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생방송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카페에서 두 명의 여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초대요?”
정하연이 자신을 가리키며 되묻자 마주 앉은 젋은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CHOOES NINE의 메인 김 작가였다. 작가들이 직접 초대장을 들고 연습생들의 부모님을 찾아가 전달하기로 하면서 재경은 김 작가가 가장 먼저 자기가 맡겠다고 했다. 재경의 예선부터 봐오며 알게 모르게 정을 주던 김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 작가는 정하연의 얼굴을 요리조리 보았다. 이상하게 어딘가 낯이 익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서재경 연습생의 어머니이니 그러나 싶지만 둘이 그렇게 닮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어딘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하다니 속으로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은 그녀를 찾아온 용건을 충실히 내뱉고 있었다.
“이번에 마지막 무대는 생방송으로 치러져요. 그래서 우리 참가자의 가족분들을 다 초대하고 있어요. 가족석으로 마련된 좌석이 따로 있고 아마 VIP석이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참가자들이 잘 보이는 자리니까 응원차 꼭 와 주셨으면 해서요.”
김 작가의 설명에 정하연이 제 앞으로 디밀어진 초대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재경의 가족이기 때문에 받는다는 초대장인데 어쩐 일인지 조금도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 분위기를 읽은 김 작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날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그건 아닌데…….”
정하연이 크게 고개를 내저었다. 재경의 마지막 라운드는 꼭 보고 싶은 마음에 아무 약속도 잡지 않았다. 당연히 일도 빼놓은 상태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말끝을 흐리며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자 김 작가가 다시 한번 정하연이 왜 그러는지 물었다.
“그럼 다른 사정이 있으실까요?”
김 작가의 입장에서는 이유를 모르니 사정이라는 것으로 뭉뚱그려 표현했다. 그런데 그게 마치 사연이 있냐는 듯 들렸는지 정하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어깨가 잘게 떨리는 걸 본 김 작가가 당황해서 정하연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숙였다.
“어머님?”
김 작가의 부름이 신호가 된 듯 정하연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 작가가 어쩔 줄 몰라하다가 서둘러 제 옷을 뒤적이고 옆에 둔 가방을 뒤적였다. 워낙 밤샘이 일상인 김 작가가 손수건 같은 물건을 챙기고 다닐 리 만무했다. 칫솔치약 세트나 잡다한 물건을 뒤적인 게 민망한지 김 작가는 테이블 위를 스치다가 냅킨을 발견하고 냉큼 그녀에게 내밀었다.
“여기…….”
정하연이 냅킨을 건네받으며 눈물을 닦고 있으니 김 작가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재경 연습생의 어머니가 왜 우는지 이유도 모르기도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말을 걸면 더 크게 슬퍼할 것 같아 그랬다.
그렇게 김 작가가 카페의 요모조모를 살피는 동안 정하연의 흐느낌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그동안 제가 말을 잘못한 게 있나 되짚어보던 김 작가가 슬쩍 눈치를 보며 입을 뗐다.
“이제 좀 진정되셨나요?”
“네. 미안해요. 못난 꼴을 보였네요.”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김 작가가 손사레치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 지갑을 들었다.
“얼음이 다 녹았네요. 다시 한 잔 주문해올게요.”
“괜찮아요.”
정하연이 괜찮다며 만류했지만 김 작가는 잠깐만 기다리라며 서둘러 계산대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음료를 주문하고 돌아온 사이 정하연의 말끔해진 얼굴을 보고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보다는 따뜻한 차가 좋을 거 같아서요.”
은은한 허브향이 풍겨오자 김 작가의 세심한 배려를 느낀 정하연이 고마움에 미소를 내보였다.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김 작가는 방금까지 서재경과 닮지 않았다고 여긴 어머니의 웃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껏 웃지 않아서 몰랐는데 눈이 가늘어지면서 웃는 얼굴에 재경이가 어렴풋이 보인 것이다. 닮긴 닮았구나 생각하며 김 작가는 계속 본론을 이어가도 되나 고민하는 동안 정하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재경이한테 미안한 게 많아요. 그래서 초대장을 받고도 선뜻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어요.”
“아… 그러시구나.”
“제가 그동안 재경이를 제 마음대로 많이 휘둘렀거든요. 어릴 때 기획사에 넣고 데뷔만을 기다렸어요. 아이가 얼마나 연습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내가 없어도 씩씩하게 버티는 아이 칭찬은 못 해 줄 망정 언제 데뷔하냐고 재촉만 해 댔었죠.”
“그러셨구나.”
