건 재경도 할 말이 있었다.

“화장하고 오라는 말이 없었잖아.”

그저 언제까지 오라는 시간과 주소만 받았다. 그래서 지각하지 않을 정도로만 자고 일어난 재경은 눈곱만 떼고 온 게 다였다. 재경이 괜히 정우를 흘겨보았다. 이게 더 이정우 때문이다.

일찍 갈 필요 없다고 일어나겠다는 자신을 부득불 침대에서 못 일어나게 해서는.

“그거야 자유니까요. 그런데 형들은… 뭐, 메이크업할 필요도 없네요. 이제 스무 살이라면서 피부가 보송보송 아기 피부네요.”

태연이 재경과 정우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부스스하게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둘이 제일 눈에 띄니 굳이 화장 안 했냐고 따질 일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계속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

재경은 아직 오지 않은 다른 멤버를 기다리며 의아한 듯 물었다. 아직 숙소를 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각자 집에서 출발하는데 뭐가 이렇게 제각각인지 모르겠다는 듯. 그런 재경이 귀여운지 정우가 후드를 쓴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메라는 돌아가잖아요.”

태연이 집안 곳곳에 달린 카메라를 가리켰다. 오디션에서 많이 경험해서 그런지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태연과 다르게 소운은 카메라가 자신을 따라올 때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래, 그럼.”

재경은 나도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정우의 어깨에 기댔다. 어차피 이대로 다 방송에 내보낼 것도 아니니 적당히 편집할 거라 여겼다.

‘애초에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잖아.’

정우는 그런 재경이 편하게 기댈 수 있게 자세를 고쳐 주고는 핸드폰을 조물거렸다. 둘의 익숙한 듯 자연스러운 모습을 지켜보던 태연이 대뜸 물었다.

“둘이 같이 살아요?”

“…뭐?”

“아니, 저번에 정우 형네서 보던 그런 모습인데? 이상하게 자연스러운데요?”

태연이 재경과 정우를 번갈아 가리키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게 재경은 이제 정우를 피하지 않을뿐더러 스킨십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잘 기대기도 하고 또 등에 반쯤 업혀 있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그러면 말을 안 하겠는데 그 대상이 꼭 정우 한정이었다.

정우 역시 재경만 받아주고 있다 보니니 자기들처럼 스케줄이 있을 때만 만나는 사이 같지가 않았다.

재경은 눈동자만 돌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정우네 집에 얹혀 있어.”

“역시 그렇구나.”

태연이 놀라지도 않는 듯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재경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괜히 뒷말을 붙였다.

“숙소 들어가기 전까지만 신세지는 거야.”

“거기서 같이 사나 미리 같이 사나 똑같다 이거죠?”

“완전 똑같은 건 아니지만 비슷할걸?”

재경은 제 머리가 간지러운지 긁적이며 대답했다. 정작 손가락에 걸리는 건 머리카락이 아닌 후드였지만. 태연의 물음에 재경은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떠올렸다.

아침에 느지막하게 일어나면 재경이 아침밥을 차렸다. 정우의 냉장고에 쌓인 완전식품을 데워서 내올 때도 있었고 아니면 제가 먹고 싶은 걸 만들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하고 나면 정우가 설거지를 하고 난 후 따뜻한 차를 가져왔다.

언제쯤 아메리카노에 적응할 수 있을까, 같은 대화를 하며 차를 마시고는 낮잠을 잤다. 그리고 일어나면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을 다녀오거나 책을 읽는 등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가끔 눈이 맞으면 키스도 하고…….’

성인이 됐으니 서로의 몸을 조금씩 탐하기도 하고.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라게 살고 있는데 아마 숙소에 들어가면 많은 게 달라지겠지. 그래서 재경은 정우와 둘이 보내는 시간이 며칠 안 남았다는 생각에 더욱 뭔가를 하지 않았다.

“그럼 나도 정우 형네 갈래요.”

“안 돼.”

정우가 단호하게 태연을 밀어냈다.

“왜!”

“둘이 살기에도 좁아.”

“좁아? 그 집이 좁아요?”

태연이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치는데도 정우는 눈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누군가 하나라도 들어오는 순간 재경과 나누던 모든 스킨십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정우는 태연을 가차없이 밀어냈다.

“진짜 치사해.”

태연이 삐진 듯 입술을 삐죽여도 정우는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을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사소한 대화가 전부 카메라에 찍히고 있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그때 하준과 건후가 들어오면서 비나인 모두가 왔다. 태연은 곧장 건후에게 매달려 방금 서운한 일이 있다며 재잘거렸고 소운이 하준을 보자마자 슬그머니 옆으로 왔다. 그리고 재경은 이제 슬슬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될 거라 여기며 정우에게 기댔던 몸을 뗐다.

“이거 받으세요.”

마침 카메라맨이 비나인의 리더 하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마 전부 모이면 주라는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미션?”

하준이 두꺼운 종이 위에 적힌 단어를 읽더니 그것을 받아들고 왔다.

“뭐래요?”

다들 하준이 미션이라고 말한 순간부터 궁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준이 그들을 대표해서 미션지를 뒤집어 읽어보았다. 생각보다 간단한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 단숨에 읽어버린 하준은 미션지를 팔락거렸다.

“밥 해 먹으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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