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95화 (95/125)

95화

“형들은 어떤 곡할지 정했어요?”

소운의 물음에 젓가락으로 막 반찬을 들던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제법 오랜 시간 고민하긴 했지만 결정된 게 없어서 안그래도 조금 답답한 참이었다. 작은 멸치볶음을 집으려는 젓가락의 끝이 뭉툭했다.

“딱 생각나는 게 없나보네.”

하준이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방을 나오고부터 곡을 선택한 팀은 제법 분위기가 좋은데 반해 아닌 팀은 미간에 주름 하나씩 지고 있었다. 재경이 화제를 돌렸다.

“형은 정했어요?”

“우리야 정했지. 별로 어렵지 않았어. 소운이랑 내가 잘 어울리는 곡이 하나밖에 없었거든.”

재경이 하준과 소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키도 크고 제법 시원시원하게 생긴 하준은 아이돌보다는 배우에 가까운 외모였다. 음역대가 높지는 않았지만 달콤한 목소리를 낼 줄 알아서 항상 노래의 도입부분을 맡곤 했다. 그리고 소운은 이번 오디션에 참가하면서 알게 되긴 했지만 순수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꽤 고음까지도 나올 수 있는 음역대라 선택할 수 있는 노래의 폭이 제법 넓었다.

그런 둘이 부를 노래라면…….

어느새 하준과 똑같이 턱을 괸 재경이 돌연 퀴즈라도 맞추는 듯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맞춰보려고 열심히 생각을 굴리던 재경이 하나의 제목을 입에 담았다.

“butter?”

“어? 맞췄네.”

한 방에 자신들이 정한 노래를 맞춰버렸다. 하준이 신기하면서도 재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소운은 그저 재경이라면 다 알 줄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맞아요. 버터.”

버터는 남자아이돌이 상큼함을 중무장한 채 들고 나왔던 곡이었다. 하준과 소운에게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정말 둘만을 위한 곡.

잘됐다는 듯 말하는 재경의 시선에 정우를 잠시 스쳐갔다.

이왕이면 자신들에게도 정말 잘 어울리는 곡을 선택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평생 후회하지 않을 정도면 더 좋겠고.

*  *  *

스태프의 부름에 재경과 정우는 저녁을 먹자마자 움직였다. 이제껏 호텔에서 지낸다 할지라도 워낙 행동반경이 정해져 있었는데 스태프가 처음으로 일반인이 이용하는 쪽으로 재경을 불러왔다. 그리고는 기다리고 있다가 재경과 정우에게 들어가라고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재경은 스태프가 시키는데로 안으로 들어갔다가 작게 놀란 탄식을 흘렸다.

호텔에 이런 공간이 있었나? 은근하게 어둑하면서도 군데군데 넘어지지 않게 은은한 빛이 깔려 있었다. 재경은 조명이 깔린 바닥을 걸어 눈치껏 가운데 놓인 두 개의 소파 중 하나에 앉았다. 소파의 높이가 낮다 싶었는데 역시나 몸이 파묻히듯 들어가면서 무릎이 위로 올라왔다.

재경의 뒤를 따라온 정우가 옆에 앉자 그나마 주변을 구분할 수 있었던 빛이 사라지고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여긴 어디야.”

주변을 둘러봐야 보이는 게 없어서 재경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어디선가 기계음이 울려왔다. 어디서 들려오는 건가 싶었는데 곧 재경과 정우의 앞에 빔이 쏜 화면이 밝게 떠올랐다. 그제야 아까보다 밝아진 주변의 모습에 재경이 빠르게 훑어 작은 상영관과 같다는 걸 알았다.

화면 속에는 최PD가 정지되어 있었는데 카메라 뒤에서 누군가 작게 신호를 보내는 소리에 그가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지금껏 누군가의 앞에 나와서 설명했었는데 이렇게 카메라를 보고 서 있는 게 어색한 눈치였다.

[잘 왔습니다. 이렇게 둘만 따로 부른 이유는 이번주에 둘에 대한 짧은 영상 하나를 내보내려고 해요.]

영상?

재경이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최PD만 뚫어지라 보고 있으니 정우가 제게 기우는 게 느껴졌다. 어깨가 무겁도록 붙은 정우는 이내 재경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 짜주신다고 했던 거."

구석에 위치한 오디오에 잡히지 않으려고 중얼거린 터지만 재경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정우에게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우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 그리고 자기 역시 그가 싫지 않다는 생각을 완전히 정리하지도 못한 상태라 한껏 동요하고 말았다.

재경이 억지로 고개를 두번 끄덕이자 어깨를 누르던 정우의 무게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옆에 있다는 것 때문인지 어깨에서 어껴지는 온기는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안 그래도 묵혀두는 게 너무도 아까웠던 영상들이었는데 이번에 활용하게 되었네요.]

하긴 그때는 그랬다. 재경은 PR시간 외에 어떻게든 제 얼굴이 안 나오려고 했었고 정우는 자꾸 미션을 따내면서도 재경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아서 좀처럼 혼자 있는 컷을 따기가 힘들었다.

최PD는 다른 일로 바빠서 이렇게 미리 녹화로 전달하게 되었다고 했다.

[두 연습생의 반응까지 다 잡아서 나갈거니까 찰진 리액션 부탁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화면이 바뀌었다.

