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게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보조 MC를 뽑으려고 하는데요.”
늘 최PD가 진행하던 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누군가와 같이 하겠다고 전해왔다.
“예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친구가 있었는데 날 도와줄 역할로 제격일거 같아서요. 안 그래요, 윤하준 연습생?”
하준이 갑자기 제 이름이 불리며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곧 상황파악이 된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최PD에게 다가갔다.
“이런 일에 또 저만한 사람이 없죠.”
“그럼 믿고 맡기겠습니다.”
최PD로부터 큐시트를 받은 하준이 그대로 몸을 돌려 연습생을 향해 과장되게 허리를 숙였다.
“이번 게임만 진행하게 될 우주최강두번째로잘생긴미남 윤하준이라고 합니다.”
급작스럽게 결정된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큐시트를 빠르게 읽으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게 과연 최PD가 눈여겨 볼 만 했다. 최PD는 적당히 하준에게 시선이 몰아가는 틈을 타 뒤로 빠졌다. 이제 중간에 한번씩 목소리만으로 진행할 모양이었다. 재경은 의외의 MC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진행병.’
예전부터 하준이 아이돌의 리더와 동시에 뭐든 기회만 주어진다면 진행하려던 걸 기억했다. 짧은 라이브 방송에서도 진행하고 일일 MC도 곧잘 지원하는가 싶더니 나중엔 아예 그쪽으로 고정방송 두 개를 따왔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상황을 살피는 능력이나 어떤 위기가 닥쳐도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하준이 제 마음대로 주도하는 것 자체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만들어낸 성과였다.
그런 하준의 될성부른 떡잎을 PD가 미리 알아본 것도 신기했다.
“그럼 가장 먼저 할 게임은 '맛을 맞춰봐'입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두 사람이 눈을 가린 채 한 사람이 먹여주고 다른 사람이 맛을 알아 맞추면 되는데요. 단 한 가지의 음식만을 먹으면 되고 맞추는 시간에 따라 1등이 결정됩니다.”
이후로도 하준은 연습생이 궁금해할 만한 것을 큐시트와 눈치를 버무려 적당히 대답해 주었고 그사이 게임을 치를 준비가 완전히 끝났다.
게임은 건후와 태연부터 시작되었다. 서로 안대로 눈을 가리고 먹여주는 사람과 맞추는 사람을 정해 자리에 앉았다. 건후가 먹여주고 태연이 맞추기로 이야기를 했는지 태연은 뒷짐을 진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시작합니다.”
신호에 맞춰 하준이 건후의 손에 음식을 올려주었다. 그것을 건후가 아까 봐둔 태연의 위치를 떠올려 곧바로 입에 넣어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건후의 손은 태연의 입보다 옆으로 향하면서 태연의 볼을 찔렀다. 태연이 고개를 돌려 어떻게든 먹으려고 하면서 건후도 그에 맞춰 손을 움직이는데 안 보이니 생각보다 시간이 제법 걸렸다.
“저걸 하라는 거지?”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떻게든 입을 벌려 먹으려는 태연과 먹여주려는 건후의 노력을 본 재경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누가 맞출까? 너? 나?”
재경은 정우와 자신이 눈을 가리고 게임을 하는 걸 상상해보았다. 자기가 먹여주겠다고 정우의 얼굴을 더듬거리는 것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또 입을 벌려 고개를 젖는 것도 딱히 내키지 않았다.
“그냥 안 하고 싶다.”
“잘… 먹여 줄게.”
재경이 한숨을 푹 내쉬며 하는 말에 정우가 슬그머니 제가 하고 싶은 역할을 내비쳤다. 먹여주고 싶다는 뜻에 재경은 이 와중에 그걸 선택하는구나, 싶은 눈으로 정우를 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도 없으니까.
“그 다음은 이정우, 서재경 연습생.”
알아서 다름 사람까지 척척 불러대는 하준 덕분에 재경은 끝에 가서 불러주지, 싶다가도 빨리 해치워버리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해야 하는 일이니까. 재경이 일어나자 정우도 그를 따라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둘의 케미가 유독 좋은 걸 아는 다른 연습생들의 환호를 받으며 재경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이정우 연습생이 먹여주네요. 아, 그럼 재경이가 받아먹는거야? 귀엽겠다.”
막 안대로 눈을 가리려던 재경이 방금 잘못들었나 싶은 눈으로 하준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 아니죠?”
“말랑콩떡이라 입술만 벌려서 받아먹는 거 아기새처럼 귀여울 거 같아. 안대 쓰세요.”
제멋대로 재경에게 반말했다가 MC로 돌아와 존댓말을 했다가 정신없는 하준의 진행에도 모두가 재밌다는 듯 웃어댔다.
단 한사람 재경만이 웃지 못한 채로 안대로 눈을 가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더욱 청각이 예민해지는 이때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시작 신호와 함께 재경이 살짝 긴장된 듯 마른침을 삼켰다. 어떤 음식일지도 모르고 또 얼마나 걸릴지 싶은 생각이 복잡하게 뒤엉켜버렸다. 빨리 맞추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빨리 처리하고 들어가고 싶기도 하고.
