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합격과 탈락의 문턱에서 재경은 간신히 커트라인 안에 설 수 있었다. 저번에 이어 이번에도 합격하게 된 게 믿기지 않았다. 어쨌든 마지막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곱씹던 재경은 무심코 고개를 돌려 제게 다가오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와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다. 어차피 최종 데뷔에는 들어가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완전히 이 오디션과 인연이 끊어진 건 아니었다.
“수고했어.”
정우의 인사를 들으며 재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탈락한대도 나쁠 건 없었겠지만 마지막 아쉬움을 달랠 기회가 생겼다는 게 재경의 마음을 아주 조금 편하게 해 주었다
했다.
“한 시간 있다가 다시 촬영 재개한다니까 우리 어디 가서 쉬었다 오자.”
재경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우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그가 먼저 걸어가면서 낸 길을 따라 걷고 있으니 앞으로 나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 * *
“마지막 생방송 무대에서 진행할 무대는 2가지입니다. 첫 번째 무대는 일단 주제를 먼저 볼까요?”
최PD의 설명과 함께 빔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면이 달라졌다.
[케미 그리고 라이벌.]
화면에 떠오른 그대로 읽은 재경은 18명을 두고 어떻게 무대를 꾸밀지 단박에 감을 잡았다. 재경만이 아닌데 몇몇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얼추 비슷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2명이 한 팀이 되어 무대를 만들면 되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점수겠죠. 현장에서 둘의 무대를 보고 더 잘했다는 사람에게 투표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이 몰표에 가깝게 가져간다면 다른 사람은 그만큼 표가 아주 적어지겠죠.”
설명이 이어질수록 연습생들의 긴장감이 더욱 커져 가고 있었다. 이건 누구와 만나느냐가 가장 크게 좌우될 일이었다. 특히나 그들에게 있어 가장 피하고 싶은 상대는 1위인 이정우겠지.
“첫 무대에서는 현장 투표만을 받아들여 점수를 매기고 두 번째는 단체 무대입니다. 이번에 이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서 두 개의 신곡을 받아왔는데요. 그중 하나는 오프닝에서 나왔던 였고 다른 하나는 이번 마지막 무대를 위해 준비했어요.”
최PD는 계속 설명을 이어가지만, 재경은 첫 번째 무대에서만 계속 생각이 맴돌았다. 두 명이서 꾸미는 무대. 재경의 표정이 심각해지면서 계속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떤 무대를 하면 좋을까, 내가 가장 원하는 무대는 무엇일까.
“그럼 슬슬 라이벌을 뽑아 볼까요? 아무래도 이번 방식에서는 우선 선택권을 가진 연습생이 너무 많이 유리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해 봤는데요.”
최PD가 한쪽으로 걸어가 투명하고 네모난 통을 들고 왔다.
“이럴 땐 역시 제비뽑기가 최고겠죠? 여기 18개의 공을 뽑아서 1부터 9까지 쓰인 연습생이 나와서 상대를 지목하면 됩니다. 만약 1을 뽑은 연습생이 우연히 2번을 뽑은 연습생을 뽑게 된다면 그다음 순서는 3번을 뽑은 연습생이 되겠죠?”
“저거 그냥 소품 재활용하는 거 같은데.”
통을 심각하게 바라보던 재경은 순간 들려온 하준의 목소리에 황급히 제 입을 막았다. 엉뚱한 말을 꺼낸 하준 때문에 재경의 심각했던 감정이 누그러져 버렸다.
“네가 생각해도 그래 보이지 않아? 저거 딱 우리 방 뽑을 때 그 뽑기통이잖아.”
하준이 재경에게 동조를 구하려고 말하다가 다른 사람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소운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마지막 무대를 두고 심각해질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게 변해있었다.
“일단 내가 1번을 뽑으면 희생정신으로 정우를 데려가 볼게.”
하준이 논개의 심정이라도 뽑아오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실은 PD가 설명할 때 다들 이정우를 가장 경계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하준이 대놓고 드러내는 것뿐이었다.
“그럼 한 사람씩 와서 공을 뽑아가 주세요.”
연습생들이 슬금슬금 일어날 때 하준이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여 가장 앞에 섰다.
“오, 윤하준 연습생. 혹시 염두에 둔 연습생이 있나요?”
“정우 빼고 다요.”
“아, 아까 정우를 뽑겠다고 했던 걸 들었는데…….”
그새 말이 바뀌냐는 최PD의 탄식에 윤하준이 능청스럽게 말을 바꿨다.
“그건 제가 1번을 뽑을 때요.”
“그런 조건이 있었구나. 이번에 2등 했는데 이정우 연습생을 데리고 갈 마음이 거의 없구나.”
최PD의 탄식에 윤하준은 웃으며 공을 뽑아갔다. 윤하준을 시작으로 줄을 선 사람들이 하나씩 공을 뽑아갔다. 앉은 자리에서 나왔더니 얼떨결에 중간 즈음에 섰던 재경도 금방 공을 뽑아 제 자리로 돌아왔다. 아직 자신이 뽑은 공이 몇 번인지 각자만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재경은 슬쩍 제가 뽑은 공의 번호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번호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재경의 은밀한 움직임에 자신의 번호를 확인하던 정우가 쳐다보는 듯했지만 촬영 중이라 따로 말을 걸진 않았다.