처음 오디션에 들어왔을 때였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잠이 든 재경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겨 있었다.

“뭐야... 저건 언제.”

저때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했었는데 자기가 졸고 있는 게 찍혔을 줄도 몰랐다. 그런데 졸고 있는 재경의 옆으로 지금껏 몰랐던 누군가가 함께 잡혔다. 정우가 재경의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재경이 정우를 돌아보았다.

“너 언제 저기 앉아있었냐.”

“내가 앉았을 때 너 자고 있었어.”

“그럼 깨워주지.”

“깨웠어야 하나?”

정우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태연히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왜 안 깨웠냐고 계속 물고늘어지는 것도 그래서 재경이 그를 한번 째려보고는 똑같이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서 막 정우가 재경을 들어올리려고 그의 다리에 팔을 밀어넣는 걸 보자마자 재경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거…….”

영상을 보는 재경이 언제 찍은 거더라 떠올려보았다. 워낙 초기의 일이라 금방 떠올랐다. 자신은 이정우를 알고 있었기에 딱히 그가 낯설진 않았지만 반대는 아니었다. 정우는 기껏해야 서류를 넣은 날 본 것 말고는 처음 본 자신의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저때부터 너 되게 이상했던 거 알지? 태연이나 건후가 있는데 왜 굳이 나한테 달라붙는지 진짜 이해가 안 되더라.”

“나를 너무 경계하는 너도 정상은 아니었어. 인사만 해도 친해질 풋풋한 나인데 너무 날 경계하더라.”

“와…… 이렇게 날 몰아가는거야?”

저게 무슨 옛날이야기라도 하는지 풋풋하다는 말을 꺼내고 있으니 재경이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눈이 커지며 기막힌 탄식을 내뱉고 있으니 정우가 마저 보라며 무릎을 쳐왔다.

그리고 단체 군무를 하게 되면서 재경과 정우가 한 팀이었던 내용이었다. 프로필 촬영할 때의 재경을 보여주고 있으니 정우가 제 턱을 쓰다듬더니 재경에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 저때 처음 아니지?”

“뭐, 뭐가 아니야.”

살짝 찔리는 마음에 재경이 말을 버벅거리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저거는 초보가 찍는 프로필 촬영이 아니야. 너무 자연스럽잖아.”

“그냥 사진작가님이 시키는대로 움직인 거 뿐이거든?”

“누가 들으면 되게 자세히 요구한 줄 알겠어. 간단한 지시 하나에 완전히 다르게 움직였잖아.”

정우가 꼬치꼬치 따져물으니 재경이 손을 들었다.

“나 19살이야. 19살엔 저 촬영이 처음이야.”

“흐음.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네.”

굳이 19살을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 지금도 19살이 주제에, 같은 중얼거림에 재경이 결국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재경도 할 말이 많아서 반격했다.

“너는 뭐 저때 어색하게 찍었냐?”

“나는…….”

마침 정우의 촬영본이 나오고 있었다. 절대 웃지 않았고 묵직한 분위기를 그대로 풍겨내고 있어 정우 역시 절대 초보같지 않았다.

“웃으면 어색할까봐 최대한 표정을 굳힌거야.”

“와, 그런 거였어?”

재경이 당했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그게 컨셉이라도 되는 줄 알았네. 그냥 겉멋이었어.”

정우는 억울한 마음에 변명이라도 하려다 일이 커질 거 같아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불만에 찬 눈빛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자기도 하나만 걸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다음 것을 보고 있자니 보컬 레슨이 나왔다.

“어?”

뭔가 떠오른 재경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이거 혹시 중간에 정지되나요?”

그리고는 정우밖에 없는 공간에서 크게 떠들어보지만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웅웅거리며 빔이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뿐. 재경의 반응을 본 정우가 뭔가 싶어 화면을 보았다.

[지금은 저게 더 좋은 거 같아요. 막상 무대에 올라가면 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은 선생님에게 자기 목소리를 보여주는 시간이잖아요. 크게 들뜬 모습보다는 앞으로 있을 레슨에 맞춰 도움을 받는 게 더 좋으니까요.]

“흐음. 그랬단 말이지?”

재경이 유민혁 연습생에게 정우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있는 게 흘러나왔다. 정우는 자기를 위해 그럴 줄 몰랐다는 듯 퍽 감동한 눈치였다. 재경을 놀리려 일부러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는 것도 잊지 않았고.

“하아. 이거 진짜 언제 끝나냐.”

이젠 리액션이고 뭐고 나가고 싶다. 재경의 앓는 소리에 정우가 목을 울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렇게 보니까 재밌네. 저때는 카메라를 의식하지만 어떻게 찍힐지 하나도 몰랐잖아. 평생 잊지 못할 거 같아. 아닌가? 어차피 저렇게 영상이 남아있으니까 잊을 수도 없겠네.”

“누가 들으면 엄청 옛날인 줄 알겠네.”

재경은 툴툴대면서도 정우의 말을 따로 부정하진 않았다.

재경은 번개처럼 떠오른 하나의 노래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정우가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재경은 곧바로 그에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주 잠깐 정우의 무릎을 툭툭 친 재경이 하나를 입에 담았다.

“Remember me forever.”

나를 영원히 기억해줘요, 라는 한 여성 가수의 팝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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