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오디션이 끝나고 모두가 웅성거리는 틈을 타 재경은 정우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자신이 오디션에서 1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고 또 정우와 함께 데뷔한다는 건 더 믿어지지 않았다.
점점 소음이 멀어지면서 정우와 제 발걸음밖에 들리지 않았다. 정우가 걸음을 멈추자 재경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소품실이었다.
재경이 다시 정우를 보니 그의 넓은 등이 눈에 들어왔다. 정우가 트윌리까지 끌어내고 소매를 걷어 올리는 걸 보고 있으니 그의 목덜미에 맺힌 땀이 보였다. 단순히 여기까지 걸어오는 순간이 덥냐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오디션장에서야 뜨거운 조명을 받긴 했지만 그곳을 나온 순간 겨울의 찬기가 은은하게 머물러 있었다. 재경 역시도 지금 외투를 입지 않아 약간 쌀쌀하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그런데 정우는 오히려 한여름이라도 되는 듯 땀이 맺혀 있어서 신기했다.
곧 그게 더워서라기보단 다른 이유 때문임을 알았다. 그는 계속 재경을 달래 주고 부축해 주고 축하해 주었지만, 나중에는 그도 긴장하고 있었음을 드러냈었다.
재경은 가만히 정우를 보다가 그에게 다가가 등을 안았다. 제 손길에 등이 굳은 걸 느끼며 재경이 웃으며 턱을 기댔다.
“축하한다.”
아까는 우느라 정우에게 축하한단 말도 못 했다. 누구보다 그가 합격한 게 기뻤으면서 말이다. 재경의 인사에 정우가 천천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하아.”
정우는 아예 재경을 마주 안은 그대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제 목 근처를 간지럽히는 숨결에 재경이 몸을 잘게 떨며 웃었다. 정우는 재경에게 그만 웃으라는 듯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면서도 잔뜩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같은 날이 또 있진 않겠지?”
“글쎄.”
재경은 미적지근한 대답으로 흘려넘겼다. 앞으로도 이런 순간은 얼마든지 있을 거 같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런 날이 오면 이렇게 안아 주자.”
서로의 심장이 맞닿아 조금씩 안정될 수 있도록.
재경이 좋은 생각이니 않냐는 듯 정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도 이렇게 안으면 좋아할 거니까 딱히 거절할 거 같진 않았다.
그런데 정우의 대답이 의외로 빨리 나오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 재경이 상체를 뒤로 빼 정우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뭐야, 왜 웃어.”
재경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혼자 환하게 웃고 있는 정우를 보고 물었다. 그러자 정우는 다시 재경을 꼭 끌어안고 그의 머리에 얼굴을 비볐다.
“사귀자.”
“그게 대답이야?”
“서로 안아 주고 위로해 주고 다독여 주자.”
“그건 그냥 친구 사이로도 할 수 있을 텐데.”
재경이 장난기가 솟아 일부러 말을 돌렸다. 그러니 정우의 웃음이 머리카락과 귀를 간지럽혔다.
“다음엔 나 안아 주지 말고 키스로 다독여 줘라.”
“…그러려면 확실히 사귀어야겠네.”
재경이 짐짓 심각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오디션이 끝나고 정우와 어떻게 사이가 변할까 싶었던 생각은 솔직히 많이 했었다. 그런데 오늘 하루 많은 일을 겪고 나니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옆에 정우가 있으면 안정될 수 있었고, 그가 조금만 위험해 보여도 다쳤을까 봐 걱정이 되어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그런 상대가 앞에 있는데 이젠 이것저것 따지고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재경은 정우에게 푹 기대며 속삭였다.
“좋아해.”
제 고백을 들은 정우가 멈칫하더니 재경의 턱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정우는 아까도 들었으면서 제 고백을 처음 들은 것처럼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 안 참아도 되는 거지?”
뭘 참는 거냐고 물어보려던 재경은 제 입술을 덮어오는 따뜻하고도 말캉한 감촉에 서서히 눈을 감았다. 맞닿은 입술의 부드러움에 재경은 고개를 기울여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응.”
재경이 입술을 붙인 그대로 미소 지었다.
* * *
데뷔조에 든 아홉 명이 모였다. 이제는 B-NINE으로 활동하게 될 한 팀이었다. 재경이 턱을 괸 채로 한명씩 돌아보았다. 윤하준, 권태하, 헤이스, 민태연, 이소운, 한찬형, 박건후 마지막으로 이정우. 저들 중 JT를 제외하고 원래의 멤버가 몇 명인지도 몰랐다. 재경이 그때 자세히 봤더라면 알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잘 모른 채 회귀했다.
‘아, 한 명 더 있었지.’
양채준.
몇 번째였더라, 이정우에게 잡혀서 한 팀이 양채준이라는 연습생을 만났다. 어딘가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긴 했지만 바로 떠오르지 않았었는데 곧 그에 대해 떠올랐다.
