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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99화 (99/125)

99화

하준의 부드러운 진행 속에서 하나둘 게임을 진행하다보니 그 많던 소품이 점점 줄어드는 게 눈에 띄었다. 물론 수월한 시간은 아니었다. 말도 못 할 게임이 정말 많았다. 스피드 게임을 하는데 말할 수 있는 건 제 이름뿐이라 억양이나 행동으로만 문제를 내야 하고 이구동성이라면서 단어와 연상되는 걸 말해서 맞추는 것 등이었다.

“지금껏 해왔던 미션 중에서 제일 힘든 거 같아요.”

태연이 아예 바닥에 반쯤 쓰러져서 숨을 헐떡였다. 모든 게임을 건후와 함께 하면서 맞춰가려니 어지간히 지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재경도 다르지 않았다.

거칠어진 숨을 애써 누르는 재경은 정우를 힐끔 훔쳐보다 돌아왔다. 몇 개의 게임을 거치는 동안 의도치 않게 정우와 닿는 일이 많았다. 그뿐이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문제를 내고 맞출 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마저 잊을 정도로 정우에게 집중했다.

적당히 거리를 벌려도 모자랄 판에 아주 기름을 퍼붓는 꼴이었다.

‘어떻게 이런 게임을 하냐고.’

재경이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걸 참으며 억지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게임 한 번 할때마다 체력이 눈에 띄게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물론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의외로 정우의 몰랐던 점을 꽤 많이 알게 되기도 했다.

그의 눈동자가 유난히 검다는 것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손 크기여도 악력의 차이가 제법 크다는 것. 여러 게임을 하면서 알아낸 정보가 재경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마지막은 ‘그럴까?’ 게임입니다. 무조건 대답을 그럴까로만 하면서 오래 버티는 팀 순으로 순위가 정해지게 됩니다. 아, 이거 바꿨나봐요.”

하준이 최PD쪽을 보며 물었다. 예전의 ‘당연하지’ 게임을 변형시킨 게 맞는지 PD가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거 뭐, 같은 팀끼리 하면 적당한 수준의 매운맛으로만 버무려지겠네요. 그럼 게임 재미없어지는데.”

다른 팀끼리 섞으면 좋겠다 싶은 하준의 눈빛은 곧 포기하고 큐시트를 들었다. 어디까지나 케미를 위해 팀이 친해져야 한다는데 섞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PD님 재미없는 팀은 과감히 편집해주세요. 그러지 않고서는 이 게임 못 살릴 거 같아요.”

하준이 아주 매운 마라맛으로만 이끈 팀 위주로 방송애 내보내달라고 하니 PD가 흔쾌히 OK사인을 보내왔다. 정말 하준의 말대로 적당히 추려서 내보낼 생각인지 벌써부터 카메라 몇 대가 탈주해서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제는 적당히 할 수 없게끔 분위기를 만들어놨는데도 어디가 부족한지 하준이 쉽게 게임을 시작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역시 이런 일은…….”

그러다 대뜸 고개를 든 하준이 한 사람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 게임의 시작은 바로 너부터라는 듯. 하준의 시선을 받은 건후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같은 팀인 태연까지 입술을 삐죽이는 게 자기들을 맨 처음 시키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런다고 흔들릴 하준이 아니지만.

“시작할까요?”

하준이 신호를 보내고 자리에서 빠지자 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랑 밥 같이 먹을래?”

“그럴까?”

건후가 시작이 좋았다는 듯 엄지를 추켜세워주었다. 편집이 되더라도 이상하게 보이기 싫은 태연의 속내가 훤히 보이는 질문이었다. 이제 그것에 맞춰 건후도 적당히 맞춰주면 될 일이었다.

“우리 태연이, 이제 편식 안하고 골고루 잘 먹어 볼까?”

“…그럴까?”

태연의 입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것도 잠시 태연이 다시 적당한 말을 가져왔다.

“우리 무대 잘 꾸며 보자.”

“그리고 우리 태연이, 이제 잘 때 무섭다고 형 침대로 들어오지 말고 오늘부터 혼자 자 보자.”

“내가 언제 그랬어!”

태연이 발끈해서 외치는 소리와 함께 하준이 게임이 끝났다는 의미로 팔을 번쩍 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하준이 두 사람 사이에 난입하면서 막 건후에게 달려들려는 태연을 막았다.

“태연아, 잠깐만 진정해 봐.”

“여기서 진정하라니. 내가 언제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고.”

태연이 흥분해서 날뛰는데도 건후는 별로 개의치 않은 듯 오히려 카메라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게임은 방송을 나갈 걸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이걸 노리고 건후부터 끌고 나온 하준도 하준이지만 그걸 그대로 캐치한 건후도 제법이었다. 그렇게 건후가 제대로 시작을 끊어준 덕분에 다음 팀도 비슷한 식으로 게임이 진행되었다. 하나둘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재경은 정우의 팔을 가볍게 툭 쳤다.

정우가 돌아보자 재경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서로 배신하지 말자.”

건후와 태연처럼 되지 말자는 의미로 건넨 제안이었다. 재경은 곧바로 긍정을 표해오지 않는 정우에게 말을 덧붙였다.

“우리 순위 상당히 안 좋아. 이러다가 무대 제일 처음 올라가겠어.”