“그럼 시작해보겠습니다. 1번을 뽑은 사람은 앞으로 나와주세요.”
가장 먼저 상대를 뽑을 수 있기에 가장 유리한 번호겠다. 서로 누가 1번을 뽑았는지 돌아보는 사이 재경은 최PD만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최PD와 눈이 마주치면서 재경은 제가 1번이라는 걸 알려주듯 공을 들었다.
“다녀와.”
윤하준의 인사에 재경이 그를 돌아보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앞으로 몸을 돌린 사이 시야에 걸렸던 정우는 못 본 척 앞으로 걸어 나갔다.
“운이 좋네요. 여기 17명의 연습생 누구든 뽑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럼 선택해주세요.”
가장 좋은 건 낮은 등수의 연습생을 뽑아 최대한 투표수를 가져오는 게 좋겠다. 재경은 잠시 연습생을 둘러보았다. 누구를 뽑을지 돌아보는 듯한 움직임이었지만 실은 의미 없이 훑어본 것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재경이 같이 하고 싶은 상대는 한 명이었다.
“저는 이정우 연습생과 같이 하겠습니다.”
재경이 누구나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1등의 정우를 선택하자 모두가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그들 사이에서 최PD만이 재밌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가 봤을 때, 재경은 정우의 이름을 말하기 전부터 그를 보고 있었다.
제 호명에 놀란 정우는 아주 잠깐 재경에게 왜 그랬냐는 원망의 시선을 보냈다가 이내 알았다는 듯 제 감정을 갈무리했다.
“왜 이정우 연습생을 택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최PD는 재경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았고 그건 모두의 공통된 의문이었다. 재경은 제게 쏟아지는 시선에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하는 척 굴었다. 그러다 다시 마이크를 든 재경은 화면에 띄운 글자를 가리켰다.
“‘라이벌’ 앞에 ‘케미’가 있잖아요. 정우랑 마지막 무대를 잘 꾸며 보고 싶어서요.”
그게 발표식에서 재경이 가장 많이 아쉬워하던 부분이었다. 떨어지지 않는다면 정우와 한번 멋진 무대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면 정말 모든 걸 미련 없이 가슴에 묻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재경이 덤덤하게 뱉은 이유를 들은 정우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처음엔 괜히 투표수가 갈리는 무대의 상대로 자신을 선택한 게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그러나 재경의 말에 정우 역시 뒤늦게 이 무대에 올라가는 건 단둘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재경과 둘이서 원하는 무대를 꾸밀 수 있다.
당장 오디션이라는 걸 넘어서 마음이 끌리긴 했다. 그래서 금방 감정을 정리할 수 있었던 정우가 재경의 옆에 와서 섰다.
“자, 서재경 연습생이 선택한 이유를 들었는데 그에 대한 이정우 연습생의 대답은?”
최PD가 한마디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서 정우가 재경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정우는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가며 재경과 눈을 마주쳤다. 정말 아무 사심 없이 자신을 선택한 눈빛이었다. 이런데 어떻게 재경을 미워할까.
“그렇게 내가 좋았구나.”
정우가 나직하게 뱉은 대답에 재경이 경악하는 걸 본 연습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정우 역시 편한 미소를 지으며 재경의 어깨를 끌어안아 가벼운 포옹을 했다. 정우의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재경의 어깨가 뻑뻑하게 굳어졌다.
“뭐야, 왜 안아.”
“날 좋아하는 거 같아서 해 준 건데.”
한 무대에 재경과 단둘이 설 수 있다니. 정우의 입장에서는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좋았다. 재경이 정우를 뽑게 되면서 한결 부담이 줄어든 다른 연습생들이 저마다 원하는 상대를 선택하면서 ‘케미 그리고 라이벌’을 치를 상대가 정해졌다.
의외인 건 재경과 정우만 유난히 순위 차이가 심할 뿐 다른 연습생들은 비슷한 등수끼리 붙게 되었다.
“소운아, 형이 너 선택해서 삐진 거 아니지?”
“아니요. 그보다 형이 다른 사람 누르고 올라가려고 했으면 실망했을 거 같아요.”
2위였던 하준이 10위권 밖의 연습생을 선택했다면 실망했을 거라면서 나름 5위를 한 소운이 수줍게 말했다.
“나도 너랑 무대를 같이 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알지?”
“그렇게 소운이랑 붙어 다니더니.”
하준이 소운을 끌어안고 찡찡거리는 소리에 태연이 혀를 찼다. 태연은 건후와 한 팀이 되었다. 이제는 서로 친해지게 되면서 누군가를 떨어뜨리고 내가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친 연습생은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응원해주면서 마지막 무대를 어떻게 꾸밀지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재경은 정우와 함께 지낼 마지막 라운드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