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96화 (96/125)

96화

가사를 해석해 보면 ‘영원과 같은 순간’, ‘나를 네 마음에 담아’, ‘영원히 나를 기억해’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루는 노래였다.

그 가사가 마음에 들었던 건 정우와 찍었던 영상을 보면서 평생을 두고 볼 수 있다는 게 특별하게 작용한 듯했다. 제 인생의 한 부분이 저렇게 영상으로 남아 언제든 볼 수 있다는 것.

재경이 정우를 돌아보았다.

“어때?”

재경이 팝의 제목을 언급하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노래를 찾아서 듣던 정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3분이 넘어가는 노래를 끝까지 듣고도 다시 반복 재생을 틀어서 듣더니 그제야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멜로디도 멜로디인데 가사가 좋네.”

정우는 몇 번이나 화면을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며 가사를 눈에 담았다.

“그럼 이 노래로 할까?”

재경이 괜찮냐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자 정우는 대답 대신 손을 들었다. 그의 손을 보던 재경이 피식 웃더니 그와 손바닥을 부딪쳤다. 노래가 결정되면서 둘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이거 리듬도 잘 이용하면 되겠네.”

정우는 아예 가사를 화면 가득 띄워서 파트를 나누기 좋은 구간을 가리켰다. 재경도 정우를 따라 가사를 보면서 제 의견을 보탰다.

“너 여기까지 올라가?”

“이 정도 고음은 가능하지. 그다음은… 솔직히 모르겠어.”

정우가 가리킨 곳은 본 재경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고음 낸 적이 있었나?’

재경은 그동안 정우가 불렀던 파트를 떠올려보았다. 생각해 보면 정우는 늘 안정권의 파트만 받았다. 그건 이 오디션에서도 그렇고 소속사에서 활동할 때도 그랬다. 굳이 정우를 어려운 파트로 이미지가 깎일 위험 요소를 배제했던 거 같았다. 정우가 고개를 젓는 걸 본 재경이 제 볼을 긁적이다가 한 구절을 가리켰다.

“이거 해 볼래?”

방금 정우가 잘 모르겠다고 한, 훅에서 한 번 더 치고 올라가는 부분이었다. 정우가 곰곰이 할 수 있나 고민하는 사이, 재경이 고개를 들었다가 코앞에 있는 그의 얼굴을 발견하고 뒤늦게 깜짝 놀랐다.

‘우리 지금 영상 보는 중이었지?’

노래가 떠올라서 바로 집중하는 바람에 깜박 잊고 말았다. 재경의 눈동자가 화면과 정우를 번갈아 오갔다. 고음을 두고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정우의 옆구리를 찔러서 이 상황을 알릴까 고민하던 재경은 저 혼자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굳이 정우를 건드는 대신 자기 혼자 리액션을 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와, 재밌다.”

어딘가 어설픈 대화와 함께 소리 없는 박수를 치며 재경은 마저 영상을 보았다. 물론 어떤 내용인지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러다 나온 한 장면에 재경이 제 이마를 탁 치고 감쌌다.

1라운드이자 단체 무대에 선 날이었다. 저 날은 꽤 복잡한 마음에 집중하지 못했던 자신을 정우가 종일 걱정해 주던 날이었다. 정우가 있어 리허설보다 더 나은 본무대를 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엔딩 후에 잡힌 부분이 문제였다. 이정우 얼굴에 흐르는 땀이 뭐 어땠는지 자신이 뭐라 중얼거리며 그걸 닦아 주고 있던 것이다.

둘이 나눈 이야기는 들리지 않지만, 그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재경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 따갑다는 정우의 말에 재경이 이제 알았냐며 타박했는데 막상 그 대화 내용이 빠진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했다.

‘나 잘해쪄여?’

‘너무너무 잘해쪄요. 그래서 정우 이마에 땀두 나쪄여. 닦아 주떼여.’

‘알게써여. 내가 닦아 주께여.’

와 같은 닭살 돋는 듯한 느낌에 재경이 제 팔을 부여잡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느끼해. 느끼하다고.’

저건 일부러 넣은 거다. 배경음으로 일부러 오디오를 없애고 넣은 게 분명했다. 물론 저 때의 대화가 오디오에 잡혔을지도 의문이지만, 이제 다 의심스러웠다.

드디어 끝이 안 보일 것 같은 화면이 어두워졌다. 아마 방송에 나가는 용이라 그리 길지 않았지만 재경에겐 있어 영화 한 편을 본 것만 같았던 시간이었다.

카메라에 찍힌 스스로를 보고 있으니 얼마나 민망한지. 아이돌로 방송에 나오는 모습을 종종 보긴 했지만, 엄연히 대본이 있고 정해진 대로 말했던 때와 저건 달랐다.

제 날것의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으니 아무렇지 않게 볼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이정우에게 유난히 틱틱대던 때라 더 미안하기도 하고 나는 왜 이정우한테만 저렇게 화를 내고 있을까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혹시 다음에도 뭔가 해 주겠다고 하면 꼭 거절해야지.’

