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새벽 동트기 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잠깐 제 머리를 흔들며 잠을 깨우는가 싶더니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들었다. 시계를 확인하려는 거였지만 화면이 켜지면서 일어난 사람의 얼굴을 비쳤다.
정우가 시계를 확인하면서 제 메마른 눈가를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재경이 몸을 뒤척인 걸 알아챈 정우가 급히 핸드폰의 불빛을 껐다. 다시 어두워진 방에서 재경의 고른 숨소리를 듣던 정우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발걸음을 죽이고 재경이 자는 침대로 다가갔다. 발끝에 침대가 닿는 걸 느끼자마자 멈춘 정우는 침대를 돌아 손을 뻗었다. 커튼이 만져지자 정우는 그것을 살짝 거뒀다. 핸드폰 불빛과 다른 은은한 달빛이 살포시 스며들어와 재경의 실루엣을 비췄다.
다시 재경의 침대로 돌아온 정우는 그의 침대에 살포시 앉았다. 아까보다 잘 보이는 재경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하나씩 살펴보는 정우의 표정에 오묘하게 변해갔다.
어제 재경에게 마음을 들킨 건 정우도 예상 못 한 일이었다. 뭐, 계속 쌓아둔 마음이 언제든 터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그 기회가 빠르게, 그리고 자신도 생각 못 할 때 찾아왔다.
정우의 고개가 기울어지자 재경의 얼굴에 드리운 어둠이 따라 움직였다. 같은 얼굴인데도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얼굴을 아예 턱을 괴고 새롭게 감상했다.
“너… 꽤 의외의 반응을 보인 거 알지?”
제 마음을 알고 당황하다가 난처해하는 게 아니라 같이 얼굴을 붉히고 놀란 듯 구는 건 정말 의외란 소리였다.
“그런 마음을 보이면 내가 기대하게 되잖아.”
어제 하루 내내 재경을 살펴보면서 느낀 건 그는 자신을 크게 싫어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오히려…….
* * *
막 세안을 마친 재경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어제의 일을 정리했다.
“급한 것부터 생각하자. 지금은 어떻게든 좋은 무대를 만드는 것에만 집중해야 해.”
재경은 자신에게 경고도 할 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우를 향한 마음이 이상하게 흔들린다는 게 어제 결정적으로 느껴졌을 뿐 그 이전의 미비한 지진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돌아볼 때가 아니었다.
“마지막이잖아.”
마지막 무대이기에 그 어떤 무대보다 잘 해내고 싶었다. 그러려면 정우에게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고 노래에 집중해야만 했다. 보다 나은 무대를 만드는 것만이 정우를 선택한 것에서도 후회가 남지 않고 또 앞으로 재경이 걸어가야 할 새로운 인생을 후회 없이 시작할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오디션이 끝나고 나중에 제 마음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단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재경이 수건을 들고 앞으로 흘러내려온 머리를 넘기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 서 있는 정우를 보고 흠칫 놀랐다.
“잘 잤냐. 금방 나올 줄 알았는데.”
“어, 어어 오래 기다렸어?”
“아니, 너 들어간 인기척만 듣고 밍기적거리다 일어났어.”
재경은 정우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 못 했기에 그만 버벅거리고 말았다. 실은 마음을 다잡자고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마주치면 불편할 게 뻔했기에 정우와 필요할 때만 마주치려 일찍 일어나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떡하니 기다렸다는 듯 서 있으니 재경이 어떤 말을 할까 하다가 옆으로 물러났다.
“아, 너 화장실 들어갈 거지?”
“응.”
정우는 아직 눈동자에 잠이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로 옆으로 물러난 재경을 보았다. 그러다 그의 머리가 삐죽 솟아오른 걸 발견한 정우가 피식 미소 지었다.
“머리 귀엽네.”
말로도 모자라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간 정우가 태연히 하품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 뭐야.”
정우가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재경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까 정우가 머리를 향해 갑작스럽게 손이 올라왔을 때 재경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앞머리를 넘긴다고 넘겼는데 삐죽 서 있었나 보다. 제 머리를 보고 한 말인데 왜 아침부터 심장이 크게 뛰었는지 재경은 괜히 짜증으로 그것을 감춰보려 했다. 그런다고 제 속이 감춰질까. 재경은 정우가 쓰다듬고 간 온기를 털어내겠다고 머리를 쓰다듬다가 포기한 듯 손을 내렸다.
아무일도 없던 듯 제 자리로 돌아온 재경이 물기가 남아있는 얼굴을 마저 수건을 훔치며 거울을 보았다. 말간 얼굴에 은은한 홍조가 깃들어 있어 괜히 애꿎은 거울만 손을 훔쳤다. 손이 제 얼굴을 가리면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손을 내리면 붉은 볼이 다시 거울에 비쳤다.
고작 머리하나 만진 건데…….