한번 같이 팀을 하면서 양채준이라는 연습생이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양채준과의 일이 기억나면서 그가 비나인의 멤버였던 게 생각났다.
뭐라고 했었더라. 오디션에 붙을 수 있었던 비결이 형들에게 붙어서 카메라에 비치는 거라고 했었나?
이번에도 그렇게 해서 이미지를 만들어 들어오려고 했지만 잘 안 된 듯했다. 전부 양채준의 그 얌체 같은 행동을 받아주지 않았다. 덕분에 일찍이 떨어졌는데 재경이 그의 빈자리로 들어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동안 잘 쉬었어?”
마지막 생방송을 끝으로 딱 일주일만에 모였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쉬는 시간으로 삼고 제작진은 제작진대로 일이 바쁜 시간이었다.
“재경이 넌 그동안 뭐 했어?”
“그냥… 자고 먹고 쉬었어요.”
정우의 집에서.
재경은 적당한 말로 넘어갔다. 정우의 집에서 정우와 함께라는 걸 빼면 특별할 게 없는 시간이었다. 딱 일주일 동안만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지냈다.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는 강박도 벗어던지고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재경의 무난한 대답에 더 질문할 게 없는지 하준이 다음 사람을 골랐다.
“소운이는?”
제게 시선이 집중되자 소운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저는 부모님이랑 시간을 보내고 또 친구들도 만났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얼굴을 붉힐까?”
“친구들이 다 저를 신기하게 봐 가지고……. 아, 형들 사인받고 싶대요.”
소운이가 옆에 둔 가방에서 연습장과 펜을 꺼내는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진짜 귀엽다.”
“형, 나는?”
소운보다 한 살 어린 태연이 하준에게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도 귀엽지. 그러니까 소운이는 토끼 같다면 너는 여우같이 귀여워.”
“인정.”
옆에서 듣고 있던 건후가 소중한 한 표를 던졌다.
“뭐야, 나도 토끼하고 싶은데 내가 왜 여운데? 응? 왜 여우야?”
“그냥 널 보면 다 그렇게 생각할걸?”
늘 그렇듯 태연과 건후가 툭탁거리는 것을 다들 편안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오디션이 끝나서인지 모두가 별거 아닌 이야기에 즐거워하고 긴장이 많이 누그러졌다. 그건 재경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오디션이 끝났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제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고 계약서를 전달받으면서 매니저라는 남자와 인사를 하면서 와닿았다.
각 소속사가 다른 관계로 아예 소속사별 인원을 한 명씩 뽑아와 새로운 기획사를 만들었다고 했다. 거기서 매니저부터 다 체계적으로 관리해주기로 했고 비나인의 계약이 끝나면 해산하게 되어있었다. 물론 이 기획사가 지금 비나인을 잘 케어해서 또 다른 오디션으로 탄생한 아이돌을 맡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매니저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입니다.”
문을 열고 나타난 남자를 본 모두가 반가움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온 이는 최원후, 최PD였다. 그리고 메인 작가였던 김 작가까지 나타나 최PD의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PD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하준의 물음에 최PD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앞으로 있을 스케줄 때문에?”
“PD님이랑 해요?”
“아니 나는 오디션도 성공적으로 끝나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가만히 놔주질 않네요. 이번에도 굳이 프로 하나 만들어 달라고 얼마나 간절히 부탁하던지…….”
“PD님이 갑자기 찍고 싶은 게 생각났다면서 찾아갔잖아요.”
한껏 잘난 척을 해대던 PD가 중간에 끼어든 김 작가의 훼방이 멋쩍은 듯 말을 돌렸다.
“아니, 나랑 프로그램 하나 하면 좋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PD님이 이거 잘 될 거라고 강조하니까 한 말이죠.”
김 작가가 고개를 내저으며 비나인 멤버들에게 정확한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PD님이 같이 하나 하고 싶으시대. 그래서 곧바로 기획사 찾아가서 첫 번째 스케줄은 무조건 자기 거라고 얼마나 고집을 부렸는지… 결론은 이렇게 쟁취하셨고.”
김 작가가 두 손으로 PD를 받쳐주자 그가 허리에 팔을 얹고 코를 세웠다. 아마 기획사에 물고 늘어졌다고 하지만 실제로 기획사에서는 흔쾌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비나인을 만든 게 최PD였으니까. 그것도 잡음 하나 없이 만든 덕분에 지금 비나인의 이미지가 상당히 좋았다.
“그래서 우리 뭐 찍는데요?”
“그렇지, 그게 중요하지. 이거는 뭐, 우리가 생각한 아이디어는 아니고…….”
최PD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다들 기대한 표정을 보고 싶은지 일부러 말을 끌었다. 그러다 적당한 시기에 선물을 내미는 것처럼 말했다.
“너희 데뷔 리얼리티 찍어야지.”
최PD가 제 프로로 탄생한 샛별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