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전상국을 데리고 나갔던 스태프가 심각한 얼굴로 돌아왔다. 허락 없이 대기실에 들어온 것은 물론 남을 해칠 용도로 흉기까지 들고 있었다. 그래서 무작정 데리고 나갔는데 전상국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제정신을 차린 전상국이 다른 사람 들으라는 듯 고래고래 비명을 내지르는 통에 소란이 일어난 것이다.
“금방 깨어났네.”
밖에서 들린 소음과 스태프가 와서 상황을 알려주자 정우가 꺼낸 감상이었다. 사정 봐주지 말 걸 그랬나, 중얼거리고 있어 왜 그러냐 쳐다보니 고개를 저었다.
“꽤 오래 기절할 줄 알았는데. 아니면 힘없이 있거나…….”
정우의 말에 재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딱 한 번 부딪혔는데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제대로 공격이 들어간 거다. 그러려면 급소를 맞은 거겠지. 그러다 깨어나서는 끌려가고 있으니 온갖 난리를 부린 거고.
재경은 아까 정우의 다리 하나가 올라간 이유를 알아챘다. 같은 남자로 전상국의 고통에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잠깐이었다. 전상국보다는 정우가 다치지 않은 게 우선이었다.
“이제 돌아가자.”
다른 팀의 무대가 끝난 듯 스태프의 분주한 움직임을 본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우와 함께 생방송 제 자리로 가려던 찰나,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잠깐만…….”
재경이 정우의 팔을 잡고 말리는 사이 여자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재경은 역시나 그녀가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정우를 잡던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여자를 향해 돌아섰다.
“재경아… 재경, 재경!”
주변을 돌아보면서 다급한 듯 움직이던 여자는 재경을 발견하자마자 급제동에 걸린 듯 멈췄다.
“…엄마.”
재경이 얼떨떨한 눈으로 제 엄마를 바라보았다. 아까 분명 방청석에 앉아 있었는데…….
“너 괜찮은 거야?”
정하연이 기겁해서 재경의 팔을 끌어안듯 붙잡고 그를 샅샅이 훑어내렸다. 재경이 어디 다쳤을까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재경은 어떻게 엄마가 자신을 찾아왔을까, 그리고 왜 이러는지 싶어 잠깐 생각했다.
“엄마. 왜 그러는데…….”
“걔, 걔가 왔다며. 그래서 네가 있는 곳에 갔었다며… 너 괜찮은 거야? 걔가 너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니지?”
엄마의 두서없는 말에 재경은 어떻게 반응할 수가 없었다. 재경은 엄마에게 전상국과 제 사이를 깊게 알려준 적이 없었다.
“대체 왜 그래.”
답답한 마음에 재경이 고개를 들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김 작가가 팔을 흔들었다. 엄마를 의식한 건지 소리 없이 입술만 벙긋거리던 그녀가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두 손을 모았다. 분위기로 봐서는 방금 전상국이 벌인 짓을 엄마에게 말한 듯했다.
“내가 그만 가겠다고 작가님을 찾아갔다가… 우연히 들었어. 작가님 잘못 아니야.”
정하연이 혹시나 작가에게 피해가 갈까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녀는 재경의 무대를 봤으니 이제 미련 없다는 듯 일어났었다. 그리고 가기 전에 작가님이 자신을 찾을까 봐 왔다가 그녀가 재경을 언급하는 걸 들었다고 말했다.
“난 괜찮아.”
재경이 아까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엄마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 같았다. 재경이 가만히 지켜보는 사이 정우가 그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재경이 돌아보자 정우가 먼저 올라가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재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가 김 작가에게 작게 귓속말하더니 둘이 먼저 사라졌다.
“엄마…….”
재경의 부름에 정하연이 고개를 숙인 채로 멀어졌다. 그녀는 몇 번 입을 열었다가 제 울먹이는 소리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어색해진 상황에서 재경은 왜 이렇게 된거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미안해.”
“엄마가 왜 미안해.”
오늘 엄마는 제게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새로운 곳과 계약했다며 사람을 데려오지도 않았고 그녀의 앨범을 내겠단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 엄마를 볼 때만 해도 어떻게든 카메라나 제작진의 눈에 들어보려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재경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하연은 주저하면서도 제 마음을 고백했다.
“나는… 늘 네가 혼자서도 잘하니까, 그래서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엄마의 더듬더듬 내뱉는 말에 재경이 놀라서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너는 내가 보살펴 주지 않아도 씩씩하게 잘 컸으니까. 또, 내가 가끔 가도 늘 괜찮다는 듯 날 반겨 줘서… 그래서 모른척했어.”
그녀는 재경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전부 변명이야. 그 어린애가 혼자서 얼마나 잘 버틸 수 있다고 내 꿈에만 눈이 멀어서…….”
