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왜 다시 왔어?”
대기실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건후가 힐끔 눈만 들어 태연을 발견했다. 태연은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와 건후의 앞에 있는 의자를 거꾸로 돌려서 주저앉았다.
“아무도 나랑 안 놀아 줘.”
태연은 본무대를 앞두고 연습을 하는 것보다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는 것으로 긴장을 푸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여기저기 기웃거린 모양인데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고 오지 못한 게 티가 났다.
그런 태연을 같은 팀인 건후가 달래주면 좋으련만 그는 중요한 무대가 있을 때마다 혼자만의 시간으로 조용히 있는 걸 선호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둘은 평소엔 잘 어울리다가도 이럴 땐 서로 떨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점점 연습생이 줄어가면서 친한 사람들을 떠나보내게 된 태연이 소득 없이 돌아왔으니 건후가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누구한테 다녀왔는데?”
“재경이 형.”
“아…….”
태연의 대화를 받아주지 않을 사람으로 대표적인 게 바로 정우와 재경이었다. 정우는 원래부터 태연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해주지 않았고 재경은 잘 안 됐나 보다. 태연은 등받이에 팔을 대고는 불만스럽게 턱을 툭 대었다.
“재경이 형은 뭐 그렇게 혼자 복잡한지 몰라. 세상 근심은 혼자 다 떠안고 있다니까?”
재경을 향한 불만을 내뱉고 있는 듯하지만 은근한 걱정이 배어있는 걸 느낀 건후가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까도 가서 재경이 형한테 사람 많이 왔다고 하니까 막 표정이 어두워졌었어.”
“그건 네가 가만있는 재경이를 불안하게 찌른 건 아니고?”
건후의 예리한 질문에 태연이 쉽게 아니라고 대답 못하고 입술을 팔에 묻었다. 그러다 우연히 들린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걸려 잔소리를 듣고는 팔에서 얼굴을 뗐다. 화장을 수정하고 나서야 아티스트의 손에서 벗어난 태연은 다시 아까의 대화를 이어갔다.
“안그래도 재경이 형이 막 우울해하니까 정우 형이 손을 꼭 잡아주더라.”
“정우가?”
건후가 믿지 못하겠다는 질문에 태연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만 보라고 하면서 막 재경이 형 달래줬어.”
태연은 어떻게 했는지 보여주려는 듯 직접 건후의 손을 잡고 지그시 눈을 마주쳤다. 장난기 하나 없는 태연의 표정에 건후는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걔가 남을 위로할 애가 아니잖아. 거기다 남자 둘이 무슨 손을 잡고 날 보라고 그러냐.”
“어쨌든 진짜 그랬다니까? 그래서 내가 재경이 형 다른 손 잡아주고 왔는데?”
건후는 태연의 설명을 들으며 상상해보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그의 손을 털어냈다. 자신이 아는 정우는 지금껏 필요할 때 외에는 접촉을 절대적으로 꺼리는 놈이었다. 동갑이고 또 연습생 생활하는 시기가 비슷해서 더 잘 알았다. 가장 나중에 들어온 태연도 건후에게 매달리지만 정우에게 그러지 않는 게 다 받아주지 않는 것 때문에.
그런데 그런 정우가 먼저 손을 내민다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설마…….”
건후는 심각한 눈으로 내려놨던 핸드폰을 들었다. 재경과 정우가 찍었던 라이브 방송을 돌려 보고 있었던 건후가 그 밑의 댓글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재경과 정우를 커플처럼 엮어버리는 댓글이 심상치 않게 보였다.
기함한 듯 제 입을 가리고 핸드폰을 보던 건후가 놀란 눈을 들었다. 그리고는 태연의 왜 그러냐는 시선에 핸드폰을 그가 볼 수 있도록 돌렸다.
“이거봐.”
“뭘 보면 되는건데?”
태연은 갑자기 자기 혼자 왜 저렇게 심각하나 싶어 건후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라방을 할 때 올라오던 채팅이었다. 그것을 읽어내려가던 태연이 대충 분위기를 읽고 대답했다.
“둘이 무슨 연인 같네?”
“그러니까…….”
“그게 왜?”
“이거 때문에 그런 거 같아.”
“이거?”
태연이 앵무새처럼 건후의 말을 따라하다가 뒤늦게 떠오른 게 있는지 아, 하는 소리를 흘렸다.
“둘이 진짜 사귀는 거야?”
“…무슨 소리 하는 거냐.”
건후가 태연의 말을 정색해서 받아쳤다.
“그럼 뭔데?”
사귀는 것도 아니고 댓글은 온통 그런 분위기고. 정우 형은 재경이 형의 손을 꼭 잡아주고. 태연의 머릿속이 점점 복잡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깔끔한 건후는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냐는 듯 심드렁히 대답했다.
“컨셉이지.”
“컨셉?”
건후가 도로 핸드폰을 가져와 채팅창을 가볍게 스치듯 올려보았다. 확실히 1등한 팀답게 채팅 수도 장난 아니게 많다는 생각과 함께 말했다.
“재경이한테만 컨셉 잡아서 하려는 건가 보지. 정우 걔가 아무한테나 그렇게 살갑게 굴진 않잖아.”
“그렇긴 한데…….”
