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118화 (118/125)

118화

재경이 전광판에 뜬 제 이름을 보았다. 정말로 1등 옆에 제 이름이 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저 자리에는 정우의 이름이 있었어야 했다. 거기다 제가 가져간 투표 때문인지 정우는 8위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했다. 이건 분명 잘못되었다.

“서재경, 축하해.”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재경의 귓가로 정우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감싸왔다. 정말로 재경의 1등을 축하하는 목소리였다.

“아니, 나는… 정말… 이럴 리가 없는데…….”

재경이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고 계속 의문을 표했다. 더욱이 얼떨떨하게 구는 재경의 주위로 연습생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한마디씩 축하 인사를 하는데 재경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어서 최종 발표였다면 커트라인 안으로 들어오는 9위죠. 9위를 발표함과 동시에 그 밑의 순위권은 한 번에 공개됩니다. 9위는… 서정후 연습생입니다.”

재경의 눈동자에 경악이 서렸다. 자신이 1등이 되면서 정말로 정우가 순위권 안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그때 오디션도 이랬나? 그리고 마지막에 정우가 1등으로 올라간 거야?’

점점 머릿속이 온갖 생각으로 엉켜가는 그때 MC가 재경의 앞으로 와 핸드마이크를 내밀었다. 이미 재경도 마이크를 차고 있지만, 정식 소감을 물어보려는 모양이었다.

“서재경 연습생, 1차 평가지만 1위를 한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재경은 멍한 얼굴로 MC가 내미는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멀쩡히 손에 받아들고도 바로 소감을 말하기보다는 그것을 쥐고 머뭇거렸다.

“지금 제가 생각지 못한 일의 연속이라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재경이 더듬거리며 말하다가도 결국 뒤를 잇지 못했다. 그러다 다시 뒤를 돌아 정우의 등수를 확인했다.

‘18위.’

자신이 받아 간 만큼 정우가 받지 못했기에 둘의 등수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재경이 전광판을 보던 고개를 돌려 정우를 보았다. 자기 때문에 정우의 데뷔가 물 건너갈 수도 있는 거였다.

“어떡해.”

재경이 미안한 마음에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차오르는 눈물에 가려 정우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정우야 어떡해.”

재경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정우를 보고 발을 굴렀다. 자기 때문에, 괜히 이 오디션에 들어와서 정우의 앞길을 막아버리게 생겼다.

“미치겠다, 진짜.”

그런 재경의 마음이 느껴지는지 정우가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지금 웃음이 나와? 나 때문에…….”

정우에게 점수가 다 갈 거라고 생각했기에 마음 편하게 그를 선택했는데. 재경이 마이크를 품에 쥔 채 고개를 숙이자 정우가 더욱 그를 제 품 깊이 끌어안았다.

“아직 중간평가니까요. 그럼 곧바로 2차 점수와 합산되는 결과 발표를 하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사이에 있었던 축하 무대는 생략합니다.”

MC는 재경에게 넘긴 핸드 마이크를 가져오는 대신 스태프에게 새로 받아들였다. 지금 재경이 울고 그것을 정우가 달래주고 있느라 가서 마이크를 가져올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호명되는 연습생은 정말로 데뷔조에 속하게 됩니다. 데뷔조에 들어간 연습생은 저기 합격석으로 가면 됩니다. 그럼 아까와 마찬가지로 8위부터 발표하겠습니다.”

MC의 진행에 따라 방청석은 숨죽였고 연습생들은 저마다 긴장한 얼굴로 기다렸다. 그 사이에서 아직도 정우의 품에 안겨있는 재경만이 최종 발표에 대한 진행을 듣지 못했다.

“재경아.”

정우의 나직한 부름에 재경이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아직 안 끝났어. 그러니까 기다려. 같이 갈거야.”

정우의 달래는 말에 재경은 입술을 꼭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자신 때문에 정우가 떨어지지 않았으면…….

“1차에서 8위는 한찬형 연습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최종 8위에 올라간 연습생은 과연…….”

MC는 일부러 바로 발표하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PD는 이 순간 그 어떤 배경음도 깔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의 숨죽이는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이 더욱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축하합니다. 박건후 연습생.”

8위가 바뀌었다. 한찬형이 아닌 다른 이름이 불리면서 12위에 있던 건후가 데뷔조에 속하게 되었다. 건후가 얼떨떨한 얼굴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는 아까 높은 순위로 태연이 불리면서 자신은 탈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데뷔조에 들어간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 정말 많이 놀랐는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건후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지 감사하다는 말만 하고는 마이크를 MC에게 넘겼다. 그리고 가장 처음 합격석으로 가면서 다른 연습생들의 축하를 받았다.

“아, 다행이다.”

내심 마음을 졸이고 있던 태연까지 기쁜 듯 건후의 합격을 축하해주었다. 건후는 태연이 내민 손을 잡고는 미련스럽게 놓지 못하다가 더는 붙잡지 못할 때 놓고 합격석으로 갔다.

