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방송이 있는 날, 재경은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부산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발로 탁탁 바닥을 때리거나 제 입술을 쓸어 버리는 등 제 몸 하나를 가만히 두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재경의 시선은 핸드폰을 향해 있었는데, 진동이 울린다 싶으면 매처럼 낚아채 어떤 연락인지 확인했다.
“진정하는 게 어때?”
그런 재경의 모습을 보다 못한 정우가 아예 허벅지에 제 턱을 올렸다. 소파에 앉아 있던 재경은 허벅지에 올라오는 묵직함을 느끼고 정우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우리가 나올까?”
“글쎄, 그거야 편집하는 사람 마음이지.”
재경의 다리를 다시 떨지 못하게 하는 김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머리까지 기댄 정우가 TV의 볼륨을 높였다. 호텔에서 나오고 줄곧 같이 지낸 덕인지 두 사람은 이전보다 서로를 편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재경이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저번에는 엄마와 싸운 걸 정우에게 들키면서 얼떨결에 그의 집에 들어왔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엔 제 발로 찾아 들어왔다. 멀쩡한 집을 놔두고 정우의 집으로 오는 게 잘한 건가 싶으면서도 못 이기는 척 따라왔다.
혹시나 엄마를 만날까 봐 그나마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온 것이었는데, 정우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재경을 편하게 받아주었다. 이전처럼 한 방에서 자지도 않고 손님방을 내어 주고, 재경이 알바를 나간다고 하니 흔쾌히 집 비밀번호도 알려 줬고.
당황해하는 재경에게는 나중에 비밀번호를 바꾸면 된다고 적절하게 선까지 그어 준 덕분에 어려웠던 마음도 조금 풀 수 있었다. 그렇게 재경이 틈틈이 알바를 하면서 정우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어느새 CHOOSE NINE의 방송 날이 되었다.
재경은 오늘 자기네 팀이 나올지 고민하면서도 엄마에게 올 연락을 기다렸다. 그것 때문에 본방송을 보는 내내 마음을 편히 놓지 못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데.”
정우가 고개를 젖혀 재경을 올려다보았다. 방송에 집중하지 못하는 거야 다른 때도 종종 봐왔지만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예민하게 달아있어서 작은 진동에도 움찔움찔 놀라고 있는 걸 보고 있으니 무슨 일인지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정우의 물음에 재경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이번 라운드는 특히나 재경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엄마의 노래, 계약. 그리고 그 와중에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한 번씩 전해 준 정우의 응원이었다. 특히나 제 사정을 잘 알면서 티나지 않게 뒤를 받쳐준 그였으니 왜 그런지 말해도 되지 않을까?
“엄마가 계약한다고 했어.”
“그 사기꾼?”
“응.”
재경의 대답에 정우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아예 소파 위로 올라와 재경과 눈높이를 맞췄다.
“왜? 아니, 사기꾼이라는 걸 말했고 또 네가 같이 안 있는데 계약한다고 했어?”
“나도 같이 있어야 계약할 줄 알고 오디션에 들어왔는데 엄마나 그 사기꾼이나 기다리다 지쳤나 봐. 어차피 법적 보호자는 엄마니까.”
“아무리 그래도 네가 싫다고 했는데.”
정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또 그걸 알았을 때 재경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싶어 정우가 제 애꿎은 상의를 그러모았다.
“내 앨범을 내주고 나서 성공하면 엄마 앨범을 내주겠다고 했나봐. 뭐, 가수가 되려고 그렇게 악착같이 버텨왔으니까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기 싫었겠지.”
“사기꾼인 걸 알면서도?”
“엄마야 뭐, 사기당했다는 걸 겪지 않으면 모를걸. 어쨌든 계약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
“서재경.”
재경이 덤덤하게 내뱉은 말투가 더 어이없었는지 정우의 목소리가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너는 사기꾼인 걸 알면서도 그걸 그냥 둬?”
“나 연습하고 있었잖아. 합숙하고 있는데 그럼 뛰쳐나가?”
“나가야지. 가만히 있다가 빚이라도 지고 살게?”
정우가 제 머리를 헝클고 가슴을 치며 답답해하는 게 다 알면서도 말리지 못한 재경이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런 정우의 마음을 알기에 재경은 작은 웃음만 흘리며 차분히 기다렸다. 아까는 언제 초조했냐는 듯 가만히 있지 못한 재경이 그렇게 말도 없이 기다리고 있자 정우가 끓어오르는 흥분을 차츰차츰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그게 다야? 계약했대? 다 끝났어?”
“그건… 잘 모르겠어. 내가 엄마한테 해도 되는데 내 노래만 듣고 하라고 했거든.”
그제야 재경이 왜 그렇게 핸드폰을 놓지 못했는지 알게 된 정우가 TV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 오늘 나오지 않으면 일주일 후에 나오잖아. 그동안 기다릴 수 있대?”
“못 기다리고 할 수도 있지.”