“그리고 둘이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사귀어. 아무리 성별을 떼어놓고 생각한다 해도 그건 너무 이르네.”
“하긴 그렇지?”
건후의 말에 넘어간 태연이 제가 뱉었던 예측을 버렸다. 하긴 뭐, 오디션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다른 생각이 들 시간이 어디 있다고.
“그럼 정우 형 더 너무해. 나한테는 살갑게 안 해주고.”
“너는 정우가 너를 쓰다듬어주면 좋아할거야?”
“그거야…….”
당연하지, 라고 말하려던 태연의 말끝이 흐려졌다. 제 머리를 쓰다듬는 정우를 상상하니 막 소름이 돋고 있었다.
“싫어. 진짜 싫어.”
“거 봐. 그래도 재경이는 괜찮나 보네.”
건후는 이제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다는 느낌에 이어폰을 꽂았다. 태연과 더 대화하기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을 원했다.
덕분에 다시 심심해진 태연이 건후에게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쏘옥 들어왔다.
소운이 대기실을 둘러보더니 자신을 바라보는 태연에게 물었다.
“하준이 형 못 봤어?”
“아까 저기로 가던 거 같은데?”
“고마워.”
소운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곧바로 문을 닫았다. 그에 태연은 같이 놀 상대가 사라지자 아쉬운 듯 입술만 오물거렸다.
* * *
한참 돌아다니다가 하준을 찾은 소운이 벅찬 숨을 고르며 그를 불렀다. 오늘 한 팀이라서 같이 있었으면 하는데 잠깐 화장실을 간 사이 사라졌다. 소운은 하준이 서 있는 주변을 돌아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준이 형. 거기서 뭐해요?”
“잠깐 둘러보고 있었어. 너도 올라올래?”
“저도요?”
하준이 자신을 찾아다닌게 분명한 소운을 향해 손짓했다. 그에 소운은 하준이 있는 자리를 보며 망설였다. 하준이 서 있는 곳이 무대의 한가운데라서 그랬다.
스태프가 바쁘게 돌아다니는데 무대를 올라가도 될까 싶었지만 하준의 어서 오라는 손짓에 소운이 눈을 질끈 감고 계단을 올라갔다.
“형, 그런데 여기 올라와도 되는 거예요?”
“어차피 지금은 누구도 안 쓰는데 뭐.”
하준의 가벼운 대답이 근처를 지나가던 스태프에게 들렸다. 그래서 그가 돌아보니 하준이 눈웃음을 지으며 있어도 되죠? 라고 물었고 스태프는 잠깐이라는 대답만 던지고 사라졌다.
“가끔 보면 형은 참 남다른 거 같아요.”
이상하다고 말할 수 없었기에 소운이 돌려 말했다. 그런다고 하준이 못 알아듣겠냐만은.
“소운아, 나보단 저기를 좀 볼래?”
“저기 어디요? 어디를 보라는…….”
소운이 하준이 가리키는 곳에 뭐가 있나 싶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거기다 하준이 어깨를 잡아 펴주자 자연스럽게 소운의 시선이 전방을 향하게 되었다.
소운은 무대에서 보이는 좌석을 주르륵 둘러보았다. 방청객을 몇 명 부르는지 들었으니 얼추 그 사람들이 들어앉을만한 공간을 상상하긴 했었다. 그런데 상상했던 것을 막상 보니 완전 색다른 느낌이었다. 제 상상보다 훨씬 크고 거대했다.
“직접 보니까 어때?”
소운이 하나하나 자리를 둘러보다가 나중엔 하준과 눈을 마주쳤다. 소운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바뀌었다.
“엄청 커요.”
“그리고?”
“저기가 꽉 채워진다는 거잖아요.”
“맞아.”
하준이 소운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하준도 좌석을 보면서 직접 느끼고 싶어서 올라왔고 그 마음을 소운에게 그대로 전해주고 싶었다. 다행히 소운도 하준이 원하는 바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오디션인데 왜 이렇게 무대가 클까요?”
“오디션이라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그 이상을 보자. 많은 사람에게 우리를 보여주는 시간이 되는거야.”
“네. 꼭 그렇게 하고 싶어요. 우리 내려가서 한번만 더 맞춰봐요.”
“그래, 그러자.”
소운이 의지가 불끈 솟아서 아까보다 더 강하게 발을 구르며 내려갔고 다시 하준 혼자만 남았다.
“너무 의욕을 많이 세워놨나?”
그러다 실수라도 하면 걱정이지만 잘하겠지, 하준이 태연하게 넘겼다. 그리고는 다시 소운과 함께 바라보았던 무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라운드는 심사위원의 투표 없이 현장과 문자로만 이루어진다고 했었다. 당연히 문자의 수가 훨씬 많을테지만 그 비율을 조정해서 현장 50%, 문자 50%로 나눈다고 들었다.
결국 그 현장투표의 50%를 한 팀에서 나눠가질테니 어쩌면 많은 변동이 있을지도 몰랐다.
늘 상위권에 있었던 하준은 마지막까지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무난히 올라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막판 뒤집기가 가능한 현장 투표를 생각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있을 수 없었다.
“이거 생각보다 위험하겠는데?”
순위가 크게 흔들린다? 그건 곧 자신을 비롯한 상위권도 안전할 수만은 없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