“지금 순위변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얼마나 순위가 뒤바뀔지 모릅니다. 긴장해주세요.”

MC의 말에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2차 투표가 최종적으로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7위 발표합니다. 축하합니다. 한찬형 연습생.”

아까 8위에서 한 계단 올라간 한찬형이 허리를 숙이며 호흡을 골랐다. 그는 조금 더 숨을 쉬다가 천천히 허리를 펴며 핸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감사합니다. 실은 아까 이름이 불리지 않아서 저는 떨어진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데뷔조에 들어가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하아, 아직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요.”

한찬형이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뒤로 커다란 화면에는 한찬형의 합격에 눈물을 흘리는 부모님의 얼굴이 비쳤다.

한찬형이 합격석으로 가고 MC가 곧바로 발표를 이어갔다.

“이제 1차 투표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는 거겠죠. 6위 발표합니다. 참고로 6위 역시 아까 1차에서 9위 안에 들어오지 못한 연습생이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이소운 연습생.”

MC의 호명과 함께 하준이 제 옆에 있는 소운을 와락 끌어안았다. 자신 때문에 점수가 낮았던 소운이 데뷔하게 되면서 그가 더 기뻐했다.

하준의 품에 안긴 소운은 눈만 빼꼼히 내민 채 주변을 돌아보다가 눈이 휘어지도록 웃었다. 소운은 하준에게 먼저 가 있겠다고 말하며 짧은 감상평을 하고 합격자석으로 갔다.

“5위 발표합니다. 5위는… 민태연 연습생입니다.”

“우와!”

태연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합격자석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크게 울려 퍼졌다. 건후가 기쁨의 환호를 한 것이다. 그 때문에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태연은 김이 샜다는 듯 피식 웃더니 쪼르르 합격자석으로 가 버렸다.

“네, 정말 기쁜가 봅니다. 소감도 까먹고 가네요.”

MC의 말에 태연이 뒤늦게 무대에 시선을 주었지만, 이미 그는 건후의 품에 안긴 채였다. 아무래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남은 연습생들은 합격한 연습생들에게 축하를 해 주며 더욱 분위기를 띄워주었다.

이후 4위와 3위에 헤이스와 권태하의 이름이 올라가며 남은 합격자석은 3자리밖에 남지 않았다.

재경은 건후와 소운을 보면서 어떻게든 순위가 바뀌길 바랐다. 물론 9위를 한 연습생이 떨어졌으면 하는 게 아니었다.

‘나 대신 정우가…….’

1차 결과를 보란 듯이 뒤집으며 정우가 올라왔으면 싶었다. 이젠 내기 따위도 아무 상관없었다. 자기 대신 정우가 올라갈 수 있다면 그냥 그러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사귈 수 있었다.

“2위를 발표합니다. 1위를 하지 못해 아쉬울지 아니면 2위라는 높은 순위를 받아서 기뻐할지 궁금합니다. 윤하준 연습생입니다.”

MC의 발표와 함께 방청석에서 기쁨의 환호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두근거리며 지켜보던 방청객들도 이번만큼은 예상한 인물이 나오자 순수하게 기뻐하고 응원했다.

“윤하준, 그럴 줄 알았어.”

“축하해.”

그들의 외침이 울려 하준에게 닿았다. 하준은 긴장했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들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던 하준이 제 가족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준의 홀가분한 얼굴이 전광판에 비치며 그의 가족들도 차례로 나왔다. 서로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속에는 그동안 믿고 의지해온 가족의 응원이 느껴졌다.

하준마저 합격석으로 가고 나자 재경은 마른침을 삼켜댔다. 이제 1위가 남았다. 그 1위에 정우의 이름이 불리길 바라며 재경은 잠시 눈을 감았다.

‘제발 정우의 이름이 불리기를.’

자신은 여기서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온 게 아니었으니까. 정우의 기회를 빼앗기지 않았으면 했다. 재경이 아까보다 살짝 옆으로 이동해 정우의 손을 잡았다. 눈을 감은 터라 얼마나 움직였는지 모르겠지만 정우의 손을 잡았으니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1위를 발표하겠습니다. 1차에서 1위가 서재경 연습생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서재경 연습생이 될지 아니면 다른 연습생이 올라올지…….”

MC는 그 어느 때보다 길게 시간을 끌었다. 몇 개월을 끌어온 오디션이었다. 처음부터 화제성을 잡은 것은 물론 나중엔 시청률까지 가져가며 전국에 오디션 붐을 일으켰다. 아마 오늘로 이 오디션이 끝나면 어딘가에서 이 오디션을 따라 한 또 다른 오디션이 나올 것이다.

그런 오디션의 1등이다. 가볍게 발표하기엔 1등이 가지는 무게가 전혀 가볍지 않았다.

MC는 최대한 시간을 끌고 나서야 마이크를 들었다.

“발표하겠습니다. 1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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