정하연이 자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씁쓸하고 또 어딘가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내가 너한테 의지하고 있었나 봐.”
정하연은 아까 재경이 무대에서 춤을 추는 내내 울었다. 지금껏 제가 재경을 평범한 아이로 키우지 못했던 미안함, 재경을 연습생으로 무작정 밀어 넣었던 자책, 사기꾼을 알아보지 못하고 순진하게 굴었던 제 미련함에 눈물이 나왔다.
그러다 누군가가 흉기를 들고 재경을 찾아갔다는 말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혹시나 그 흉기에 재경이 다쳤을까 봐 정하연은 김 작가를 붙잡고 끈질기게 사정을 물어봤다.
“네가 다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참… 왜 이제야 네가 고작 열아홉 살이라는 게 떠오른 건지. 내가 엄마 자격이 없어.”
정하연이 재경의 팔을 닿을 듯 말 듯하게 만지다 한 걸음 물러났다.
“왜… 그런 말을 왜 이제야 하는 거야.”
재경이 부들 떨리는 입술을 열어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엄마 안 그러잖아. 원래 안 그런 사람이잖아.”
“맞아. 내가 참 이기적이었어.”
재경은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보았다. 지금껏 안 그랬는데. 자신이 아이돌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도 엔터 대표에게 가서 빌라고 하던 사람이 엄마였다.
엄마를 보살피느라 자신이 쓰러졌는데도 ‘그게 왜 내 탓이냐’고 하던 사람이 엄마였는데…….
엄마가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재경의 마음속에 눌러 왔던 서운함이 폭발했다.
“안 그랬잖아. 엄마는 내가 가수가 되는 것만 생각했잖아. 그래서 내가 가수가 되기 싫다고 했을 때도 안 하겠다고 할 때도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았으면서…….”
재경의 말속에 회귀하기 전과 지금이 뒤섞여 엉망으로 흘러나왔다.
“그런데 왜 지금에서야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재경은 누구보다 엄마에게 가장 실망했었다. 제가 아이돌로 온갖 루머에 휩싸일 때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준 적 없던 게 엄마였다.
“늦게 깨달아서 미안해. 재경아.”
“뭐가 늦게 깨달은 거야. 그걸 알았어도 그냥 평생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안 되지. 엄마는 그럴 자격이 없는데…….”
재경이 흥분해서 점점 언성을 높여갔다. 하지만 재경이 흥분한 데 반해 정하연은 차분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자격 없는 거 알아. 그래도… 평생 사죄하면서 살게. 재경아.”
재경의 원망에도 엄마는 전부 제가 끌어안겠다는 듯 두 눈을 꼭 감았다. 전부 그녀가 쌓아온 잘못이었다.
재경은 엄마의 얼굴에 비친 진심을 보고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엄마가 지금 제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게 느껴진다는 게 속상했다.
“그냥 계속 뻔뻔하게 굴지 그랬어.”
재경은 속 깊이 끌어올리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랬다면 이렇게 마음이 복잡하지도 않을 텐데.
재경은 메말라버린 눈물의 흔적을 닦아냈다. 엄마의 사과에 조금 마음이 풀린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사랑을 고팠던 어린 날의 자신이 불쌍해서 재경은 온전히 엄마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 용서해주진 않을 거야.”
“응, 그래. 엄마 용서하지 마.”
엄마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재경이 무슨 말을 하든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설령 당분간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해도 그녀는 괜찮다고 말 할 수 있었다.
그런 마음이 통했을까, 재경의 흥분했던 기색이 조금씩 가라앉아갔다. 서로의 숨소리만 들려오며 주위의 소음이 멀어질 때쯤 재경이 말했다.
“내가 스무 살이 되면…….”
재경의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따로 살자.”
재경의 말에 정하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당분간 멀어져도 다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녀가 당황한 듯 굴었다.
“재경아, 잠깐만.”
“이게 맞아.”
이게 재경이 엄마와 평화롭게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당장 그녀와 부대끼면서 그동안 쌓아온 감정을 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엄마에게 사과를 받았으니 이제 더는 바라는 것도 없었다.
“나중에… 나중에 연락할게.”
“재경아…….”
“나 지금껏 외롭고 힘들게 컸잖아. 이제 온전히 나를 위해 살고 싶어. 그래도 되는 거잖아. 그렇지?”
정하연은 재경과 아예 안 보고 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재경을 설득해 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문이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재경의 모든 걸 내려둔 듯한 홀가분한 표정에 정하연은 언제 재회할지 모를 이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걸 알았다.
“연락… 기다릴게.”
재경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멀어지는 걸 보던 재경이 모든 감정을 털어내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게 하나씩 마무리되는 기분이었다.
어딘가 홀가분하면서도 텅 빈 느낌이라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문득 정우가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