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101화 (101/125)

101화

“다시 보네요.”

한 남자가 착장을 다 마친 정우에게 다가갔다. 먼저 인사를 건네오는 남자의 얼굴을 살피던 재경은 곧 그가 누군지 떠올렸다. 프로필 촬영을 해주었던 포토그래퍼였다. 그가 정우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이 의상을 봐줬던 스태프가 재경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저 분 되게 유명하신 분인 거 아시죠?”

스태프의 얼굴에는 포토그래퍼를 이 프로그램에 영입한 자부심이 언뜻언뜻 내비치고 있었다. 그말에 재경이 다시 포토그래퍼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땐 워낙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어서 포토그래퍼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거기다 늘 카메라로 얼굴을 가리다시피 하기에 얼굴을 오래 들여다볼 기회도 없었는데 이번에 차근차근 얼굴을 살펴보니 어딘가 눈에 익어보였다. 아마 활동하면서 한번 이상은 같이 작업했을 거 같았다.

“저희 PD님이 제일 무리해서 잡으신 분이죠. 증명사진만큼 중요한 게 어딨냐면서 저 작가님 섭외하려고 밤낮을 쫓아다니셨대요.”

재경의 허리부근이 퍼지지 않게 다잡아준 스태프가 다 했다는 듯 손을 뗐다. 그리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재경에게 마저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 PD님 진상짓에 딱 프로필 촬영까지만 해주기로 했는데 이번에 먼저 연락이 왔대요. 되게 의외지 않아요?”

확실히 카메라 앞에서는 일반인에 더 가까운 연습생보다는 연예인을 상대하는 게 더 쉬울 터였다. 그런데 먼저 연락을 해왔다는 건 저번 프로필 촬영이 어딘가 마음에 들었다는 건데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유가 뭐래요?”

“자세한 건 모르고 몇몇 확인하고픈 애들이 있다나?”

스태프도 확신이 없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고는 곧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흘려들어서 기억이 안나네요. 그럼 촬영 잘하세요.”

“감사합니다.”

스태프가 손을 살랑 흔들어주고는 사라지자 재경이 뒤늦게 포토그래퍼를 향해 반쯤 틀었던 몸을 돌렸다. 먼저 정우와 인사를 나누던 포토그래퍼가 마침 재경에게 고개를 돌리면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재경이 반사적으로 먼저 인사를 건넸는데 포토그래퍼는 어쩐 일인지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관찰자의 시선에 놓인 재경은 가만히 있어야 할지 아니면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할 때였다.

“그때랑 많이 달라졌네요.”

포토그래퍼의 호선을 그리는 입술을 본 재경이 그가 한 말을 되짚어보았다. 달라졌다는 말은 프로필 촬영때와 지금을 말하는 거겠지?

“아무래도 컨셉을 강하게 주다보니 화장이 진해지긴 했어요.”

으레 다른 사람들이 보고 놀라던 제 외양 때문인가 싶어 제경이 어색하게 제 머리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하지만 포토그래퍼는 그런 대답을 원한 게 아니었는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보다 많이 긴장이 풀렸어요. 그렇다고 완전 느슨해졌다는 게 아니라 뭐랄까 어딘가 홀가분해졌달까?”

그는 재경의 내면에서 우러러 나오는 분위기를 읽은 듯 그의 전체적인 모습을 다시 훑어보았다. 그리고 제 말에 힘을 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달라졌어. 찍을 맛이 나겠네요.”

카메라를 매만지던 그는 저번처럼 대뜸 재경에게 들이댔다.

“작가님?”

“작가님 말고 진우 형이라고 불러요.”

재경의 얼굴을 테스트 삼아 열심히 찍어대던 포토그래퍼가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가 카메라를 내리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자주 볼 거 같으니까 이름 정도는 알아두면 좋을 거 같아서. 시작할까요?”

이진우가 말없이 기다리고 있는 정우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  *  *

“자세 바꿔 볼게요.”

이진우 포토그래퍼의 디렉션에 정우와 재경은 서로를 등진 채 각자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웃음기가 완전히 가신 채로 그들의 컨셉에 맞는 표정을 짓느라 재경 역시 평소보다 얼굴에 힘이 들어갔다. 그에 연신 그들을 찍어대는 이진우는 어딘지 개운치 못한 표정으로 찍힌 결과물을 보았다.

분명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만족스럽지도 않은 찝찝한 얼굴이었다. 프로필 촬영 때 개인으로 찍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서 또 그들의 컨셉안을 살펴보며 이진우는 다시 카메라를 들 생각을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이쪽으로 와볼래요?”

결국 이진우는 소파에 앉아있던 둘을 불렀다. 재경은 이진우의 표정을 읽고 재빨리 자신들을 찍은 모니터를 바라보았지만 정우는 아직 감을 잡지 못한 듯 어설프게 따라왔다. 각자 반응이 다른 것도 상관안하고 이진우는 모니터를 보며 찍어댄 결과물을 가리켰다.

“어때요?”

재경이 허리를 숙여 제 사진을 하나하나 바라보자 정우 역시 그 옆에서 살짝 허리를 숙여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하나둘 사진이 넘어갈 때마다 뭔가 느껴지는지 재경은 표정도 점점 가라앉아갔다.

