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저기에 우리 가족들이 앉을거래요.”
소운의 설명을 들으며 재경이 이제 막 차기 시작하는 자리를 보았다. 방청객보다 먼저 들이는지 유독 그 쪽만 시끄럽다 했더니 부모님을 먼저 안내하다 보다.
“와, 우리 부모님이다.”
소운은 달려가서 인사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느라 재경의 팔을 매달리다시피 했다. 지금 무대 뒤에서 부모님들이 오는 걸 몰래 보고 있어서 나갈 수 없는 게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당장 부모님을 보는 건 무대에 올라갈 준비를 다 끝낸 지금 스포와 다름없기에 연습생 모두가 꾹 참고 있었다.
재경은 소운의 호들갑을 뒤로 한 채 찬찬히 부모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직 전부 들어온 건 아니지만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재경은 미약한 한숨을 내쉬며 불안함을 감춰보려 입술을 잘근 물었다.
부모님을 부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재경은 엄마가 오지 않길 바랬다. 다른 부모처럼 제 아이를 응원한다면 그럴 거라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재경도 그녀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 재경의 엄마라고 하면서 동시에 예전에 가수였던 걸 밝히겠지. 그리고는 방송에 나갈 수 있게 하든 아니면 PD인맥이라도 잡아보려고 하든 할 게 뻔한데 어떻게 오기를 바랄까.
“형 부모님은 안 와요?”
마침 소운이 물어보는 말에 재경은 잘게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사기꾼 때문에 경찰서도 갔는데 그때를 생각해서 오늘 안 왔으면 했다.
“어?”
엄마 대신 다른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재경이 놀란 목소리를 흘렸다. 재경의 반응에 호기심이 동한 소운도 고개를 돌려 누가 왔는지 확인했다.
“JT 대표님이잖아!”
소운이 놀라서 소리 지르려는 걸 제가 가까스로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런 소운의 반응을 알아챈 재경이 아, 하며 뒤늦게 남자의 또다른 신분을 알았다. 경찰서에서 봤던 정우의 아버지라서 그랬던 건데 거대 엔터의 대표니 소운처럼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관계자석도 아니고 부모들이 모여 있는 곳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으니 낯설게 다가왔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재경이 기억을 되짚어보지만 워낙 대표와의 접점이 많지 않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쨌든 가장 최근은 정우의 아버지로 만난 기억이 컸고 말이다.
“네 아버지 오셨어.”
재경이 지금껏 말없이 서 있던 정우의 옆구리를 쳤다. 그에 소운에게 억지로 끌려나와 귀찮아했던 정우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옆으로 움직였다. 제 아버지를 보고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정우는 오히려 대기실로 돌아가려는 듯 재경의 팔을 잡았다.
“이제 들어가서 쉬자. 얼마 안 남았어.”
재경은 정우에게 잡힌 제 팔을 내려다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기다렸지만 제 엄마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거로 봐서 안 올 거 같으니 이제 편하게 가서 쉴 생각이었다.
앞으로 방청객만 자리하고 나서 조금 정리가 되면 바로 무대 시작이었다. 이제 정말 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재경이 소운이에게 가겠다는 신호를 보내며 정우와 함께 나왔다. 대기실 쪽으로 걸어가는데 문득 JT대표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는 아버지가 왔는데 좋지 않아?”
재경의 물음에 정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경찰서에서 봤을 때가 제일 반가웠고 오늘은 그닥.”
“왜?”
“왜 반갑지 않냐고?”
“응. 다른 애들은 다 부모님이 오셨나 보고 기대했잖아.”
생각해보면 소운이나 태연이가 자기 보러 온다고 말할 때부터 은근히 좋아하는 티를 내고 있었는데 정우는 별로 그런 티가 안 났다. 여기까지 올라왔고 마지막까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물어보지만 정우는 재경이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은 누구보다 많이 봤을 분이고 한번 움직일 때마다 따라다니는 시선이 귀찮아서.”
“하긴 대표님이시니 더 그러겠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정우가 멈춰서자 자연스럽게 재경도 멈추게 되었다. 왜 중간에 말을 끊었는지 싶어 재경이 돌아보니 정우가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내가 잘했다는 걸 봐주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그래.”
그 사람이 누군지 물어보면 안 될 거 같은 예감에 재경이 애매한 대답을 던졌다. 그러나 이미 정우에게 기울어버린 분위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정우가 재경의 손목을 잡아 가지 못하게 막으며 계속 자신을 보도록 살살 잡아당겼다.
“너도 나한테 집중해. 서재경.”
“갑자기 왜 이야기가 엉뚱하게 튀는 걸까.”
“너희 어머님이 오실지 안오실지 불안해하지 말라고.”