지금 게임을 하는 이유가 무대 순서를 두고 하는 거였기에 재경은 정우에게 게임보다 중요한 게 뭔지 알려주었다. 그제야 본무대를 떠올린 정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두 사람의 차례가 되었고 재경은 비장하게 일어났다. 마지막 게임이고 여기서 남들보다 점수가 잘 나온다면 무대 순서를 중간으로 뺄 수 있다는 기대도 들었다.

물론 그러면 정우에게 더 좋을 거란 생각이었다. 어차피 두 사람의 점수가 나뉘는 상황에서 재경은 정우에게 점수를 빼앗을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

정우와 마주보고 선 재경은 이상한 말은 안 된다는 말을 소리없이 벙긋거렸다. 정우가 티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준이 시작하라는 말이 들려왔다.

“우리도 같이 밥 먹을까?”

태연이 건후에게 하던 그 질문이었다. 재경은 시작이 좋다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이따가 연습할 때 안무 만들까?”

“그럴까? 내일도 같이 밥 먹을까?”

“그럴까? 노래 연습도 해야 하니까 안무는 3시간 정도만 연습하자.”

“그럴까? 매일 같이 밥 먹을까?”

“…그럴까?”

무슨 밥타령이야. 배 속에 거지가 들었나? 재경은 계속 비슷한 라인으로만 나오는 질문에 정우를 이상하게 보다가 적당한 말로 받아쳤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정우의 질문은 여전했다.

“매일 나랑 둘이 밥 먹을까?”

“…그래, 일단 오늘은 일찍 자자.”

“나랑만 밥 먹는 거야. 다른 사람 말고 나랑만 밥 먹고 나랑만 놀자.”

“그…….”

재경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정우의 별거 아닌 말인데 이상하게 들려왔다.

*  *  *

창작 안무로 들어가기로 하면서 재경과 정우는 오랜만에 연습실을 찾았다. 아까 게임에서 마지막 ‘그럴까?’ 때문에 둘의 사이가 조금 어색해져 있었다. 실은 그게 아니어도 워낙 걸리는 게 많았지만 어쨌든 마지막 게임이 가장 영향이 컸다.

재경은 정우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소심하게 연습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지금은 진짜 연습을 해야 할 때라는 생각에 재경이 머리를 흔들어 아까의 잡생각을 다 털어버렸다.

그동안 음원을 틀어놓고 손가락만 까닥이던 정우가 거울에 비친 재경과 눈을 마주쳤다.

“그루브하게 들어가볼까?”

정우가 팔로 웨이브를 그리며 느낌을 표현해왔다. 약간의 절제감이 들어가니 몸선이 돋보이기도 좋았다. 이 노래에 가장 잘 맞는 리듬감이긴 했지만 그것을 보는 재경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별로야?”

“별로는 아닌데 조금 심심해.”

정우가 거울을 보고 아까 한 동작을 리플레이해봤다. 나쁘지 않지만 재경의 말대로 무난하긴 했다.

노래를 먼저 선택하다보니 그에 맞는 안무를 짜는 게 생각보다 난항을 겪게 되었다. 여성 솔로의 보컬이 돋보이는 노래라 그에 맞는 춤을 만드는데 한계가 있었다.

정우의 옆에서 재경도 같이 고민에 빠졌다. 거울에 비친 자신과 정우 두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안무를 차면 좋을까. 이왕이면 서로가 서로를 돋보일 수 있도록 출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그러다 재경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가자 정우가 타이밍 좋게 물러났다. 그리고는 노래를 틀어서 재경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다렸다.

“꼭 주요 라인으로만 맞출 필요는 없으니까.”

재경이 혼잣말과 함께 조금 힘있게 팔을 뻗어보았다. 파워풀한 노래가 아니라서 언뜻 어울리지 않아보였다. 절제된 그루브함을 유지하는 게 가장 좋아보이지만 정우는 일단 재경의 춤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노래에서 흘러나오는 여성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러가는 데 반해 재경의 움직임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잔잔한 파도와 같은 노래에 어울리지 않는 강한 파도처럼 이질적이었다.

그러나 점점 노래가 후반부를 향해 갈수록 정우의 눈이 가늘어지며 재경의 춤에서 어떤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점점 재경이 만들어내는 리듬에 몸이 반응하면서 어느새 노래와 어울려 가는 춤을 따라가고 있었다. 지금 재경이 무슨 생각으로 춤을 춘 건지 알았다.

노래가 끝나자 재경이 거친 숨과 함께 괜히 간지러운 턱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도 생각난 김에 몸을 움직여본 것에 불과한지라 손봐야 할 곳은 많았지만 정우라면 어떤 분위기인지 알거라 여겼다.

“이상해?”

“탑 말고 깔리는 사운드로 가자는 거지?”

비교적 단순한 탑 라인을 두고 깔리는 사운드로 리듬을 맞춘 재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뜻 노래와 밸런스가 안 맞아보일지 모르지만 포인트마다 적절한 매치를 해준다면 어우러지게 보일 수도 있었다.

“일단 우리 목소리로 다시 녹음할거니까 어느 정도 탑라인에도 분위기를 맞출 수 있을 거 같아.”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무엇보다 평범하지 않다는 게 정우의 호감을 끌어낸 모양이었다. 그는 방금 재경이 췄던 춤을 되새기며 몇 가지 기억나는 동작을 따라해보았다. 비율이 좋아서 팔다리가 긴 재경과 다르게 전체적으로 길쭉길쭉한 정우가 움직이니 확실히 파워가 남달랐다.

정우가 움직이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재경의 머릿속엔 어떤 의상과 어떤 배경을 꾸며야 할지 차곡차곡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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