김 작가는 앞뒤 사정이 잘 그려지지 않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녀가 모르는 재경의 다른 이야기라고 하니 저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연습생인 자식을 둔 부모가 데뷔하는 날을 물어보는 건 별로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기획사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서 하루라도 빨리 눈에 들어서 데뷔할 수 있다면 그땐 제게도 기회가 올 줄 알았어요.”
“기회요? 무슨 기회…….”
김 작가가 저도 모르게 궁금한 걸 질문했다가 뒤늦게 정하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고 소리를 지르려던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어디서 봤다 생각했는데 바로 떠올리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별.'
이번에 라운드를 준비하면서 옛 자료를 뒤적였고 거기서 봤던 얼굴인 것이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흘러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김 작가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동안 정하연은 메마른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해갔다.
“그래서 이번에도 무리해서 재경이를 데뷔시키려고 했는데 알고보니 그게 사기였었네요. 재경이도 아는 걸 저는 멍청하게 속아넘어가서는 큰일을 당할 뻔 했어요.”
“사기요?”
김 작가의 물음에 정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경이를 솔로로 데뷔시켜 주겠다고 약속한 기획사가 있었어요. 재경이가 워낙 연습생도 오래해서 기본기도 탄탄하고 괜찮다면서 앨범 계약을 했었는데… 잘 안 됐어요. 재경이가 오디션을 지원했거든요.”
“아, 그렇구나.”
“어차피 오디션이니 언젠가 떨어질 걸 생각하고 그 계약을 미련하게 붙잡고 있었죠. 실은 중간에 재경이한테 오디션 그만두고 나오라고도 했었어요.”
하차를 권유했다니, 김 작가가 놀란 가슴을 짚었다.
“그런데 재경이가 계속 오디션을 하겠다네요. 그러면서 저한테 그 기획사가 거짓이라고 그랬어요. 알고 보니까 전부 사기였어요. 재경이가 오디션을 계속 하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그 아이를 사지로 밀어 넣었겠죠.”
“탈락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한 김 작가가 다행이라며 정하연의 손을 토닥여주었다. 자신들은 그저 오디션을 통해 연습생들에게 빛을 비춰 주고 싶었던 것뿐인데 이런 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줄 몰랐다.
“그런데 제가 무슨 염치로 이 초대장을 받을 수 있을까요. 재경이한테 그 오디션 그만두고 나오라고 했는데 가서 응원할 면목이 없어요.”
“어머님.”
왜 초대장을 보고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알게 된 김 작가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저는 아무래도 못 갈 것…….”
“잠깐만요.”
김 작가가 대뜸 정하연의 말을 끊었다.
“가족석에만 안 앉으시면 되잖아요.”
“…네?”
“재경이, 아니 서재경 참가자가 노래부르는 거 보고 싶지 않으세요?”
“보고 싶어요.”
정하연은 제 솔직한 심정을 내보였다. TV에서 보는 제 아들도 정말 눈을 뗄 수 없이 잘하는데 직접 보면 아마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이 복받쳐 오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서재경 참가자가 신경쓰지 않도록 가족석이 아닌 다른 자리를 마련할게요. 그렇게 하면 어머님도 오실 수 있는거죠?”
김 작가의 설득에 정하연은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연히 재경이를 가까이서 보고 싶다.
“제가 특별히 어머니 자리를…….”
김 작가는 그 뒤로도 완전히 혹할 수 있도록 정하연에게 몇 가지 제안을 건네왔다.
* * *
“가족을 초대해?”
“그렇다던데요?”
우연히 복도에서 만난 태연이 물어온 정보에 재경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엄마가 지금 엄청 난리 치고 있어요. 그날 뭐 입고 올지부터 시작해서 제 응원하겠다고 도화지도 사고 그랬다네요?”
태연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모님이 오는 게 좋은지 입가에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태연과 다르게 좋아할 수만은 없던 재경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우리 연습생 가족 전부 초대한다는 거겠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봐야 18명이잖아요. 건후 형네 부모님도 시골에서 올라오시고 저기 외국에서 오시는 분도 있어요.”
어느새 연습생들을 다 돌면서 정보를 물어온 태연이 순순히 대답했다.
“알려줘서 고맙다.”
“별말씀을요. 저는 가족이 본다고 하니까 엄청 떨려서 다시 연습하러 가야겠어요. 또 봐요.”
태연이 손을 흔들며 사라지자 복도에 재경 혼자 남았다.
“가족을… 초대한다고?”
재경에게 가족이라고 해봐야 엄마뿐인데.
그리고 엄마는 언제든 재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 가족으로나마 카메라에 비치는 것조차 기회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하아, 그냥 안 왔으면 좋겠다.”
재경은 골치 아픈 일이 생길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