재경은 정우의 플러팅을 모른 척 넘기려고 하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지금껏 말하지 않고 있었던 제 속마음을 정우에게 들켜버렸다. 이럴 때 그냥 그런 생각따윈 안 했다는 듯 가볍게 넘겨도 된다. 어차피 정우가 알았다고 하지만 자신이 회피한대도 뭐라고 하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솔직히 신경쓰일 수밖에 없잖아. 엄마라면 분명히 골치 아픈 일을 만들텐데.”
재경은 피하지 않고 제 마음을 그대로 내보였다. 어차피 자기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정우였고 그렇기에 조금 더 편하게 제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담아만 두고 있자니 답답하기도 했고.
“엄마가 내 무대를 보겠다고 오는 게 아니니까. 너랑 비교해서 미안하지만 대표님과 다른 의미로 시선을 끌려고 하겠지.”
JT대표야 그냥 얼굴이 명함인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시선을 끌어모으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이미 잊혀진 가수에 불과한 사람인데도 엄마 스스로가 자신을 봐달라고 할 게 뻔하니 불안한 건 당연했다.
“무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안 왔으면 했던거지.”
마지막엔 반쯤 장난스럽게 말끝을 올렸다. 그렇게 분위기를 조금 쇄신시켜보려 했지만 아쉽게도 표정이 따라오지 않았다. 덕분에 재경의 노력이 무색하게 정우가 무거운 시선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설령 온다해도 너는 네가 할 일만 생각해. 나만 봐.”
정우는 아까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한테 집중하고 있으면 모든 게 끝나 있을거야.”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 둘이 올라가거든?”
재경은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실은 정우의 말에서 위로를 받고 있었다. 엄마가 보이지 않았으니 일차적인 안도감이 들었었지만 정우는 혹시나 뒤늦게 온다해도 절대 흔들리지 말라는 걸 강조했다.
* * *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방청객과 다른 입구로 들어온 정하연이 어색한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제 곧 방청객을 들이려는 듯 바쁘게 움직이는 스태프 사이로 그녀는 아주 오래 전에 느꼈던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가수일 때도 지금과 같았다. 매일 제가 노래를 부를 무대를 보고 또 그 무대를 꾸며지는 걸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게 하나의 취미처럼 굳어져 정하연은 늘 대기실에서 기다리기보단 한켠에 앉아 구경하곤 했었다.
그게 새삼 그립기도 하고 옛 추억에 잠기게 했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한 정하연의 걸음이 천천히 느려지더니 멈췄다.
그녀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흐려졌다. 정하연이 늘 염원하던 그런 무대가 앞에 있었다. 늘 서고 싶었고 애가 타게 그리웠다. 가수로 다시 한번만 더 올라갈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어머님.”
“아, 네. 작가님.”
팔에 닿아오는 손길에 환상에서 빠져나오듯 정하연의 몽롱했던 눈동자에 현실이 깃들었다. 고개를 돌려 작가를 보는 정하연은 어느새 재경을 응원하러 온 엄마가 되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참가자의 부모님이 가는 곳이 아닌 다른 쪽으로 자리를 마련한 작가가 앞장섰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정하연은 다시 무대를 보았다. 저기에 제 아들이 선다.
“정말 제 모습이 가려질까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적당한 자리를 찾아놨거든요. 방청객 얼굴 하나하나 돌아보지 않는 이상 어머님도 찾아내지 못할 걸요?”
작가가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재경이에게 자신이 왔다는 걸 알리지 못할 정도로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정하연은 그녀의 확신에 안도했다. 조용히, 정말 조용히 보다가 일어나야지.
그리고 이 오디션이 끝나고 나면 재경에게 수고했고 미안했다고 말해줘야지. 그동안 많이 후회했었다는 걸 꼭 말해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던 정하연은 이젠 정말 작가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먼저 걸음부터 옮기며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옆을 지나가던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며 둘의 어깨가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정하연이 팔을 부여잡으며 반사적으로 먼저 사과했다. 그러자 상대방도 정하연에게 죄송하다는 듯 모자를 쓴 고개를 푹 숙여왔다. 그렇게 서로 실례했음을 인정하고 지나치는데 문득 정하연이 부딪힌 남자를 보려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서 본 듯 한데…….”
누구라고 딱 떠오르는 건 아닌데 낯익은 게 어디서 본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디에서 봤는지 떠올리지 못했기에 정하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포기하고 작가를 따라갔다.
한편, 정하연과 부딪히면서 삐뚤어진 모자를 고쳐 쓴 전상국이 짜증스러운 듯 혀를 찼다.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잠시 한눈 판 사이에 모자가 벗겨질 뻔했다.
“되는 일이 없네.”
가뜩이나 커다란 무대가 보고만 있어도 짜증나는데 별일이 다 있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전상국은 입술을 잘근 깨물다가 스태프가 다가오자 모자를 푹 눌러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