재경은 수건을 대충 옆에 놓고 화장품을 들었지만 뚜껑 하나도 따지 못한 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 * *
홀에 옹기종기 모인 와중에 재경은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정우보다 먼저 나오려고 일찍 일어났고 화장실에서 나름 마음도 다잡고 나왔다. 그러나 그 순간이 무색하게 정우와 마주치고 평소라면 별거 아니었을 스킨십을 한 것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재경의 아침은 제 통제를 벗어난 듯 제멋대로 뻗어나가고 말았다.
그래도 다른 사람을 만나면 이 생각도 누그러질까 싶은 생각으로 억지로 아침 식사를 하고 왔다. 이번 무대만 집중하자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러니까 이번 무대에 집중해야 하는데…….
“케미 그리고 라이벌이라는 주제에 맞게 같은 팀이 된 상대방을 잘 아는 시간이 되고자 게임을 마련했습니다.”
재경의 눈동자가 점점 크게 흔들려왔다. 사적인 감정을 다 누르고 무대에 집중하겠다고 결정한 게 오늘 아침이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지났다고 제 의지가 사정없이 흔드는 일이 생겼는지 황당할 지경이었다.
“저거 그냥 커플 게임 아니냐?”
보다 못한 하준의 감상에 소운이 작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2명씩 팀을 이뤄서 점수 내기인 게임이긴 한데 게임명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다.
손을 맞춰 봐, 맛을 맞춰 봐, 내 마음을 맞춰 봐 등등 괴상한 게임명이 주르륵 달려 있었다. 재경은 그것을 억지로 끝까지 읽어 본 후 옆에 있는 하준에게 물었다.
“혹시 저 중에 하나만 하는 걸까요?”
그 말을 들은 하준이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모았다. 하준도 황당한 마음에 대충 훑어봤던 게임명을 다시 보고, 또 제작진 뒤편에 준비된 소품을 훑어보았다.
“다 할 거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해요?”
“저기 소품을 봐 봐. 한 팀당 한 게임으로 치기엔 같은 종류의 소품이 많잖아.”
제작진이 가린다고 가리긴 했지만 전부 가린 것도 아니었고 얼추 내보이는 게 있으니 그 정도로 추론한 것이다. 실은 하준이 본 걸 재경이라고 못 보진 않았다. 다만 인정하기 싫을 뿐이지.
‘정우랑 저런 맞춰 봐 게임을 하라고?’
이거 괜찮은 걸까 싶은데 옆에서 소운은 재밌겠다는 듯 한껏 목소리가 올라가 있었다.
“라이벌이 되기 전에 한껏 사이가 좋아져 보라고 마련한 거겠죠?”
“아마도?”
“재밌겠다.”
소운은 하준과 주먹을 살짝 부딪치며 전의를 다졌고 다른 팀도 나름 사이가 좋아서인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처음부터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 낮은 상대를 뽑은 게 아니다 보니 사이가 꽤 좋았다. 거기다 같은 노래로 함께 연습하고 같은 방도 쓰고 있으니 더욱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재경만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싫어?”
보다 못한 정우가 제 어깨로 재경의 어깨를 툭 치며 물어왔다. 그의 단순한 접촉에도 흠칫 놀라는 재경은 뒤늦게 아무것도 아닌 척하면서도 얘는 뭐 이렇게 툭툭 건드리냐 싶은 불만의 눈으로 보았다.
“라이벌인데 친목 게임 하라잖아. 어쩐지 케미를 붙일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어.”
“마음에 없는 소릴 잘도 하네.”
정우가 재경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너는 내가 라이벌로 싫어서 뽑은 거 아니잖아. 좋아서 뽑아놓고 왜 이제 와서 케미에 불만이야?”
“그거야…….”
이미 대놓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정우와 마지막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하고 뽑았다. 당연히 재경이 이 오디션에서 자기를 제일 가깝게 여기는 걸 아는 정우가 그에게 상체를 가깝게 기울였다.
“나는 좋아.”
“뭐가 좋다고…….”
“네가 좋거든. 그래서 너랑 하는 거 다 좋아.”
“너 그런 말을 잘도…….”
재경이 주변을 돌아보며 기겁한 눈으로 정우를 보았다. 그러나 정우는 어깨를 으쓱일뿐 전혀 찔리는 표정이 아니었다. 누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투지만 실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와중에 작은 소리는 오디오에 잡히지 않은 걸 알기에 벌이는 대담한 짓이었다.
“그런 말을 왜 지금 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 마음을 들켰잖아. 뭐, 이제 너도 아니까 그래서 말한 건데?”
“일단 닥쳐 봐.”
오죽하면 재경이 정우의 입을 막았다. 그러고 한숨을 푹푹 쉬고 있으니 정우가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는 어제 제 마음의 일부를 내보이고부터 재경이 혼란스러워하는 걸 옆에서 다 지켜보았다. 생각보다 불쾌한 반응이 아닌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희망이 생기고 있었다.
정우는 재경의 손에 입을 막은 그대로 웅얼거렸다.
“지금은 오디션에 집중해야 하니까 고백하지 않을게.”
“이 미친놈.”
“뭐, 그것도 실은 내 마음대로 참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재경은 진짜 황당한 놈이라는 듯 정우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해도 안 먹힐 게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