‘딱딱하네.’

재경이 재 얼굴에서 느낀 소감을 떠올렸다. 당연히 이렇게 찍으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찍고 나니 제 생각보다 부족한 점이 많이 보였다. 재경이 어딘가 눈치챈 듯 눈빛이 가라앉을 걸 본 이진우가 입을 열었다.

“노래는 팝이라면서요. 그것도 막 강렬한 비트나 그런 게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가 한쪽에 놓아둔 화일을 펼쳐 노래 제목을 확인했다. 역시나 자신의 생각이 맞기에 더 들여다 볼 것도 없었다.

“거기다 어떻게 색을 입혔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이건... 그러니까 남색을 칠하고 진회색을 칠하고 마무리로 검은색을 칠하려고 하는 기분인데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재경은 한숨이 터져나오려는 걸 꾹 참고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말하는 게 뭔지 알았다. 이미 의상이 강한데 굳이 표정을 굳힐 필요가 있냐는 말이었다. 편곡과 창작 안무를 더했지만 기존의 노래의 성격을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듯 너무 강한 이미지로만 나가려고 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다 보니 이진우 포토그래퍼도 어딘가 불만족스럽고 결과물도 딱딱하게 나온 거겠지.

“한 사람이라도 알았다니 다행이네.”

재경과 다르게 아직 온전히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정우는 그저 말없이 두 사람의 눈치만 살폈다. 이진우는 그런 정우를 보고도 걱정이 되지 않는지 아까보다 밝아진 얼굴로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그럼 다시 찍어볼게요.”

이진우의 지시에 맞춰 소파로 돌아온 재경은 잠깐 생각에 빠졌다가 정우의 팔을 잡았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 같아. 그러니까…….”

재경은 정우를 소파에 앉히고 자신도 그 옆에 앉혔다. 그리고 이 일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정우의 눈을 바라봤다가 순간 웃음이 나오려는 걸 급히 참았다.

왜 이 순간조차 쟤가 귀엽다고 생각했는지.

정우가 제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표정과 어설프게 상황을 맞춰보려는 귀여운 행동에 아까의 심각했던 생각이 흐트러질 뻔했다. 회귀하기 전에 본 이정우는 모든 걸 잘하던 남자였다. 촬영에서도 무대에서도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던 그도 이렇게 아기같은 시절이 있었구나 싶으니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래봐야 당시의 재경보다 고작 2년 먼저 데뷔한 건데도 말이다.

“나한테 맞춰줘. 그럼 너도 뭐가 문제인지 금방 알게 될거야.”

재경은 아까처럼 정우에게 등을 돌리는 대신 그와 나란히 앉았다. 그러다보니 둘이 나란히 이진우가 있는 곳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정우는 어색하기만 한 이 자세에서 뭘 알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던 찰나, 재경이 돌연 정우에게 몸을 기대왔다.

원래라면 딱딱하게 잡힌 자세에 얼굴에서 힘을 풀지 않아야 하는데 재경은 정우에게 온전히 기대어 힘을 풀어왔다. 그걸로도 모자라 긴 숨까지 내쉬는 게 촬영이 다 끝난 것처럼 굴어댔다. 하지만 그런 재경의 달라진 모습을 본 정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의아했던 표정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는 재경만큼이나 편안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런다고 미소를 짓는 건 아니지만 정우는 재경이 더 잘 기댈 수 있게 자세를 잡았다.

직접 몸을 기대고 있어서 보지 않아도 정우가 제 생각을 맞춰온 걸 눈치챈 재경이 스쳐가는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애치고 다 잘한다 싶더니 금방 상황을 캐치해왔다.

정우도 나름의 자제를 잡은 듯하자 카메라 셔터음이 물밀듯이 들려왔다.

“자세 좋고 표정도 좋네요. 그대로 조금씩만 움직여요.”

재경은 느른한 시선으로 카메라를 보면서 정우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기대니까 편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무심히 카메라를 보던 정우는 대답 대신 재경의 허리 뒤쪽에 있는 손으로 그의 등을 받쳐주었다.

“이렇게 하면?”

“나야 더 좋지.”

재경이 아예 다리를 꼬면서 더욱 기대어오지만 정우가 전부 받아주고 있으니 촬영하기도 한결 수월해졌다.

“이런 맛으로 단체샷을 찍나?”

서로에게 기대서 찍을 수 있으면 그때마다 이렇게 기대면 좋겠는데.

촬영이 잘 풀린다 싶으니 긴장이 풀린 재경이 엉뚱한 말을 해오자 머리 위에서 정우의 어이없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지금 촬영 중인거 잊지 않았지?”

“당연히 알지. 그래서 이렇게 포즈도 취하고 있잖아.”

재경이 능청스럽게 굴었다. 평소엔 재경을 당황스럽게 하던 정우였지만 이번만큼은 졌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아까와 다른 촬영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었으니 재경을 인정해주기로 했다.

“너 진짜 여기서 하는 촬영이 처음이야?”

아무래도 의심스러운데 말이지.

정우가 믿지 못해 한 번 더 묻는 말을 재경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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