‘일단 하기나 하자.’
뭐든 시작해봐야 알 수 있단 생각에 재경은 뒷짐을 진 채 기다렸다.
“이거…….”
정우의 난감한 목소리와 어서 시작하라는 하준의 반말에 재경은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저 빨리 안대를 벗고 싶은 마음에 재경은 잠깐 초조한 마음이 되었는데 아랫입술로 뭔가가 닿아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닿았던 것으로부터 입을 벌렸다. 그런데 재경의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걸 정우도 알아채면서 그가 쥐고 있는 것을 위로 올려 둘의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재경은 제 이마쪽에서 느껴지는 정우의 손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 막상 시작하니 적극적이네요. 이래서 참 서재경 연습생이 매력있어요.”
하준의 쓸데없는 말을 듣는척 마는척 재경이 고개를 돌려가다가 혀를 내밀자 마침 근처에 있던 무언가가 닿아왔다.
“아…….”
잠깐 닿았다가 곧 스쳐가면서 재경이 아쉬운 소리를 흘렸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맛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미쳐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해봤다. 얇았던 거 같았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뭐지?’
아까 건후처럼 젤리 같은 종류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다시금 뭔가가 닿아올 것을 생각하며 재경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입술에 닿으면 입을 벌리면 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집중하게 되니 저도 모르게 입술에 힘을 주게 되었다. 그러다가 몇 번 입술에 무언가가 스치긴 했는데 그때마다 재경이 뒤늦게 입을 벌려서 놓치고 말았다.
‘이게 은근히 힘드네.’
다른 사람이 게임할 때도 어려워보이긴 했지만 막상 해보니 더 어려웠다. 그러다가 다시 제 얼굴 근처에서 배회하는 정우의 손길에 재경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입안으로 무언가 들어오는 걸 느끼는 동시에 그것에 제 혀를 꾹 누르자 재경이 욱소리와 함께 입을 다물었다.
“윽.”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 때 안으로 들어온 것을 잘라낼 요량으로 깨물었는데 정우의 신음이 들려왔다. 재경은 끊어지지 않는 정체에 재빨리 입을 열자 안으로 들어왔던 게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밖으로 나가는 게 느껴졌다.
“네, 아쉽게도 방금 들어간 건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재경아 그거 먹으면 큰일나.”
하준이 친절하게 아니라는 설명과 함께 재경은 제 입에 들어왔다 나간게 뭐였지는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으니 생각보다 빠르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우 손가락이라 먹어봐야 맛 없어.”
다행히 보지 않아도 하준이 알려준 덕분에 재경은 방금 제가 깨문 게 정우의 손가락인 걸 알았다. 재경은 너무 당황해서 뒷짐지던 손을 풀어 제 입을 가렸다.
‘먹을 걸 넣어줘야지 왜 손가락을…….’
기가 차지만 그건 상대방도 만만치 않을 걸 모른 재경은 그냥 정우를 이상한 놈으로 취급했다.
“아, 정우야. 여기서 부끄러워하면 안 돼. 시간이 흘러가고 있단 말이야. 일단 빨리 먹여야 합니다.”
제가 입을 가린 사이 정우도 손가락이 깨물린 충격에 다시 먹여 주려고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준의 설명에만 의지한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을 버텨 가던 재경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빨리 해.”
재경이 정우에게 재촉하듯 말하자 그제야 정우도 다시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깐 기다리자 아까보다 정확하게 짚어오는 무언가가 입술을 눌러 재경이 입을 벌렸다. 수월하게 안으로 들어온 걸 살짝 이로 문 재경은 곧 이것의 정체가 빨대라는 걸 알았다.
‘음료수란 건가?’
뭔지 모르니 일단 빨대를 쭉 들이키는데 시원하면서도 상큼한 음료수가 빨려들어왔다. 그 맛의 정체를 떠올리기도 전에 재경이 손을 들고 외쳤다.
“정답, 오랜지주스.”
“정답입니다.”
하준이 시원한 대답에 재경은 제 눈부터 가린 안대를 내렸다. 잠깐 눈이 부셔서 눈을 깜박인 재경은 앞에서 마찬가지로 안대를 내린 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대체 손가락을 왜 넣은거야?”
“입술 벌려서 빨대 넣어주려고.”
“어련히 닿으면 입 벌릴까.”
재경이 기막힌 듯 물으며 안대를 하준에게 내밀었다. 정우와 재경에게서 안대를 받아든 하준이 둘의 대화에 기꺼운 듯 끼어들었다.
“그게 재경이 네가 자꾸 이상한 타이밍에만 입을 벌려서 그렇지.”
하준이 계속 피식거리며 재밌다는 듯 굴었다.
“빨대 물려주기가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덕분에 구경하는 사람들만 재밌었지.”
자리로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재경이 살짝 비틀거린 건 절대 하준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