재경은 전부 내려놓은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이젠 결과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오늘 방송에 나오지 않으면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는 거고 엄마가 기다릴 수 없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겠지.
“그래서 생각했지. 엄마가 계약하고 빚이 생기면… 오디션에서 데뷔해서 빚을 더 빨리 갚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 빚으로 죽을 만큼 고생하고, 또 회귀하고 나서는 절대 그 빚을 지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오디션까지 들어왔는데 결국 빚을 짊어진다? 조금, 아니 아주 많이 허탈할 것 같았다.
“그래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기도 하고.”
“뭐가 아니야.”
정우가 한숨을 내쉬며 재경의 머리를 헝클었다. 재경은 그 커다란 손에 흔들리는 제 머리카락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빚은 여전하겠지만 적어도 VOB로 활동하던 멤버들과 예전보다 가까워졌다는 게 위로가 되었다. 특히나 정우와 이렇게 스스럼없이 닿고 대화를 나누는 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재경은 요즘 정우와 보낸 시간이 선물처럼 다가왔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너무도 평범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렇게 해준 게 정우였다.
이게 정우의 집에서 많이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재경은 제 할말이 다 끝났기에 홀가분한 얼굴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있는 걸 털어놨더니 정우에겐 미안하지만 재경의 속이 편안해졌다.
그런 재경의 마음이 고스란히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정우는 할 말이 가득한 눈빛을 띠고 억지로 말을 돌렸다.
“TV나 보자.”
일단 방송이 끝나고 나서 이야기하자는 식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재경이 고개를 돌려 TV를 바라보았다.
“어?”
자신들의 모습을 본 재경의 놀란 소리에 정우가 고개를 돌렸다. 재경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나오는 걸 본 정우는 곧바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우리가 부른 노래 나오겠다.”
“그건 다행이네.”
끝날 시간을 봐서는 충분히 한 곡이 나올 것을 계산한 정우가 한시름 놓고 TV에 집중했다. 연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짧은 서사가 끝나고 조명이 어두워지며 무대가 드러났다. 잔잔한 반주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팀원의 얼굴을 보다가 재경이 떠오르는 말을 툭 내뱉었다.
“이정우 잘생겼네.”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그냥 TV나 봐.”
정우가 재경의 머리를 다시 엉망으로 헝클어버렸다. 재경은 제 머리를 대충 정리하면서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였다.
“잘생기기만 한 게 잘난 척은.”
19살의 이정우는 생긴 거 빼고는 완벽하지 않았다. 노래도 춤도 다 열심히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그야말로 병아리나 다름없는 어설픈 모습이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거를 칭찬했더니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재경이 TV에 시선을 돌리자 정우는 잔뜩 붉어진 귀를 감추려는 듯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전주에서 흘러나오는 정우의 목소리에 재경이 몸을 양옆으로 살살 흔들며 감상했다. 파트를 정할 때 정우의 파트에 누구보다 강하게 의지를 표현한 게 자신이었다. 정우의 목소리는 사람의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그러니 그의 목소리로 잔뜩 관심을 끌어모으면 태연의 기분 좋은 목소리와 하준의 달콤한 목소리로 마음을 녹이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 건후가 진지하게 감정을 끌어올리고 재경이 고음과 함께 간질거렸던 마음을 시원하게 긁어 주었다. 물론 자신들이 생각한 대로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재경은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엄마를 떠올리며 마음껏 감정을 집어넣었다.
우연이지만 엄마의 노래를 만나면서 왜 제게 그렇게 가수를 시키려 했었는지 알았고 엄마의 간절한 마음을 읽었다. 그래서 재경은 엄마가 노래에 담긴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도, 결국 커다란 빚을 지게 된다고 해도 이번 한 번은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다.
노래가 끝나자 재경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저 노래를 엄마가 들었을지 궁금한데 핸드폰은 야속하리만치 반응이 없었다.
‘망했나?’
방송은 끝났고 정우가 눈치껏 방에 들어가 있는 동안 재경은 소파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어느덧 방송이 끝나고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핸드폰은 여전히 울리지 않으니 재경이 먼저 포기했다.
아무래도 오늘 연락을 줄 마음이 없나 보다, 싶은 생각으로 재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막 손님방으로 들어가려고 핸드폰을 쥐는 찰나, 우웅 진동이 울렸다.
재경이 빠르게 화면에 뜬 번호를 살폈다가 금방 실망했다. 엄마가 아닌 낯선 번호였다. 기다리는 사람의 연락이 아니라는 걸 안 재경의 팔이 힘없이 떨어지면서 핸드폰도 같이 바닥에 떨어질 뻔한 그때.
정우가 재경의 핸드폰을 가져가 받았다.
“여보세요.”
재경은 쓸데없는 전화라고 한마디 하려다 그럴 힘도 없어 그냥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는 정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놀란 듯 커진 정우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재경이 비칠 정도였다.
“어디라고요? 경찰서요?”
정우의 되물음에 재경이 믿지 못할 표정을 지었다.