기록이 남은 건 정말 좋은데 저런 비슷한 종류의 기록이 두 개, 세 개 쌓이면 그만큼 제 부끄러움도 쌓이겠다. 재경이 정우에게 끝난단 의미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 정우가 고개를 들어 어두워진 화면과 어둑해진 주변을 둘러봤다. 다 끝났다는 걸 확인한 정우는 뒷부분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소용없었다.

“일어나.”

다 보고 난 재경은 다시 돌려서 볼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재경이 얄짤 없이 일어나자 자리에서 더 엉덩이를 비비적거리던 정우도 마지못해 일어났다.

어차피 방송으로 보겠지만 그래도 중간에 노래에 정신이 팔린 제가 한심한지 거칠게 머리도 비벼 댔다. 그런다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엉키겠느냐마는.

재경이 앞장서서 걸어가 문을 활짝 열자 아까 보지 못했던 최PD가 서 있었다. 앞을 가로막은 그 덕분에 재경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자 뒤에 선 정우가 무슨 일인가 싶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밌게 보셨나요?”

“…네.”

‘아니요’라는 말이 목끝까지 올라왔지만 PD의 옆에 있는 카메라를 의식한 재경이 억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이게 두 사람에게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참, 리액션도 적절하게 나갈 테니 실제 방송분은 조금 더 늘어날 거예요.”

“네.”

어차피 리액션이라고 할만한 게 없어서 그리 늘어나지 않을 거 같았다. 그래서 재경은 다른 말 없이 가벼운 대답을 하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혹시나 카메라를 돌려볼까 봐 약간 걸음을 서두른 감도 없지 않았다.

*  *  *

어설픈 리액션을 끝으로 방으로 돌아온 재경은 양반다리를 한 채 정우만 빤히 바라보았다. 파트를 나누자고 했을 때부터 혼자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기는 한데 시간이 지나도록 속 시원한 답이 들려오지 않는 것이다. 만약 못한다고 하면 그 파트는 재경이 하면 된다. 그러니 생각하는 대로 말해주면 되련만, 싶었던 재경이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몸을 굳혔다.

‘생각해 보면 나 고음 자신 없었지 않나?’

하도 이탈이 많이 나서 막 위축되곤 했었는데 이젠 막연한 과거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이런 생각이 처음은 아니지만 두 번 세 번 생각해도 처음 생각난 것처럼 심장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무대에 올라가는 게 두렵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무대에 설 때 실수하진 않을까 싶었던 건 초반이었을 뿐 이후엔 다른 생각이 많아졌다.

재경은 뜨끈한 볼을 두 손으로 감싸다가 눈가마저 열이 오르자 아예 얼굴을 감싸 버렸다. 재경의 움직임에 반응해 정우가 고개를 들었다.

“왜?”

“어? 아니, 그게…….”

재경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손만 내려서 휘젓는데 그러면서 드러난 얼굴을 본 정우가 흠칫 놀랐다. 재경의 달아오른 볼에 찍힌 하얀 손자국이 사라지면서 발그레한 색이 올라오고 있었다.

왜 재경이 얼굴을 붉혔는지 모르지만 그 색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예쁘다는 생각에 정우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고개를 슬쩍 뒤로 물렸다. 붉어진 볼도 가까웠고 또 그만큼이나 붉은 입술도 가까워서…….

“뭐야, 너는 왜 피해?”

재경이 외려 정우의 반응을 이상하다는 듯 캐물었다. 재경 자신이야 고음을 낼 수 있다는 게 기뻐서 그런 건데 이정우 쟤는 왜……?

뭐지. 재경은 정우의 얼굴을 조금 더 살펴 봤다. 손등으로 얼굴을 가려보지만 붉어진 눈가는 가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순간 재경의 가라앉았던 피부가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정우를 보고 있으니 순간 미처 정리 못 했던 아까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재경이 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척 시선을 피했다.

‘왜 그 말이 지금 갑자기 생각이 나서는.’

분명 누구보다 편해진 존재였는데 이상하게 달아오른 공기가 불편하게 가슴을 조여 왔다. 같은 상대라도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편해지다가도 불편해질 수 있구나 싶었다. 재경은 몇 번 눈을 깜박여 억지로 감정을 털어냈다. 그리고 정우도 헛기침과 함께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며 말했다.

“으흠. 아무튼 이 부분 내가 해 볼게.”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히 입을 열었지만 살짝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쨌든 피해 보려고 하는 그의 노력에 재경은 모른 척 대답했다.

“연습하다가 힘들면 말해.”

정우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지만 전혀 물러날 눈빛이 아니었다. 재경이 어떤 말을 해도 무조건 소화하겠다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저게 고집이 될지 아니면 그만한 노력의 발판이 될지는 정우가 하기에 달렸다.

재경은 더 말을 붙이는 대신 그냥 종이로 뽑은 가사지에 정우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다음 파트에 제 이름을 넣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내가 할게.”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재경이 수월하게 남은 파트를 나누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전부 다 나누고 돌아보는 동안 재경이 연필의 끝을 치아로 잘근잘근 물었다가 눈만 위로 떠서 시계를 보았다. 정우를 다르게 의식하고 있음을 깨닫자 이번 라운드가 생각보다 어려울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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